III. 신약 성경 바로 보기
1. 신약 탄생의 배경
가. 유럽의 인본주의 유일신의 발호

왜 예수 그리스도가 호모사피엔스의 발상지인 알타이 산, 천산, 바이칼 호가 아닌 유라시아의 서쪽에 오셨을까? 그 이유는 그곳이 모두 인본주의가 극치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인본주의의 발단은 자연이 허락하는 데로 살지 못하고 3만 년 전에 고조선을 떠나 인도를 계급화 한 알 족(아리안)의 남성 제사장들이다. 이들은 원래 고조선의 자연 유일신을 믿으며 아시아의 북부 스탭 지역에서 이동을 하면서 2-3만 년을 살았다. 이들은 기원 전 만 2천년 전에는 인도의 북부 지역으로 들어와 그 때 까지 자연신 유일신을 섬기며 잘 살고 있던 인도를 침략하고 누구나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고조선의 삼신제사장 대신 자신들이라야만 진정한 신의 사제라고 하면서 브라만 크샤트리아 수그라 베이스라는 인도의 브라만교를 만들었다. 견디다 못한 드라비다인과 타밀인들은 힌두교를 만들어 버티었으며 북부지역 조선인들은 불교를 만들어 괴로운 현실을 마음 수련으로 극복하려 했다(기원 전 7세기) 인도를 인본적인 욕심으로 망쳐버린 아리안인들은 이번에는 페르시아와 중동을 거쳐 약 60만 년 전부터 따뜻한 곳을 찾아 대서양 연안과 지중해지역으로 들어간 선주 네안데르탈인들(유럽의 백인들)과 혼혈이 되며 섞였고 인도 유로어 족 군을 만들었다. 이 지역은 대부분 바다 접경 지역이어서 인간의 힘으로 먹고 살았으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가축을 키우거나 고기를 잡아 자연과 함께 먹고사는 동방과는 차이가 나는 지역이었다. 그리스와 로마 등 지중해 연안 지역은 배를 타지 않으면 살기가 힘든 지역으로 아리안과 백인들은 여기서도 인본주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을 모아 집단농사를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같은 현상이 중국의 황하와 나일강 유역에도 일어났다.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고조선의 자연주의 유일신 사상에 배치되는 인간이 하느님, 즉, 인간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 유일신 사상이 이 때부터 생겨난 것으로 이들은 인간끼리 힘을 모으고 시공간을 넓혀 정보를 교류하기 위해 문자를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인류 문명이라고 한다. 4대강 문명은 호모사피엔스가 6만년 이상 자연에서 느껴온 자연주의 유일신 사상에 대항하는 반동으로 생겨난 것이다. 이 4대강 문명이후 인류의 모든 전쟁은 자연신주의자들과 인본신주의자(휴메니스트)들 간의 전쟁이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것과 하느님의 징계도 이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수 천년간 있었던 모든 전쟁은 거의 모두가 중국화 해 가면서 일어난 같은 형태의 전쟁이다. 고조선의 하느님은(샤머니즘=삼한이즘=삼신사상) 서는 이러한 반동 인간 세계를 속세라고 했고 죄로 여겼다.
나. 백인의 식인 전통의 계승
유럽인은 속칭 코카시안(백인종)으로 피부색이 흰, 체격과 눈이 큰 인종을 말하는데 이러한 진화는 어두운 지역에서 오랜 기간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생인류의 미토콘드리아이브유전자 이동도에 의하면 15만 년 전부터 아프리카에서 형성된 네안데르탈인으로부터 현대 호모사피엔스가 되기까지 해를 따라 아시아로 와서는 따뜻한 지중해 지역으로 퍼져나간 인류가 주종을 이룬다. 북 구라파 백인들 중에는 시베리아에서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한 이후 시베리아 북부 저지대 스텝지역을 따라 스칸디나비아 지역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추가되었을 것이다. 원조격인 유럽인들에게 1차로 충격을 준 민족은 고조선에서 출발하여 인도를 노예국가로 만든 다음 인도 유로어를 구성하고 페르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이동하여 유럽인들을 지역 별로 혼혈 화 한 아리안 민족이다.(대표적으로 힛틀러의 독일 민족) 이들은 북쪽에서 남하한 몽골계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삼신신앙(그들이 말하는 샤머니즘)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사제도와 천문관측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의 스톤헨지, 독일의 정령 숭배, 북 구라파의 신들 및 창조 설화가 그 증거이다. 유럽의 지리적인 특징은 평균 위도가 한국보다 20-30도가 더 위인 평균 70-80도 이고 따라서 대부분 지역이 백야 현상이 있는 어두운 지역으로 태양 빛이 부족하다. 그래서 북위 30도 내외의 온대 지방처럼 열매 맺는 과일이나 관엽 수가 자라지 않으며 침엽수나 생존력이 강한 잡초들이 대륙을 뒤덮고 있다. 가축과 열매가 없으니 영양이 부족하게 되고 어두워 식생이 어려워지나 동물을 잡아먹고 생존을 위해 인류간 인육을 섭취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러한 열악한 자연 환경에서 인류는 가족보다는 생존을 위한 투쟁(먹이와 짝짓기)이 우선되었다. 스페인 북부의 알타미라동굴과 프랑스의 쇼베 동굴, 그리고 프랑스 남부 베제르 계곡의 크로마뇽 동굴에 그려져 있는 약 3만5천년전의 벽화에 인간이 서로 잡아먹는 그림과 사람을 신에게 바치는 그림들이 이를 증거하고 있으나 유럽 인들은 이를 숨기고 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근본적으로 밤의 문명이다. 햇볕을 좋아하고 모든 드라마와 영화를 비롯하여 모든 이벤트와 예술(뱀파이어, 언드 월드, 그림형제, 런던올림픽 개 폐막 식, 음악 등. 성탄이브문화 등이 모두 밤과 연관되어 있다) 이들은 인간의 피를 좋아하며 전쟁을 좋아하며 살육을 즐긴다. 지금도 매일 총을 휘두르고 사람을 죽이며 전쟁을 즐긴다. 그들의 언어는 동물적으로 행동하는 순서대로 말을 하는 도치어(倒置語)(중국어도 마찬가지다)이며 밤의 언어를 쓴다. 어두워 아무도 믿지 못하니 격과 시제가 필요하고 보는 것이 없으니 수동태가 된다. 여성을 포함하여 인간의 수가 부족하니 근친상관과 동성애가 성행하고 짝짓기가 부모나 자식보다 우선이다. 살육과 타락 이것이 아브라함과 그들의 선조 장사치들이 유럽을 돌면서 배운 유럽인들의 삶이고 이런 현상이 그대로 구약성경에 반영되었다.(소돔과 고모라,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부인 팔기, 일부다처, 다윗 가계의 근친상간, 간통, 소로몬의 3천 여부인 등등) 유럽인에게 음악은 어둠의 세계에서 받는 유일한 위안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수 만년 동안 청각이 발전되었으며 그들 음악의 기반이 되었다 그들의 음계가 천주교의 그레고리안 찬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백인들의 상황은 셈계(조선인들 최초의 호모사피엔스) 에벨의 자손으로 수메르의 가지 인 아람인 장사치들의 눈에는 유럽은 에굽과 마찬가지로 미개한 호구였을 것이다.
유럽에 1차로 인간이 하느님이다라는 인식, 즉 인본주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확립된 것은 기원전 3천년 전후 인도유로어를 가진 아리안 족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스칸디나비아로 들어온 핀 족이나, 바이킹, 렙 족의 하느님인 자연이 하느님이라는 생각은 말을 탄 무사들의 집단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2차로 유럽에 인본주의 하느님이 들어간 것은 수메르 문명이 에집트 나일강과 연결되면서 지중해 교역이 활발해진 시기에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와 그 가지인 아람 인들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7-2세기경에 그리스와 로마 문명이 바닷가에서 다신 인신과 함께 등장한 것이 이 때이다. 유럽에서 동방(조선)의 자연이 하나님이라는 인식은 나타나기 힘든 풍토였다. 이후 유럽은 인류의 전쟁 역사를 혼자서 장식하는 민족들이 되고 이후에 적은 규모로 생긴 민족들보다 그 수가 101%도 채 안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동에 온 이유, 즉, 다른 말로 자연의 하느님이 동방에 오지 않고 유럽에 오신 이유는 수 만년동안 기아와 어둠 속에서 고난을 겪어온 버려진 (페르시아, 베르린, 발칸, 발틱)서쪽 달지는 곳에 해가 없는 곳에 살아온 백인들에게 동방 조선의 하나님인 자연의 하느님으로 빛으로 오신 것이다. 지금 예수를 믿는 아리안 족의 가지(미국)이 우리를 돕는 것은 인본주의의 극치의 위협에서 자연의 하나님의 원조의 나라 (제사장 존: Priest Jhon's Country)를 돕기 위하여 온 것이다. 참고로 유럽에는 지금도 자신들이 어둠 속에서 죄를 많이 지으면 제사장 존의 나라(존스 칸츄리: 조선 나라)에서 징계를 하러 매 천년마다 온다는 밀레니엄 신드럼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힘만 세고 야행성이며 동물적인 백인들을 망쳐놓은 것은 두 가지인데 둘 다 호모사피엔스의 원조인 조선에서 흘러 들어간 것으로 하나는 아리안 족들이 가지고 간 인간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 생각(인간이 하나님이라는 생각)과 그로 인한 사회조직인 노예 제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수메르의 가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나중에 성경과 함께 가지고 들어간 피조물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었으며 이 두 가지가 발단이 되어 수메르 문명, 나일강 문명, 미케네, 그리스, 로마 문명을 만들고 이 지역에서 자연의 하느님은 죽고 로마의 식민 지배 사회가 되고 압제가 계속되자 예수 그리스도가 왔다. 지금의 세상처럼 민주주의, 시장경제, 자본주의, 공산주의, 즉 인본주의 하나님의 세상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종말과 재림 그리고 심판을 예언한 이유가 그것이다.
다. 메시아 탄생 직전 유럽의 상황
유럽에서 처음에 예수는 동시대인들이나 당대의 역사가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언급할 가치가 없는 인물로 평가된 것 같다. 현재 빌라도나 헤롯 등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의 생애와 관련된 자료들은 복수적 자료에 기록되어 예수에 비해 풍부히 남아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동시대 역사 학자들의 저서에 예수의 이름이 기록된 문서는 신약 성경 외애는 어디에도 없다. 방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역사적 실체를 입증 할 만한 그 어떠한 고고학적 유물이나 문서가 발굴된 적이 없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4복음서를 증거물로 제시할 것이다. 물론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이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4 복음서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포함하고는 있으나, 역사적 행적에 대한 기록물로 보기에는 많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최근의 방대한 연구 실적들은 크게
(1)예수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신화설) 주장하는 류와
(2) 예수의 실체는 인정하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예수와는 상치된 예수를 재구성해 내는 류로(재구성 파) 구분 할 수 있다. 재구성 파 안에서도 의견은 분분하여, 여러 모습의 예수를 그려내고 있다. 성경 구절이 진짜로 예수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는지를, 학회 회원
들의 투표로 결정, 발표하여 물의(?)를 빚는 서양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모임인 예수 학회(Jesus Seminar)가 이 재 구성 파의 대표격이다. 어쩌면 "신성 모독"이 될 수도 있는 학설들이 자유로이 제시되고 있다. 이들을 우리가 무시 할 수만 없는 것은 이들이 양심적인 학자들이며, 왜곡된 기복 신앙과 무지한 성경 지식에서 기인하는 맹목적인 믿음에서 파생되는 사회적 부작용에, 최소한도 예수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본보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나마 예수의 기록이 전해지는 책들 중에는 타시투스Tacitus(AD 55~120)라는 로마의 역사가가 쓴 책에서 짤막히 예수라는 인물이 십자가 처형에 처해졌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예수의 처형이 있은 후 약 80년 정도 지난 AD 112 년경에 기록된 것이다. 이미 예수 신화가 로마에도 널리 보급된 후의 일이므로, 그가 시중의 기독교도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적었을 확률이 매우 크다. 더구나 동시대 다른 역사가들은 Tacitus를 기독교도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 하나 AD93년에 출간된 죠세푸스(AD37년 출생)의 "유태인 연대기" (Jewish Antiquities)에도 예수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 두 군데("증언" 구절과 "형제"구절) 있으나, 학자들간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거의 모든 학자들이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위조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으며, 신화 파에서는 전체가 다 위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 먼저 믿을 수 없는 부분은 "연대기"의 복사 본들이 전부 기독교인들의 관리 하에 전수되었다는 것이다.
■ 초대 교부들과 기독교 변증가들은 왜 "조세푸스"의 저술을 인용하지 않았는가? 초대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교리에 대하여 각 종파로부터 많은 도전을 받았다. 예수의 실존과 그의 놀라운 기적들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받았고, 이러한 과정은 본인들의 저술에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좋은 증거물을 제시하지 않았다. "증언"구절은 324 년이 되어서야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처음으로 인용되었다. "형제"구절은 그전에 "오리겐"에 의해 230-250년 사이에 와서야 처음으로 인용되었다. 연대기가 발간된 게 93년경이니까 거의 140-250년이 흐른 셈이다. 그 사이에 기독교 변증 가들은 연대기를 읽지 않았을까? 연대기는 초대 기독교도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그 책을 읽었고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도, 무수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인용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읽었던 사본에는 문제의 구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백 년이 넘도록, "조세푸스"의 저술을 잘 알고 있던 초대 교부들은 상기의 증언 구절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에 동 구절이 "조세푸스"의 저술에 있었다면 그들은 도전자들과의 논쟁에서 그것을 재빨리 인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동 구절은 그 저술에 없었다. "조세푸스"의 책을 읽어 본 "오리겐"도 "조세푸스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고 서술했을 뿐이다. 동 구절은 기독교 최초 역사가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언급되었다. 동 구절은 그의 조작으로 사료된다. "유세비우스"는 신앙의 명분 아래 문서 변조를 지원하였고 "조세푸스"외의 여러 저술가들의 책들도 변조 시켰다" - 마샬 거빈 (Marshall
J. Gauvin).
■ "오리겐"은 "형제"구절은 읽었는데 "증언"구절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따라서 "증언" 구절은 그 후에 첨가되었다고 보여진다.
■ "조세푸스"의 책 "유태인 전쟁"은 "안티오쿠스"의 예루살렘 점령부터 AD 70 년의 예루살렘 함락까지의 내용을 "유태인 연대기" 책에서 그대로 복사하고 있다. "빌라도"가 군중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 등 다른 부분들은 거의 동일하게 서술되었는데 "유태인 전쟁"에서는 유독 상기의 예수 인용구들만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 "유세비우스" 추기경이 처음으로 인용한 "증언"은 "조셉 웰레스"에 의하면 본인 스스로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조셉 웰레스"는 많은 연구 끝에 당시 교부들 사이에 유행하던 문서 변조의 행태를 캐어 낸 인물이다. 그는 문서 변조의 대표자로 "유세비우스" 추기경을 꼽았다.
■ 유세비우스 본인의 말을 들어 보자.
"우리의 구세주에 관하여, 내가 이미 생산(?) 해낸 이 증거들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유태인 "조세푸스"를 여분의 증인으로 이용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 (Eusebius, Evamgelical Demonstration, Book III. p.124)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솔직한 고백인 셈이다. 이래서 "조셉 윌레스"는, 기독교의 문서변조를 증명하기가 "예상 밖으로 쉬웠다"고 하였다. "문서변조의 증거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교부들 자신의 서술과 구교의 교회사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이었다.[ 인터넷 <예수를 찾아서>중에서 ]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가 실존인물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역사기록은 없으며, 기독교인들이 내세우는 타시투스, 수에토니우스, 플리니, 탈루스 조세푸스 등의 기록들은 예수의 실존을 증명하는 사실의 기록이라고 보기 어렵거나 위조된 것이라고 의심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왜 그렇게 기록이 없는 걸까? 사후에도 동시대의 동향인들(심지어 부모까지)이 그렇게 많이 살아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개인에 대한 관심이 그토록 없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들은 핍박 때문에 예수라는 이름을 기록할 수 없었던 것일까? 로마인들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신학자를 포함)은 사상이나 종교에 매우 관대했던 로마의 법률 등을 고려하면 그 시대, 그 곳에서 기록도 못할 정도의 핍박은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더 비중을 둔다. 기독교인들은 단군을 신화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보다 무려 2,000 뒤에 탄생하고서도 학자들 사이에서 신화로 간주될 정도면 정말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 아닌가? [출처: 한국기독교성서포럼]
라. 당시 그 밖의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
■ 예수가 메시아로 조작되었을 가능성
일부 학자들은 예수가 창조되었을 가능성마저 제시하고 있다. 실제 예수라는 인물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성서에 그려진 내용처럼 그런 인물이 아닐 확률이 근세의 연구 결과물들에 의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신약의 예수는 Paul(바울)과 그 추종자들이 그들의 필요에 의해 대표적이며 상징적인 인물로 재구성과 재 포장을 통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서양의 철학자 칸트, 피히테, 셸링 등에 의해 신약 속의 바울 사상이 구별되어 지고 에른스트 카제만(Ernest Kasemann)같은 신학자들이 나타나, 기존 기독교 교단에서 절대 금기시하는 의심을 품기에 이른다. "기독교는 바울에 관한 종교다. 기독교는 예수의 복음을 예수에 관한 복음으로 대치해 놓았다." - 빌헬름 네슬(Wilhelm Nestle). 신약성서가 바울의 사상이라거나 원시 기독교 교리에 바울 주의 사상과 역사 끼워 넣기를 통해 만들어진 사상 최대의 집필진을 가진 총체적 종합서로 평가를 받는 것에는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가 있다. 심지어 기독교를 바울 교라고까지 평하고 있을 정도니까... 이러한 것은 제임스 로빈슨(James M. Robinson)이나 헬뭇 쾨스터(Helmut Koester) 등이 신학적으로 정립한 바 있다.
■ 예수의 존재에 관한 의문?
초기 로마제국시대에는 수많은 판본의 사도행전과 고백록, 서한, 문서들이 지하에서 편집되고 수정되었다. 그러다 이들 수많은 판본의 성경들 중에서 대부분은 교단의 주류에 의해서 모두 소각 당하고 파묻어졌다. 그 중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몇몇 판본은 19세기까지 교황청에 의하여 공개 금지되다가 몇몇은 햇빛을 보게 되었다. 예를 들면 "예수는 목수 요셉이 술 취한 사이에 외간남자가 마리아를 범하여 낳았다"(마케도니아에 포교하던 사도들의 기록), "어린 예수는 벌써부터 신의 아들임을 현실로 나타내셨다. 동네 아이들이 사생아라 놀리자 어린 예수께서는 초자연적인 힘으로 이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와 같은 내용이 그것이다. 문제는 이들 성경들이 적어도 서기 320년 무렵까지는 일반에 유포되던 판본의 하나였고 공식적인 성경 편찬 과정에서 모두 의도적으로 누락되었다는 점이다. 누락의 이유는 판본의 정확성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내용이 일반에 알려질 경우 신앙심을 떨어뜨릴 가능성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