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삼국 시대

가. 개요

우리는 삼국시대라는 용어가 삼한(三韓), 삼조선(三朝鮮) 혹은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三國)을 지칭하는 단어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이 말은 우리가 만든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삼국을 무척 싫어하는 번한(繁韓)=번조선(繁朝鮮)=백제(百濟) 사람들 즉 현재 중국인(中國人)들의 주력인 이씨(李氏)들이 만든 말인데 이들은 이 삼자(三字) 중에 자신들이 포함되는 것을 무척 싫어해서 수 만 년 간 샤먼(삼한)의 제정 시대가 끝나고 삼한의 마지막 계승자인 고조선이 멸망한 AD108년 이후 중국인들의 핵심 동족인 이씨 조선의 이(李)씨들이 과거 고조선의 유일한 법통인 한 반도에서 권력을 잡기까지(이씨조선 건국AD 1.398) 1.200 년을 기다렸다가 고려 황실의 한반도 피난을 기화로 한반도에 자신들의 조선을 세우고 이들을 시켜서 고구려, 신라, 백제가 중국이 아니고 한반도 내의 작은 나라라고 역사를 조작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농경으로 인구를 폭발시킨 주역인 선비 족 이씨들의 이러한 한국인들에 대한 원한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 8천 년 전 6천 년 간 계속된 마지막 간빙기의 홍수가 그치고 사람들이 낮은 곳으로 내려와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한 때 12 연방의 제사장들 중 일부는 계속 3한의 지도자가 되어 과거와 달리

벼농사를 인정하는 한웅의 제정 시대를 부활 시켰다. 이들은 5만 년 전 바이칼 창시자 효과 이후 서쪽으로 이동한 아리안이 브라만과 힌두교를 통해 한 것처럼 제사장 위주의 계급 사회를 만들었고 나중에 황하 만곡 부(희대戱台지역) 평야지역과 황하 주변도 삼한 관경(三韓觀境)에 포함시켰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기원 전 3천 년 농경을 통한 인구 폭발을 일으킨(황하 문명) 선비 족들은 자신들의 삶이 제사장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지은 농사를 통해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제사 체제에 반발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한웅(복희와 여와, 헌원)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인정하면서도 조선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렇게 갈라진 2한(삼조선) 중 마한+ 진한 사람들(샤머니즘을 숭상하는 사람들)과 1한(번한) 농경민족(중국 민족: 요, 순, 탕 왕, 걸 왕, 하, 은, 주, 7 웅, 한, 오호16국. 수, 당 나라 등)의 차이는 앞서 한웅 조선의 말미에 언급했듯이 다음과 같다.

가. 삼한 인들은 자연이 주면 먹고 안주면 안 먹는 스타일이고 농경 민족은 자연이 안 줘도 농사를 지어먹고 산다는 것이다.

나. 삼한은 자연적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고 농경 민족은 비만 오게 해 주면 된다는 식으로 하늘 님 또는 제비 등 농사와 관련 있는 토템을 섬겼다.

다. 이들이 각각 살게된 곳도 서로 다른데 여기서 소위 삼국과 중국

이 서로 갈라졌다. 막조선, 진조선, 번조선의 삼조선으로 이루어진 조선은 원래는 중국 대륙 전체가 삼한 관경(영토 개념이 아님)이었다가 농경 민족에게 쫓겨 점차 농사를 지를 필요가 없는 중국의 황해 연안과 한반도(주로 옛 마한지역)에 쫓겨와 터전을 잡게 되었고 진시왕 때 중국인들은 이들을 묘족(뫼족=산족=진한인= 신라인)이라고 불렀다.

이후 이들 농경민족은 엄청난 속도로 인구를 부풀려 군사력으로 영토를 넓히는 역사를 되풀이 해 왔다. 그들의 눈에는 과거 제사장이었던 조선은 눈에 가시였고 탁록 전쟁(기원 전 2.600 년경의 치우와 최초 농경민족 대표 헌원의 전쟁) 이후 3천 년 간 계속되었으나 실패하다가 그들의 동족인 이성계가 고려 황실의 한반도 피난을 기화로 자신들이 바로 조선이라는 뜻으로 이씨조선을 세우자마자 동족인 홍건적 두목과 짜고 과거 대륙 삼한(샤먼= 삼조선-삼국)의 역사를 조작하게 된 것이다. 이성계가 시작한 고려사, 조선사, 삼한사의 날조는 예종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세종 이도(李宸)가 가장 심했다. 그는 제위 기간 32년의 거의 전부를 이 일에 바치다가 말년에 과로로 시각 장애와 당뇨로 죽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인에게 삼국시대의 삼국은 통상 한반도 내의 삼국을 말하나 이씨 조선이 조작한 그 많은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만약 지금 대로 삼국이 반도 내에 있었다고 보게 되면 다음과 같은 역사상 오류가 생긴다. 즉,

1) 신라의 강역이 만주, 그리고 한반도를 아우르는 지역임이 설명되지 않고

2) 나아가 사천성 성도 출신인 고려의 왕건 태조가 만주의 궁예와 연합하여 중국 북부지역과 옛 신라의 강역을 포함하여 중국을 통일한 것도 설명되지 않으며

3) 청나라 태조 누루하치가 청 황실의 성을 애신각라(愛新覺羅)로 한 것과 자신의 고향이 지금 요녕성 신빈이라고 한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4) 이 뿐 아니다. 당과 신라가 백제와 마지막으로 결전을 한 사비성(산동 반도)을 비롯하여 고구려와 결전을 한 평양성(요동의 요양)의 위치가 현재 중국인 것도 설명되지 않으며

5) 가장 큰 문제는 후 삼국 시대에 신라와 백제가 싸운 황산을 비롯하여 조물성, 공산, 운주성이 모두 대륙백제와 대륙 신라의 국경인 상해 인근이고 고려와 신라가 싸운 지역인 고창도 상해 인근임이 설명되지 않는다.

6) 끝으로 견훤을 귀순으로 이끈 일리천이 산동 반도와 북경 사이임도 설명되지 않는다. 중국의 황해 연안 천진 북쪽이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지점이고 산동 반도가 백제 땅 웅진(熊鎭)이며 상해와 양자강이 대륙 백제와 대륙 신라의 경계지점이라는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한 샤먼 경계와 중국식 영토 개념이 다른 사실은 기원전 8천 년 홍수 이후 히말라야 동방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삼국, 즉 샤먼 국가들에 그 이유가 있다. 원래 삼국의 지경은 지금처럼 국력과 군사력, 언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홍수 이전 6만 년 동안 우리에게 형성된 샤머니즘에 그 뿌리가 있다. 당시 우리 민족(삼한 민족= 샤먼 민족)들은 농사를 짓는 것은 집단을 이루고 자연을 파괴하면서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므로 죄악 시 한데 기인된다. 그래서 6천 년 간 비가 와 해수면이 140-150 미터나 올라가고 중력이 커져서 수명이 줄어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성경에도 그렇게 쓰여 있다) 따라서 중국의 원래는 농경지역과 비 농경 지역으로 구분되어 전체 중국이 삼한이었으나 농경 지역이 넓어짐에 따라 점차 농사 없이 살 수 있는 해안으로 밀려났고 고구려, 신라, 백제라는 삼국의 지경은 기원전 57년 신라 건국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샤머니즘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오랜 터전인 것이다. 그래서 삼한 관경의 기간은 인종의 형성시기 만큼 길다.

홍수 이후 산에서 내려온 바이칼 호모사피엔스의 원류인 제사 엘리트들은 자연에서 최대한 식량을 얻을 수 있는 지역을 선택적으로 점거했는데 기원전 1만 4천년 경 부터 이동을 시작하여 4천 년 경 까지 요하에 이른 마한 문명인 용산 문명과 고비사막->타림(다리목)분지->청해성->신강성 등 을 거쳐 양자강을 따라 내려온 진한 문명인 장강 하구 문명이 그것이다. 용산 문명이 일어난 요하 지역의 마한은 한인시대부터 한 반도와 중국 동해안을 따라 지경을 넓혀 왔는데 목적은 장강 하구 문명과 연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횡해 연안이 삼한 지역이었음을 증거하는 역사적 사실

1) 한웅 시대에 14대 한웅인 치우와 헌원의 탁록 전투 시(기원 전 2.600년 경) 헌원의 근거지는 희대(유수: 황하 농경지역)이었고 치우의 근거지는 산동 반도였으므로 한웅 시대에 도 샤먼족(한국인, 조선인)의 근거지가 중국의 황해 연안이었다는 것이 입증된다.

2) 고조선 때 은 나라 왕이 조선의 영지를 침략해 격퇴했다는 기록이 단군 세기에 있는데 이때 조선의 영지는 중국의 의 해안지역으로 북경, 천진, 산동 반도 일대였다..

* BC 1.291 21세 단군 소태 때 은(무정) 조선 영지 침략 대패, 우현왕 고등 죽은 후 색불루가 우현왕이 됨. 서우여가 부여(북경, 천진, 산동반도 일대)에서 발호하자 단제가 그를 폐하고 북경에서 등극했는데 백의 숙제 는 이에 반발하여 더 남쪽 해변 고죽국에서 죽었다.(단군세기)

4) 농경집단인 중국에 의해 샤먼집단인 번 조선이 망하는 기록이 있으나 마한과 진한이 망하는 기록은 없다 설사 번조선이 망했더라도 후대의 전쟁 사로 미루어 볼 때 샤머니즘을 섬기는 유민들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백제나 후 백제로 저항을 계속했음을 볼 수 있다.

후에 번한은 중국(수나라)에 복속되고 고구려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으나 마한과 진한은 백제의 유민들과 함께 한반도에서 다시 만나 새로운 땅 한반도 신라(진한, 진조선)에서 만나 이 곳을 중심으로 알(자연의 유일신)과 혈통을 지킨 것이 신라의 삼국 통일이다.

* 번한 멸망 관련 단군 세기의 기록

- BC 341 46세 단군 보물 때 번왕 해인이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됨, 기후 자칭 번조선 왕으로 칭함

5) 따라서 삼국시대는 한반도 삼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근원은 삼한(한인), 한웅, 단군 시대 8천 년에 이르는 유구한 역사에 기반하고 있다. 이렇게 고구려와 신라는 비교적 오래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백제는 번조선의 경우 기원전 341년에 연 나라(주 황실 7웅 중 하나)에게 망했다가 온조가 기원전 18년에 위례성(북경 북쪽)에서

번조선 유민들을 모아 재 건국 해 약 500년 간 웅진(지금의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지속되다가 기원 후 500년 제 24대 동성왕 때 수나라 제후들의 압박으로 치리 권을 내어 주었으며 그의 아들 무령왕(무왕, 사마왕)은 한반도로 피난 와 죽었고 백제의 유민들만 그대로 남았으며 무왕의 아들 성왕 때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 국권을 회복한 적이 있다.

신라는 중국인의 본거지인 황하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만 있었디 때문에 중국의 영향을 덜 받았는데 그 모체인 진한은 진 조선, 남부여라는 이름으로 양자강 남쪽에 안전하게 유지되다가 백제 동성왕이 수나라에게 망하자 기원 후 501년 22대 지증왕(지대로왕) 때 가솔들을 이끌고 한반도(고구려)로 피난 왔다. 당시 기록이 삼국사기 고구려 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21대 문자왕 : 419년~519년 장수왕의 손자. 494년 물길 족(페르시아 해상 난민들로 보이나 신라 피난의 원인은 고조선의 대륙 주도권 상실이 원인으로 보임)에게 멸망한 남부여(신라)의 왕(22대 지증왕)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임

497년에 신라 우산성, 512년에 백제 가불성·원산성을 점령함 광개토왕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강성해져 대국으로 발전함

* 중국 백제의 멸망 및 유민의 피난 시 백제 왕조

- 24대 동성왕(東城, ?~501) 이름은 모대(牟大). 삼근왕의 동생. 493년에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휘하장군(태수) 7명에게 치리 권을 넘겨주고 자신은 약간의 군대와 제사권을 가짐. 실질적으로 나라를 당나라에게 복속시킨 왕. 이때부터 백제인의 백성들이 중국의 중심이 되었다.

- 백제 25대 무령왕(武寧, ?~523) 휘는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 아들. 쌍현성(산동 반도?)을 쌓아 외침에 대비함. 한반도로 피난 와서 죽음. 여 동생(일본 만엽지의 신공 왕후?)이 일본에서 백제 계 왕실의 조상이 됨)

* 백제 26대 성왕(聖, ?~554) 휘는 명농. 무령왕의 아들. 538년 산동 반도 사비성을 다시 탈환하고 국호를 부여라 함.(김부식 저 삼국사기 참조)

요약하면 백제는 기원 후 500년에 무령왕과 유민들이 황해를 건너서 삼한의 동족 땅인 한반도(당시 고구려 땅)로 피난 왔다가 그의 아들 성왕 때에 산동 반도로 돌아가 사비성을 탈환하였고 신라는 501년에 왕과 가솔들을 데리고 당시 고구려 땅이었던 한반도로 왔는데 삼국사기에는 494년 문자왕 때 남부여가 물길 족에게 쫓겨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대륙 신라, 대륙 백제가 남았다. 이러한 줄거리이어야만 박창범 교수의 컴퓨터 선형 계산법에 의한 삼국시대 계기일식의 지상 관측지점 측정 결과와 신라의 산국 통일 전쟁부터 고려의 후삼국 통일전쟁의 기록이 모두 들어맞는다.

나. 고구려(高句麗)

존속 기간: 기원전 37년 ~ 668년

수도: 졸본 (기원전 37년 ~ 3년), 국내성 (3년 ~ 427년) 평양성 (427년 ~ 668년)

* 국내성 평양성이라는 이름은 영어로 치면 수도를 나타내는 대명사로 보인다

공용어: 고구려어 (고대 한국어)

정부 형태: 기원전 37년 ~ 19년, 642년 ~ 668년 군주제

초대왕: 동명성왕

마지막 왕: 보장왕

국교: 삼신교(도교, 무속), 불교

영토

초기: 기원 전 6만년- 기원 전 5 세기까지 한인시대에는 삼한 중 마한지역으로 아시아 대륙의 북쪽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기원전 37년 ~ 668년까지는 백제, 신라와 함께 단군 조선의 삼 조선 중 하나로 원래 삼한의 영토가 줄어든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00여 년 동안 지배했던 국가이다. 장수왕 이후 정식 국호를 고려(高麗)로 변경했으나,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통칭되고 있다. 초기에는

단군 조선 당시 중국 동해안의 평야지대인 천진 지역을 포함했으나 후기에는 당나라에 밀려 요동까지 물러났다.

고구려 역사가 한국의 역사인 이유

1. 고구려라는 이름이 고씨의 구이(九夷)라는 뜻으로 중화 민족에게는 그들에게 포함되지 않는 북적(北狄)이라는 뜻임

2. 고구려는 단군 조선의 마한(馬韓)지역에서 발생하였음

3. 현재 한국인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북쪽 지방에서 온 몽골계통이 70%가 되고 중국과는 극히 일부만 일치되나는 결론이 나왔음(1992년 서울대 의대 이홍규 박사 "유전자로 풀어본 한국인의 뿌리" 논문 참조)

4. 고구려인들의 정서를 좌우하는 종교가 삼신교이고 그 다음 많이 차지하는 불교도 삼신교에서 유래되었음을 고려해 볼 때 고구려인들의 종교는 6만 년 전부터 중국의 종교인 유교나 천자 숭배와는 차이가 있다.

5. 고구려인들은 근본적으로 목축과 수렵, 채취를 존중하던 사람들로 집성농사를 통해 살아온 중국 민족과는 섞일 수 없는 핏줄을 타고났다.

6. 단군 조선 이후 중국(수, 당)의 주 적은 고구려 였고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망했고 당나라에 끝까지 저항한 나라도 고구려였으며, 신라는 반도를 얻기 위해 고구려 땅을 차지하는 대신 옛,번한과 진한(대륙 신라) 땅을 당나라에게 내어 주었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하는(동북공정) 이유

1. 고구려는 중국 한족인 고이의 후예이다.

2. 고구려 멸망 후 다수의 지배계층이 중국에 들어와 한족과 융합되었다.

3. 고구려는 중국 땅에 건국되었고 시종일관 중국 영역 내에서 존재했다

4. 고구려의 건국 지는 한 군현에 속하는 영역이었음

5.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속국)으로 중국황제에게 조공을 바쳤다.

6. 평양 천도 후 고구려는 현재 북한 영토지만 과거 중국의 영토 안에 있었으므로 중국사에 속한다.

7. 고구려는 중국이 한반도에 세운 해외 속국이다.

8. 고구려와 고려는 별개의 국가이다.

9. 고구려는 말갈족이 세운 당나라의 속국이었다.

10.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땅이었다.

고구려 약사

건국: 단군조선이 기원전 239년 47세 단군 고열가를 끝으로 망하자 원전 239년 고리국(북부여?, 가섭원 부여?) 사람이며 고주몽의 선조.인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중국의 한나라(기원전 208년 ~ 기원후 8년)가 망하고 전한과 후한의 사이에 왕망(흉노?)의 신나라(기원 후 8년 ~ 23년)와 후한(25년~220년) 나타나는 혼란기에 농경국가 한나라의 침략에 대한 반동으로 마한 지역의 부여국에서 나타난 나라이며 백제도 이 고구려에서 나왔다. 영토는 북쪽 몽골지역에서 만주에 이르는 땅이었고 그 위치와 규모는 박창범교수의 고구려 시대 일식 현상 지상 관측 지점이 내 몽고에서 만주 하르빈에 이르는 지역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이름과 같이 고씨가 만든 구리족의 나라로 전통적으로 샤머니즘을 숭상하면서 산에 살았고 넓은 지역이어서 인구밀도가 희박하였다. 예 하 부족들은 식량이 부족하여 자주 중국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으므로 중국에서는 이들을 흉노라고 불렀다. 고구려는 주몽의 호인 다물(多勿)에서 불 수 있듯이 다 물린다, 즉, 옛 마한의 영토를 모두 회복한다라는 국시를 가지고 있었으나 희박한 인구 밀도로 인해 한나라를 비롯하여 연나라, 수나라, 당나라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았으나 제사권을 가진 집단인데다 인구가 부족하였으므로 군사력 확보를 위해 인구가 많은 지역으로 여러 번 수도를 옮겼다.

역대 왕

1대 동명성왕 : 기원전37년~기원전18년

성은 고, 휘는 추모. 해모수의 후손 대소태자의 모해를 피하여 압록강 연안인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라 함

2대 유리왕 : 기원전 19년~18년

기원전 19년에 어머니 예씨로 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졸본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 태자로 인정받고 고구려 제2대 왕이 됨. 기원전 17년에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황조가》를 지음 3년에는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음

* 동생 온조는 기원전 18년 하남 위례성으로 내려가 백제를 세움으로써 옛 번한

(기원전 341년 46세 단군 보물 때 번왕 해인이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 된 후)을 300년 만에 회복시킴

3대 무신왕 : 4년~44년

유리왕의 셋째 아들. 14년에 태자로 책봉됨, 22년에 동부여를 공격하여 고구려에 병합시킴, 그 해 개마국을 쳐서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확대함, 32년에는 왕자 호동을 시켜 낙랑군을 정벌함

4대 민중왕 : 44년~48년, 대무신왕의 아우, 대무신왕이 죽자 태자 해우가 어리므로 대신 즉위함, 유언에 따라 민중원 석굴에 장사를 지냄

5대 모본왕 : 48년~53년, 대무신왕의 아들. 49년에 한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요동태수 채동의 제의로 화친을 맺음 ,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음, 결국 신하 두로에게 피살됨

6대 태조왕 : 47년~165년, 유리왕의 손자이다. 56년에 동옥저를 정벌, 동으로는 창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게 함, 72년에는 부족장인 달고를 파견하여 조나를 정벌함, 121년 한나라의 요수현을 공격하여 서북면의 영토를 넓힘, 중앙집권적 형태로 체제를 정비함, 165년, 119세로 죽어 한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왕이 됨

7대 차대왕 : 73년~165년, 태조왕의 동생. 121년 유주자사 풍환, 현

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고구려를 침범하자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를 대파함, 147년,

위 계승을 반대하던 우보 고복장을 죽이고, 148년 태조왕의 태자 막근마저 죽인 후 왕권을 확립하였으나, 횡포와 학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듣다가, 결국 명림답부에게 시해 당함

8대 신대왕 : 165년~179년, 태조왕의 계제이며 어머니는 부여 사람. 둘째형인 차대왕이 포악 무도하여 숨어살던 중 차대왕이 명림답부에게 살해되자 좌보, 어지류 등의 추대로 77세에 즉위함. 166년 좌·우보의 직제를 국상으로 고치고 명림답부를 이에 임명함. 169년 한나라의 태수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오자 스스로 항복함. 170년 경림의 후임인 공손 탁을 도와 부산의 도적을 토벌함.

9대 고국천왕 : 179년~197년 신대왕의 둘째 아들.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의 침입을 막고 대승함. 191년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현정을 베품. 194년 진대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빈곤을 덜어줌 왕위계승 방법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꿈.

10대 산상왕: 197년~227년 신대왕의 아들이며, 고국천왕의 동생. 208년에 서울을 환도(중국 퉁거우 지방)로 옮김. 217년에 한나라 평주의 하요가 백성 1,0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으므로 왕은 그들을 받아들여 지금의 중국 훈춘 지방인 책성에서 살도록 함

11대 동천왕 : 227년~248년 산상왕의 아들. 236년 오나라 손권이 화친을 청해 왔으나 사신을 죽여 위나라에 보냄. 242년에 중국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서안평을 공격하다가 관구검의 반격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고, 남옥저로 피란함. 이때 용장 밀우와 유유의 계책으로 적을 격퇴시켰으나, 환도성이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247년에 수도를 동황성으로 옮김. 248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음

12대 중천왕 : 248년~270년 동천왕의 맏아들. 동생 예물과 사구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함. 259년 위나라의 장수 위지계의 침입군을 양맥곡에서 격퇴함

13대 서천왕 : 270년~292년 중천왕의 둘째 아들. 280년 숙신이 내침하자 동생

때 민가에 숨어 화를 면함 국토 확장에 진력하여,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 함달고를 보내어 이를 격퇴함 286년 반란을 도모한 동생 일우·소발 등을 주살함

14대 봉상왕 : 292년~300년 서천왕의 태자. 백성들의 추앙을 받고 있던 숙부 안국군을 살해함. 이듬해 동생 돌고마저 사사함. 명신 창조리를 국상에 등용하여 연나라 모용의 침입을 격퇴함. 300년 폐위되고, 후환이 두려워서 자결함

15대 미천왕 : 300년~331년 서천왕의 손자. 큰아버지 봉상왕이 아

버지를 죽일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함 313년 낙랑군을 공략, 낙랑군을 멸망시킴 314년 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음

16대 고국원왕 : 331년~337년 이름은 사유다 국강상왕이라고도 함 314년 태자의 책봉됨. 331년 아버지 미천왕이 죽자 왕위에 오름

즉위하자 평양성을 증축 342년 환도성에서 수도를 옳긴 뒤 수차례 중국 연 나라로부터 침입을 받음 그리고 선비 족 모용괴가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오자 모용괴가 고국원 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묘를 팜.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과 왕모 주씨 왕비가 납치 당함 343년 동생을 연나라에 파견 미천왕과 왕비를 찾아옴 369년 백제의 치양을 쳤지만 패하고 371년 평양성에서 싸우다 죽음 17대 소수림왕 : 337년~384년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는 해미류왕

(解味留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구부(丘夫)이다. 제16대 고국원왕의 아들로 355년(고국원왕 25)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71년 10월에 부왕이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평양 大城山城)까지 진격해온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 372년(소수림왕 2)에는 전진(前秦)에서 외교사절과 함께 온 승려 순도(順道)를, 374년에는 아도(阿道)를 각각 맞아들였고,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省門寺의 잘못)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이들을 거주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는 한편, 372년에는 유교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유교이념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18대 고국양왕 : 384년~391년

이름은 이련(伊連), 이속(伊速) 또는 어지지(於只支)이며,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형인 소수림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즉위하였다. 소수림왕 때의 여러 제도 정비를 통하여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쪽으로는 385년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요동군과 제3현도 군을 점령하는 등, 《자치통감》 권106에 실린 호삼성(胡三省)의 주에 의하면, 385년 이후 “후연은 고구려를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고 할 정도로 후연에 대하여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때 확보한 요동·현도의 두 군은 386년 다시 후연에 빼앗겼다. 또, 남쪽으로는 386년 백제를 공격하였고, 389년과 390년 백제의 침공을 받는 등 백제와 공방전을 되풀이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북으로는 후연, 남으로는 백제와 대립하면서 국력을 신장하였다.

19대 광개토대왕 : 391년~413년 고국양왕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고상했는데,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의 사후 즉위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비록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의 전하는 바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시호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20대 장수왕 : 413년~491년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 408년(광개토왕 18)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중국의 분열을 이용한 대중국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북 중국은 여러 이민족의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 북위(北魏)에 의하여 통일되었으며, 남 중국에는 한족에 의한 동진(東晉, 317∼420)·송(宋, 420∼479)·남제(南齊, 479∼502)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즉위하던 해에 동 진에 사절을 파견하여 70년 만에 남 중국 국가와의 교섭을 재개한 이래, 동진을 이은 송·남제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것은 갈은 고조선 종족인 북위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북

위가 북중국의 강자로 부상됨에 따라 435년(장수왕 23)에는 북위에 사절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436년 북위의 군대에 쫓긴 북연(北燕)의 왕 풍홍(馮弘)의 고구려 망명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북위의 풍홍소환요청을 거절한다든지, 466년 북위의 혼인요청을 거절하는 등,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시 북위와의 긴장이 고조된 적도 있었고, 440년부터 461까지 20년간 사절의 교환이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북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백제가 북위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 472년 이후부터는 매년 2차례 이상 사절을 파견하는 등, 북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는 북아시아 유목민족인 유연(柔燕)과도 연결을 가져, 479년에는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일대에 거주하던 지두우족(地豆于族)의 분할 점령을 꾀하고 거란족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21대 문자왕 : 419년~519년 장수왕의 손자. 494년 물길족(페르시아, 삭씨)에게 멸망한 남부여(신라)의 왕(22대 지증왕)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임 497년에 신라 우산성, 512년에 백제 가불성·원산성을 점령함 광개토왕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강성해져 대국화

* 智獞, A.D.500) : 김, 마립간, 휘(諱)는 지대로(智大路). 내물 3대손 갈문왕 습보(習拱)의 아들.

22대 안장왕 : 519년~531년 이름은 흥안. 치세는 12년간 23대 이름은 보영. 치세는 14년간

24대 양원왕 : 545년~559년 안원왕의 맏아들. 동위·북제 등에 조공하여 친선을 도모함 547년 백암성·신성 등을 중수함 551년돌궐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신라·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잃음

25대 평원왕 : 559년~590년 양원왕의 태자 559년 즉위한 후 중국의 진·수·북제·후주 등 여러 나라와 수교함 일찍이 장수왕이 평양의 북동쪽 대성산성으로 국도를 옮긴 뒤 양원왕이 장안성(평양)에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시작한 것을 586년 완성시켜 평양성(요동 요양)으로 천도함

26대 영양왕 : 590년~618년 평원왕의 태자. 수나라와 화친을 꾀하다가 598년 말갈 군사 1만을 이끌고 요서를 선공, 전략적 요충 확보에 나섬 이에 수나라 문제가 30만 대군으로 침공하였으나 이를 격퇴함 600년 태학 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유기》 100권을 재 편수함 608년 신라의 변경을 습격, 우명산성을 함락함 612년 수나라 양제가 문제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113만 수륙군으로 쳐들어오자, 명장 을지문덕을 시켜 살수에서 적을 섬멸함

27대 영류왕 : 618년~642년 영양왕의 이복동생.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수나라 침공 때 포로가 된 이들을 찾아옴 631년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의 축조를 시작, 연개소문에게 역사의 감독을 맡겼으나 그의 반역으로 살해됨

28대 보장왕 : 642년~668년 고구려의 마지막 왕.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의 추대로 왕위에 오름 645년 당나라 태종이 침입하

였으나 연개소문이 독전, 격퇴함 661년 당나라 소정방이 신라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지만 다음해 연개소문이 다시 격퇴함 668년 나·당연합군의 침입으로 평양성이 함락되고 당나라로 압송됨

고구려 멸망 이유

1. 수나라의 침략과 당나라의 침략으로 국력이 많이 약해짐

2. 연개소문이 죽고 난 후 권력 쟁탈전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어

3. 나당(신라와 당나라)연합군의 계속된 침략

4. 장기적으로 내해를 통한 해상 병참선의 상실

나. 백제 百濟

이름의 기원: 당시 인구가 가장 많았던 황하 농경 지역에 위치한 삼한의 나라중 하나인 번한(繁韓) 땅에 고구려계 온조에 의해 세워진 나라. 백가지 성을 가진 백성(百姓)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백제(百濟)라고 불렀다. 존속 기간: 기원전 18년 ~ 660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현재 중국 하남성 정주 인근)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현재 북경 동쪽) 웅진 (476년 ~ 538년 산동반도 내륙 지역) 사비성 (538년 ~ 660년 산동 반도 해안)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76만호

* 당시 1가구 인원이 16명이었으므로 1.215만 명으로 당시 전체 중국 인구의 1/3을 차지하였고 수나라에 복속된 후 이들이 현재 중국 인구의 기틀이 되었다.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사항

백제는 제 24대 동성왕이 기원 후 500년 과거 조선의 노예였던 선비 족이 하북을 통일하자 그들을 두려워 한 나머지 제사권을 지역 내 7명의 태수에게 이양한 후 죽고 그의 아들 무령왕이 한반도 이산에 피난 와 죽은 것 외에 항상 중국 서해안의 산동 반도와 북경 일대를 지경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무령왕 외의 모든 왕의 묘는 중국에 있고 의자왕과 그의 아들 풍의 묘도 북경 북쪽 북망산에 있다. 그래서 현재 한반도에 있는 호남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의 호남지역에서 수시로 피난 온 사람들로 뺏으면 자기 것이 된다는 중국인들의 성품과 같다.

백제 역대 왕 계보

1대 온조왕(溫祚, ?~28)(BC58년 ~BC19년)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혹은 둘째)아들. 중국 하남성 정주의 위례성에 나라를 정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고 함.

BC 5년에 서울을 한산(지금의 북경 동쪽)으로 옮김. AD8년 황하 인근 마한 땅을 병합함. 수도를 옮긴 이유는 황하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임

2대 다루왕(多婁, ?~77)

온조왕 아들. 페르시아 계 해양 세력인 말갈족을 격퇴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 생활을 안정 시켰음. 37년 후한의 낙랑군을 멸

망시킴.

3대 기루왕(己婁, ?~128)

다루왕의 맏아들.4대 개루왕(蓋婁, ?~166)

기루왕의 아들. 132년에 북한상성을 쌓음

5대 초고왕(肖古, ?~214)

개루왕의 아들. 중국 동해안 남쪽 해양 세력인 신라를 여러 번 침공하고, 210년에 적현성, 사도성을 축조함.

6대 구수왕(仇首, ?~234)

초고왕의 맏아들. 가뭄과 홍수를 대비하여 둑을 쌓고 농사를 장려

함. 귀수왕이라고 도 함.

7대 사반왕(沙泮)

구수왕의 아들.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바로 폐위됨. 사비왕(沙

沸)

8대 고이왕(古爾, ?~286)

초고왕 동생. 관제를 제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여 국가의 기초를 확립함.

9대 책계왕(責稽, ?~298)

고이왕 아들.

10대 분서왕(汾西, ?)

책계왕 아들. 낙랑군의 서현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낙랑군의 자객에게 살해당함.

11대 비류왕(比流, ?~344)

구수왕의 둘째 아들. 민간의 형편을 잘 알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함.12대 설왕( ,?~346)

분서왕의 맏아들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13대 근초고왕(近肖古, ?~375

비류왕의 아들. 369년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함. 황하 고구려 평양성(요동 지역)을 점령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킴. 을 일본에 파견하여 한문을 전파하고, 박사 고흥 에게 백제의 국사 '서기(書

記)'를 쓰게함.

14대 근구수왕(近仇首, ?~384)

근초고왕의 큰아들.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보급시키는 데 공이많음.

15대 침류왕(枕流, ?~385) 근구수왕의 아들. 불교(揤法)을 시행하고, 한산에 절을 창건 하였음.

16대 진사왕(辰斯, ?~392) 침류왕의 동생. 광개토대왕에게 한강 이북을 빼앗기자 이를 찾기 위해서 출정하다가 병사함.

17대 아신왕(阿莘, ?~405) 침류왕의 아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패함. 일본과 화친하여 태자를 볼모로 보냄. 아방왕, 아화왕.

18대 전지왕(琠支, ?~420) 아신왕의 아들.

19대 구이신왕(久爾辛, ?~427) 전지왕의 맏아들

20대 비유왕(毘有, ?) 구이신왕의 아들. 송나라와 왕래하고 신라와 화친을 하는 등 외교를 통한 친선에 힘을 씀.

21대 개로왕(蓋鹵, ?~475) 휘는 경사(慶司). 비유왕의 맏아들. 고구려 장수왕의 습격을 받아 피살됨.

22대 문주왕(文周, ?~477) 개로왕의 아들. 서울을 웅진(산동 반도)

으로 옮기고 국방에 힘씀. 병관 좌평 해구(解仇)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살해됨.

23대 삼근왕(三斤, ?) 문주왕의 맏아들. 13세로 즉위 반란을 일으킨 해구를 진로(眞老)로 하여금 토벌하게 함.

24대 동성왕(東城, ?~501) 이름은 모대(牟大). 삼근왕의 동생. 493년에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 이 때 고구려는 마한 지역 몽고에서 나온 마한의 일개 부족인 선비족으로 나중에 북위가 되었다.

선비족인 북위가 하북지방을 평정하고 효문제(孝文帝)가 즉위 국도를 뤄양[洛陽]으로 옮기자(494년) 여기에 위협을 느낀 동성왕이 선비족이 동족임을 빌미로 휘하장군(태수) 7명에게 산동 반도 등 영토의 치리권을 넘겨줌. 실질적으로 나라를 북위에게 복속시킴. 이때부터 백제인의 백성들이 중국의 중심이 되었고 그 아들 무령왕이 일부 권솔들을 데리고 한반도로 피난. 대륙 백제 유민들이 한반도로 오기 시작 한 시기. 이때부터 북위의 선비족이 중국 황하인의 중심이 되고 그들의 주성인 이씨(李氏)가 번성하게 되었다.

25대 무령왕(武寧, ?~523)

휘는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 아들. 쌍현성(산동 반도?)을 쌓아 외침에 대비함. 나중에 한반도로 피난 와서 죽음. 여 동생(일본 만엽지의 신공 왕후?)이 일본에서 백제 계 왕실의 조상이 됨.

26대 성왕

(聖,?~554)휘는 명농. 무령왕의 아들. 황해를 건너가 산동 반도를 점령하고 538년 산동반도에 있는 사비성을 다시 탈환하고 국호를 부여라 함.

554년 남측의 대륙 신라를 공격, 대륙 신라의 유민들과 싸우다가 관상성(상해 인근)에서 전사함. 일명 성명왕.

27대 위덕왕(威德, ?~598) 휘는 창(昌). 성왕의 아들.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당과 외교관 계를 수립하고, 신라를 자주 침

28대 혜왕(惠, ?~599) 휘는 계(季). 위덕왕의 아들로 즉위하였다가 이듬해에 죽음.

29대 법왕(法, ?) 휘는 선(宣), 효순(孝順). 혜공왕의 아들. 불교를 신봉하여 살생을 금하고, 왕흥사(중국)의 창건 을 착수함.

30대 무왕(武, ?~641) 휘는 장(璋). 수,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일본에 중 관륵(觀勒)을 보내어 천문, 지리, 역본(曆本) 등의 서적

과 불교를 전파하였음.

31대 의자왕(義慈, ?~660) 백제의 마지막 왕. 무왕의 맏아들.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영토를 얻었으나 만년에는 사치와 방탕에 흘러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당나라 수도 북경에 압송되었다가 병사함. 아들 풍과 함께 북경의 북쪽 북망산 묘지에 묻힘.

백제 역사 개요

백제(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는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의 하나이다. 부여(扶余:뿌리라는 의미)라고도 한다. 온조왕을 시조로 하여 기원전 18년 중국 하남성 위례성(지금의 하남성 정주 인근)에 도읍을 정해 건국되었다. 삼국지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지만 그것은 중국인들의 주장이고 백제는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을 가진 가장 번성한 번한을 의미하고 번한 또는 번조선 시절에는 황하와 양자강 사이의 대륙 중앙 전 지역을 차지한 나라였다가 점차 땅을 뺏겨 중국 동해안 쪽으로 영토가 좁아진 번조선 지역에서 태동한 샤먼 민족의 나라이다. 가장 인구가 많아 번성한 나라여서 번한이라고 했고 또 백가지 성을 구제한다고 해서 백제라고 불렀다. 그래서 가장 일찍 또 오랜 기간 중국 농경민족의 침략으로 고난을 당한 지역이며 1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 온조왕 때부터 근초고왕 때까지 중국의 하남성 인근 내륙 지역을 장악하고 북쪽으로의 진출,

한성을 수도로 하였으며 고구려와 대립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초부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아신왕이 직접 항복을 하기도 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등 수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475년에는 황하 유역을 상실하고 산동 반도의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기도 하였다.

이후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맞섰으며, 성왕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하여 황하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황하 유역을 다시 상실하였으며, 안휘성 합비현(合肥縣) 東 129리 관산성에서의 신라와의 국경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충북 옥천의 관산성은 둘레가 400미터로 12만 이상 백제와 신라군대가 격전을 벌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이조 세종 때 고려사 조작을 하면서 이에 맞추려고 개수한 것으로 보임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산동 반도 내에 위치했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중국의 핵심부와 일본, 남방 지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초기 백제 영토(하남성 포함)






융성기 백제(근초고 왕)영토(한반도일부, 위와 경계)










말기 백제 지도(산동반도 중심)










대륙 백제 관련 중국의 기록

「송서」…백제국은 본디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리에 있었으며 그 뒤에 고려는 요동을 공략하여 갖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갖게 되었다.

「북사」…백제-거강좌우

「양서」…백제는 본래 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으나 진(晉)나라 때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하여 갖자 백제 역시 요서군과 진평군의 땅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남사」…신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 여리에 있다.

「위서」…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1천리 떨어져 있으며 소해

(발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백성들은 토착생활을 하며, 땅은 낮고 습기가 많기에 거의 모두 산에 기거한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책계왕13년(298)」…한(漢)나라가 맥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침략하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살해되었다. 백제는 서진(西晉)시대에 고이왕이 대륙백제를 설치하여 근초고왕~근구수 왕 대와 동성왕~무령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루었다 하지만 대륙백제는 성왕 대에 이르러 붕괴된다. 「남제서」…위나라 오랑캐가 기병 수십만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였는데, 그 경계 안으로 들어가니 모대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 군대를 통솔시켜, 오랑캐의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물리쳤다.

구당서 백제전에 "백제의 서쪽 영토는 월주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접하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일본)에 이른다" 여기서 백제의 서쪽 영토가 월주라고 기록되었는데 월주는 현 중국

양쯔강 하구이고 북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여기서 바다는 현 발해만을 말합니다. 이 말은 백제가 중국대륙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북으로 바다를 건넌다 이것은 백제가 중국 산동성에 영토를 가지고 있으면 가능한 얘기이다(한반도 백제는 불가능) "월왕 구천(전국시대 월 나라의 왕, 월나라는 양쯔강 이남을 지 배했던 대국)의 고도(옛 수도)를 둘러싼 수천리가 다 백제의 땅이었다" 만주 원류고에는 "금주, 의주, 애주, 애훈(중국 북경인근 지방) 등지가 다 백제이다" 백제의 요서 진출은 8대 고이왕이 낙랑의 서현(금주지방)을 함락하면서 개시되었다가 10대 분서왕 때 영토를 확장했다. 분서왕이 지금의 중국 천진 지방을 점령하자 서진은 국력이 급속히 약해져서 결국 유연이 세운 한에 멸망하게 된다. 한편 서진 멸망 후 서진의 왕족이 양쯔강 이남에 동진을 건국한다. 중국 역사책을 보면 동진이 호(胡)에게 끊임없는 시달림을 겪다가 양자강 하구의 기름진 옥토를 빼앗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학자는 이 호를 흉노라 기록했지만 사실 이 호는 동호 아니 동이족 정확히 말하면 백제였다. 중국 역사책 사기를 보면 이 호와 흉노를 구분하였다. 사기를 보면 호를 고조선이라고 기록한 예가 많은데 이 기록을 참고하면 호가 백제임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백제는 13대 근초고천황이 즉위하면서 영토를 급속히 확장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제(소열제)를 전사시키고 왜를 신민으로 삼았으며 중국의 동진을 복속시켰다. 그러다가 고구려 19대 황제 광개토 대왕에게 굴욕을 겪다가 24대 동성천황이 즉위하면서 백제의 힘은 급속도로 강력해졌다. 백제 동성천황 때 당시 북중국의 강자 북위가 10만 기병을 이끌고(10만 기병은 40만 보병과 맞먹는 힘) 백제를 쳤으나 백제는 평야지방에서 북위의 10만 대군을 몰살시켰다. 남제서를 보면 백제의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이 네 명의 장군이 북위의 침략을 격퇴시켰으므로 백제의 요청에 따라 이들을 왕으로 임명한다고 쓰여 있다. *백제사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고 문정창 선생에 의하면 백제는 바다를 지배하고 대륙을 지배한 거대강국이었습니다. 그 분에 의하면 백제는 중국의 남조국가를 식민지로 두었다고 한다. 남조 중 하나인 양 나라를 세운 도이 숙연이 백제 인이었고 백제가 그가 나라를 세울 때 지원을 했다고 한다. 또한 양 나라의 문화인 벽돌문화가 양이 아닌 백제(번조선, 그 이전은 번한)의 문화이다. 백제의 최대융성 시기 영토는 중국 하북성,산동성,강소성,안휘성,호남성,호북성,절강성,사천성,인도차이나(동남아 일대) 일대를 지배했다. 즉 중국의 동부와 남부의 일부, 서남부 일부지방과 동남아 지방이라고 보면 된다. 만약 백제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우리는 일본을 포함하여 해양을 제패한 거대강국(미국)이 되었을 것이다.

중국대륙의 옥토 전체를 백제가 7개 군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이에 대해서 중국사가 이렇게 적고 있다. "동 성왕의 국서"인데 "중국

25사의"의 "남제서 백제전"을 보면 (동성왕 재위기간 31년 = 남제 존속기간 31년(왕이 5번 바辑) 동성왕(東城王)은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인물인데 묘하게도 "남제가" 건국하는 해에 동성왕이 임금이 되셨고 남제가 멸망하는 해에 동성왕도 승하(昇遐)했다. 그러니까 동성왕 1대하고 남제라는 나라의 길이가 같다. 남제는 31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백제 동성왕 역시 31년 동안 재위했다. 그런데 이 31년 동안에 남제의 왕은 다섯 사람이나 등락을 한다. 그러니까 한 임금의 평균 재위기간이 6년 되는 셈이다. 백제 동성왕은 남제의 소란왕에게 국서(國書)를 보내여 중국 동해안을 7개 구역으로 나누어 7명의 백제장군이 통치하게 하였다. 그런데 백제의 동성왕은 남제(南薺)의 소란(簫蘭)이라는 왕한테 국서를 보냈다. "레트 어브 스테이트"(Latter of state) "국서(國書)" 말이다. 이 국서의 내용이 "남제서" 백제전 속에 꽉 들어찼다. 현대인이 이 "남제서"의 백제전을 보고서 놀라지 않는다면 우리 한국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동성왕은 중국의 산동 반도에 남쪽으로 상해까지 중국의 북경에서 동해안을 "7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백제의 장군 7명에게 그 통치권을 위임한다는 글을 전기(前記)의 남제 "소란"왕에게 국서로 보냈다.

중국은 동해안에 평야지대가 밀집되어 있다. "북경에서 상해까지"는 지도만 봐도 파란 색깔로 칠해진 평야지대이다. 중국 역대왕조는 황무지 고원지대 섬서성에 도읍하고 동쪽의 옥토 "동이의 땅"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이 섬서성(陝西省)에

- 주(周)나라 은(殷)나라 때의 장안(長安), 호경(鎬京)

- 진(秦)나라때의 함양(咸陽)

- 심지어 당(唐)나라때 서안(西安)도 모두 이 곳에 있다.

지금의 지도에도 호경, 장안, 서안, 함양은 모두 섬서성에 표시되어 있다. 이 섬서성은 흉악한 산골짜기이다. 여기에 역대 중국의 수도가 있었다. 이런 산골짜기에 사는 중국 사람들이 그 동쪽의 살기 좋은 평야지대에 살고 있는 우리 "동이족"을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선망(羨望)의 눈으로 보았겠는가? 그런데 "북경에서 상해까지" 중국의 실질적인 가주지역(可住區域 : 사람이 살수 있는 대륙) 그 전부를 7개로 나누어서 백제장군 일곱 사람에게 통치권을 맡기는 글을 남제의 소란이라고 하는 왕한테 보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남제는 백제와 우호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말하자면 협조공문이라고 할까요. 그런 친서를 보냈다.

그런데 중국사필은 예(法)의 그 오만불손(傲慢不遜)한 사필로서 이 남제서에 손질을 했다."대륙백제, 7태수 관할지역 및 8대 성씨는 대륙" 또 중국사람들이 사서에 가필을 하였는데 가령 동성왕이 목간나(木干那), 찬수류(贊首流)... 등 7장군을 태수로 임명했는데 그 국

서의 서두에 동성왕이 "신(臣)......가임(匘任) 목간나......위광위장군 운운(爲廣威將軍 云云)" 이라 하고 끝머리에는 "복원(伏願)......청제 운운(聽除 云云)"으로 기록한 것처럼 조작했다. 즉, 동성왕이 31년 간 겨우 존속한 남제의 왕한테 "신칭(臣睨)"하고 "신자석수봉운운(臣自昔受封云云)"했을 리가 있습니까 ? (신이 옛날부터 封을 받자옵고....

운운) 또 "臣이 목간나를 임시로 임명 하였사오니.....원컨대 제수(除授)하여 주옵소서......" 라고 했을 리가 있다. 정말이지 이는 "갓뎀 !"이요 "네버 헤픈"의 헛소리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필만 빼고보면 이것은 백제의 뚜렷한 영광이다. 중국의 동해안을 "원 사이드"하게 지배했다는 말씀이다. 또 백제 7장군의 성씨만 훑어봐도 사학을 아는 사람은 깜짝 놀랄 일이 있다. 왜 그런고 하니 백제에는 본래 8대 성씨가 있는데 중국 25사와 우리 삼국사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백제유 대성팔씨 사씨 해씨 진씨 목씨 국씨 연씨 묘씨(혹 묘씨) 협씨" "百濟有 大性八氏 沙氏 解氏 眞氏 木氏 國氏 燕氏  씨(或 苗氏) 協氏"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백제 8대성씨가 현재 남북한을 통틀어 단 한 가구도 남지 않았는데 남제서 백제전의 7장군 성씨들은 대부분 중국의 유서 깊은 8대 성씨들이라는 사실이다. 동성왕은 그 장군들에게 중국의 동해안을 지배하는 통치권을 위임하는 글을 적었어요. 아무개 장군은 이러저러한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청하 태수(산동성)로 임명한다는 등의 기록을 남겼다. 때문에 그 당시 북조가

위나라인데 "위나라의 군대를 무찔러서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 (강시단야 屍丹野)) 라고 적힌 글을 보면 정말 피가 끓는다. 백제 장군들이 임명된 지명들만 튐어 봐도 이는 순수한 중국대륙의 지명들이지 한국의 동국여지승람 등 지리서나 사서에 나오지 않는 이름들이다.(조선, 낙랑, 대방 만을 제외하면) 즉, 광양태수, 광릉태수, 청하태수, 성양태수, 낙랑태수(북평태수), 대방태수(북평태

수), 조선태수(역사 북경지방) 등이다.

참고) <조선성재금영평부(북경) 경내 (대명통일지)> <朝鮮城在今永平府(北京) 境內 (大明一統志)>

결론: 백제 동성왕이 북경 일대를 휘하 장군들에게 나누어주고 죽던 해(501년)와 신라가 반도로 피난 온 시기(500년)가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대륙의 조선 3국은 중국 황해 연안 지역 땅을 두고 서로 싸우다가 고구려의 평양성(지금 북경)은 나.당 연합군에게 망하고 백제는 농경 집단에게 샤머니즘이 통하지 안 차 501년 동성왕이 휘하 태수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반도로 피난을 오고 이어 501년 신라의 개로왕이 가솔을 이끌고 반도로 도망을 온 것이 대륙 삼국의 역사이다. 그래서 중국의 핵심부인 북경 일대가 백제이고 백제의 백성들은 중국인이 되었다. 요약하면 백제 인들이 자연선인 샤머니즘을 버리고 고조선을 배반한 것이 지금의 한중관계이다.

다. 신라

존속 기간: 기원전 57년 ~ 935년(992년) 기원전 57년- 기원 후 500년까지는 중국의 서 신라 시대.

기원 후 500년 지증왕부터 - 935년 경순왕까지는 한반도

수도: 서 신라: 금성(김씨의 성, 지금의 상해 인근))

동 신라: 경주

공용어: 신라어

정부 형태: 군주제

초대 군주: 박혁거세

최후 군주: 경순왕

신라 역대왕

1대 혁거세(赫居世) (B.C.57) : 성씨 박(朴), 이름 혁거세 또는 거서간(居西干 혹은 거세간)

홍수 이후 기원전 만 4천 년 경부터 바이칼 일대의 삼 조선(삼한)인 막조선(莫朝鮮), 진조선(眞朝鮮), 번조선(繁朝鮮) 중 고비 사막 타림분지 신강성 청해성 운남성을 통해 언어를 전파할 목적으로 산맥을 따라 따뜻한 곳으로 남하한 진 조선의 제사장 집단의 대표

벼농사를 시작한 시대부터 벼(木)를 위해 점을 치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 박(朴)을 성씨로 한데 기인

2대 남해(南解, A.D.5) : 박, 차차웅

3대 유리(儒理, A.D.24) : 박, 이사금

4대 탈해(脫解, A.D.57) : 석, 이사금, 토해(吐解). 최초의 페르아(또는 인도 계: 속칭 물길족=말갈족)계 왕으로 보임

5대 파사(婆娑, A.D.80) : 박, 이사금, 유리의 둘째 아들.

6대 지마(祇摩, A.D.112) : 박, 이사금, 기미(祇味).

7대 일성(逸聖 ?- A.D.134) : 박, 이사금, 유리의 아들 혹은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

8대 아달라(阿達羅, ?-A.D.154) : 박, 이사금.

페르시아 또는 인도 항해로를 따라 들어온 물길족에게 쫓겨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구려사 문자왕 편)일부는 한반도(가야)또는 일본으로 가고 아달랴 왕은 산맥을 따라 온 곳으로 되돌아 가 히말

라야산맥을 넘어 게르만 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훈족(고대 삼한 인)의 두목 앗틸라의 상징이 된 것으로 판단

* 아달랴왕과 앗틸라와의 연관성 판단의 근거

1) 아달랴라는 이름과 앗틸라라는 이름이 유사하다

2) 신라인이 훈(원래는 한)족으로 중국에서 흉노라고 불렀고 서양에서는 훈족이라고 불렀다..

3) 신라 아달랴 왕(AD 154)의 후대에 아틸라라는 이름의 훈족의 마지막 왕이 기록에 나타난 점

4) 신라인들이 한반도에 가서도 화랑도를 만든 것처럼 수천-수만 년 간 산에서 살아온 진한 인들에게 양자강이나 히말라야 산은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다. 아달랴 왕도 마찬가지 경우다. 내륙에서는 수나라의 위협이 해안으로는 페르시아의 위협이 있는 해양국가의 왕조가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다.

9대 벌휴(伐休, A.D.184) : 석, 이사금, 탈해의 2대손으로 아버지는 각간(角干) 구추(仇鄒)이다.

10대 내해(奈解, A.D.196) : 석, 이사금, 벌휴(伐休)의 손자.

11대 조분(助賁, A.D.230) : 석, 이사금, 제귀(諸貴). 벌휴의 2대손으로 아버지는 골정(骨正) 갈문왕이다.

12대 첨해(沾解, A.D.247) : 석, 이사금, 조분의 동생이다.

13대 미추(味鄒, A.D.262) : 김, 이사금, 미조. 김알지(金閼智)의 5대

손 구도(仇道)의 아들. 이 때부터 북방 찰기 기마 무사들이 신라의 권력에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 단군 조선의 김씨들이 삼한인(샤먼 민족)들의 거주지역인 중국 황해 해안을 통해 남하하여(한 나라 또는 낙랑을 거쳐) 신라의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

14대 유례(儒巤, A.D.283) : 석, 이사금, 조분의 장자.

15대 기림(基臨, A.D.298) : 석, 이사금, 기립(基立). 조분의 2대손. 父는 이찬 걸숙(乞淑)

16대 흘해(訖解, A.D.310) : 석, 이사금, 내해의 2대손. 父는 각간 우로(于老).

* 물길족(석씨)과 박씨 김씨 왕들이 혼재

17대 내물(奈勿, A.D.356) : 김, 이사금, 나밀(那密). 구도仇道)의 2대손. 父는 각간 말구(末仇).이때부터 북쪽 마한 출신 김씨들의 왕권이 확립되었다.

18대 실성(實聖, A.D.402) : 김, 이사금, 김알지의 후손. 父는 대서지 이찬. 내물왕의 둘째 아들 복호는 고구려에, 셋째 아들 미사흔은 일본에 볼모로 보낸다.

19대 눌지(訥祗, A.D.417) : 김, 마립간, 내물왕의 장자. 실성왕을 죽이고 왕이 된다.

20대 자비(A.D.458) : 김, 마립간

21대 소지(炤知, A.D.479) : 김, 마립간, 비처(毗處).

22대 지증(智獞, A.D.500) : 김, 마립간, 휘(諱)는 지대로(智大路). 내물 3대손 갈문왕 습보(習拱)의 아들.

백제가 망한 다음해(AD501년)에 왕실을 한반도로 옮김.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구려사 기록에 의하면 21대 문자왕(419년~519년) 때 494년 물길 족들에게 멸망한 남부여(신라)의 왕(22대 지증왕)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시기에 페르시아 인 들로 같은 시대에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와의 전쟁이 있었고 인도는 굽타 왕조(AD 320-550) 시대이다.

23대 법흥(法興, A.D.514) : 김, 왕, 휘(諱)는 원종(原宗). 연호는 건원(建元)

24대 진흥(眞興, A.D.540) : 김, 왕, 휘(諱)는 삼맥종(삼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 법흥의 왕제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 연호는 개국(開國)

25대 진지(眞智, A.D.576) : 김, 왕, 휘(諱)는 사륜(舍輪). 진흥의 2자.

26대 진평(眞平, A.D.579) : 김, 왕, 휘(諱)는 백정(白淨). 진흥의 태

자 동륜의 아들. 연호는 건복(建福)

27대 선덕(善德)여왕(A.D.632) : 김, 왕, 휘(諱)는 덕만(德曼). 진평의 장녀. 연호는 인평(仁平)

28대 진덕(眞德)여왕(A.D.647) : 김, 왕, 휘(諱)는 승만(勝曼). 진평의 모제 국반(國飯) 갈문왕의 딸. 연호는 태화(太和)

29대 태종무열(武烈, A.D.654) : 김, 왕, 휘(諱)는 춘추(春秋). 진지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의 아들

* 태종무열왕

본명 김춘추(金春秋) 재위 654년 ~ 661년

별명 태종공(太宗公), 태종 춘추공(太宗春秋公), 춘추지(春秋智)

출생일 진평왕(眞平王) 25년(604년) 사망일 661년 음력 6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4년 ~ 661년 음력 6월)은 신라(新羅)의 제29대 임금(재위 654년 ~ 661년)이다. 무열왕(武烈王)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은 김(金), 휘는 춘추(春秋)이다. 진골(眞骨) 출신으로 김용춘(金龍春)과 진평왕의 차녀 천명공주(天明公主)의 아들이다. 선덕(善德) · 진덕(眞德) 두 조정에 걸쳐 국정 전반, 특히 외교 문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자임하였다. 진덕여왕 사후 국인의 추대를 받은 알천의 사양으로 진골 출신 최초의 신라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대륙 백제와 한반도 백제 반군을 멸망시키고 한반도에서

의 대륙에서 피난 온지 160년 만에 새로운 신라의 기틀을 다졌다. 신라의 역사에서 최초로 묘호(廟筃)를 받은 왕으로서, 한국의 역사에서 조종(祖宗) 법 묘호를 받은 첫 군주로 평가되기도 한다.

제30대 문무왕(文武王)

본명 김법민(金法敏) 재위 661년 7월 ~ 681년 7월 21일 종교 불교 왕후 자의왕후 부왕 태종무열왕 모후 문명왕후

* 문무왕(文武王, 626년 ~ 681년 7월 21일 (음력 7월 1일) )은 신라 제30대 왕(재위: 661년 음력 6월 ~ 681년 음력 7월 1일).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둘째 누이인 문명왕후의 맏아들로서 이름은 법민(法敏)이다.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고구려 땅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만주와 한반도 전 지역을 차지하려 했던 당나라의 군대를 나당 전쟁에서 격퇴함으로써 676년에 한반도와 고구려 땅인 중국 북부를 통일한 왕이다. 대신 옛 고조선의 대륙 백제와 대륙 신라를 당나라에 내어 주었다. 왕후는 파진찬 김선품의 딸 자의왕후이다.

31대 신문(神文, A.D.681) : 김, 왕, 휘(諱)는 정명(政明) 혹은 명지(明之). 문무의 장자.

32대 효소(孝昭, A.D.692) : 김, 왕, 휘(諱)는 이홍(理洪). 신문의 태자.

33대 성덕(聖德, A.D.702) : 김, 왕, 휘(諱)는 흥광(興光). 신문의 둘째 아들로 효소의 동복 아우.

34대 효성(孝成, A.D.737) : 김, 왕, 휘(諱)는 승경(承慶). 성덕의 둘째 아들.

35대 경덕(景德, A.D.742) : 김, 왕, 휘(諱)는 헌영(憲英). 효성의 이

복 동생.

36대 혜공(惠恭, A.D.765) : 김, 왕, 휘(諱)는 건운(乾運). 경덕의 적자

37대 선덕(善德, A.D.780) : 김, 왕, 휘(諱)는 양상(良相). 내물의 10대손으로 아버지는 사찬효방(孝芳).

38대 원성(元聖, A.D.785) : 김, 왕, 휘(諱)는 경신(敬信). 내물의 12대손.

39대 소성(昭聖, A.D.799) : 김, 왕, 휘(諱)는 준옹(俊邕). 원성의 태자 인겸(仁謙)의 아들.

40대 애장(哀莊, A.D.800) : 김, 왕, 휘(諱)는 청명(淸明). 소성의 태자.

41대 헌덕(憲德, A.D.809) : 김, 왕, 휘(諱)는 언승(彦昇). 소성의 동복아우.

42대 흥덕(興德, A.D.826) : 김, 왕, 휘(諱)는 수종(秀宗). 헌덕의 동복 아우.

43대 희강(僖康, A.D.836) : 김, 왕, 휘(諱)는 제륭(悌隆). 원성의 손자이고 이찬 헌정(憲貞)의 아들

44대 민애(閔哀, A.D.838) : 김, 왕, 휘(諱)는 명(明). 원성의 증손이며 대아찬 충

공(忠恭)의 아들.

45대 신무(神武, A.D.839) : 김, 왕, 휘(諱)는 우징(祐徵). 원성의 손자이며 상대등 균정(均貞)의아들.

46대 문성(文聖, A.D.839) : 김, 왕, 휘(諱)는 경응(慶膺). 신무의 태자.

47대 헌안(憲安, A.D.857) : 김, 왕, 휘(諱)는 의정(誼靖). 신무의 이복 아우.

48대 경문(景文, A.D.861) : 김, 왕, 휘(諱)는 응렴(膺廉). 희강의 아들 아찬 계명(啓明)의 아들.

49대 헌강(憲康, A.D.875) : 김, 왕, 휘(諱)는 정(晸). 경문의 태자.

50대 정강(定康, A.D.886) : 김, 왕, 휘(諱)는 황(晃) 경문의 둘째 아들.

51대 진성(眞聖, A.D.887) : 김, 왕, 휘(諱)는 만(曼). 헌강의 여동생.

52대 효공(孝恭, A.D.897) : 김, 왕, 휘(諱)는 요(嶢). 헌강의 서자

53대 신덕(神德, A.D.912) : 박, 왕, 휘(諱)는 경휘(景暉). 아달라왕(阿達羅王)의 후손.

54대 경명(景明, A.D.917) : 박, 왕, 휘(諱)는 승영(昇英). 신덕의 태자.

55대 경애(景哀, A.D.924) : 박, 왕, 휘(諱)는 위응(魏膺). 경명의 동복아우. 견훤에게 죽음

56대 경순(敬順, A.D.927) : 김, 왕, 휘(諱)는 부(傅). 문성의 후

손으로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 신라와 같은 샤먼 계열 이씨인 왕건에게 신라의 토지 문서를 갖다 바치고 귀순

신라의 연혁

- 건국:

신라(新羅, 기원전 57년 ~ 935년)는 대륙에서는 양자강 하류 지역에

서는 약 500년 동안, 한반도의 동남부 일대에서는 약 천년 동안, 소위 삼국 통일 이후에는 한반도와 만주, 중국 북부지역을 약 500년 동안 지배하였던 국가이다. 국호인 ‘신라(新羅)’는 '신이 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원래 신라는 중국 광서 장족 자치구 계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경에 건국되었으며, 박(朴), 석(昔), 김(金)씨가 번갈아 가며 왕이 된 것으로 미루어 건국 토기의 권력 구조를 짐작하게 한다.

우선 박(朴)씨는 성 자체가 점치는 사람임으로 진한의 제사장일 가능성이 크다. 박씨 제사장을 중심으로 홍수 이후 삼한의 백성들이 과거 4천 년 전에 이룩했던 진한의 장강 문명의 전통을 이어 받으려고 한 것으로 보이고 상해에서 40킬로 떨어진 곳 우물의 알에서 박씨가 나왔다는 전설로 미루어 보아도 상해 이남이 건국 지역임이 틀림없다.

석(昔)씨는 페르시아 상인들로 동서양 무역로를 따라 이동해 온 사

람들로 보인다. 이들이 왕이 된 시기가 박씨 신라가 장강 내륙의 기반을 상실하고 상하이 인근 해안에서 번성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 신라 유물에서 로마의 것이 발견되었다.

김(金)씨의 경우 기록에는 4대 탈해(脫解, A.D.57) 때 광서성 자치구의 계림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상자에서 찾아내었다고 하나 현재 밝혀진 바로는 후한 때 흉노에서 귀화한 김일재의 후손이라는 설과 단군 조선의 낙랑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을 때 황해 연안을 따라 남하한 철기를 사용하는 무사 집단이라는 설이 있는데 필자의 생각은 후자를 포함하여 중국 황해 샤먼지역을 따라 순차적으로 남

하한 철기 사용 집단의 대표로 보인다. 그래서 성씨를 황금이라는 의미가 아닌 일반적인 쇠(金)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무사가 많다. 이들 진한 출신 김씨의 세력은 13대 미추(味鄒, A.D.262)을 끝으로 약화되고 이방인인 석씨들이 신라(원래 진한 후에 진 조선)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자 북방 철기 무사집단인 김씨들이 군사적으로 신라의 기틀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300년 간 계속된 초기 신라 권력쟁탈 전은 결국 조선 계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그 후 신라는 200년 간 안정되었으나 중국에 동족인 선비족의 북위가 등장하여 본격적으로 남하하고 북쪽 백제가 망하자 견디지 못하고 한반도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 한 반도로 이동

중국에서 춘추 전국 시대가 끝나고 진, 한을 거쳐 농경 화 하 족의 대표격인 북위가 건국되자 중원의 대세가 북방민족 중심의 농경민족에게 넘어갔음을 깨닫고 북경 인근을 점령하고 있던 샤먼국가인 백제(중부여)가 먼저 영토를 포기했는데 그 시작이 제 24대 동성왕이 AD 500년에 7명의 태수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준 것이었다. 그러자 신라(남부여)의 22대 지증왕도 채 1년도 안 된 AD 501년에 대륙 신라를 포기하고 당시 고구려 땅(원래 마한 땅)이었던 한반도 경주지역으로 피난을 하면서 대륙 신라의 한반도 이동이 시작되었다.

지증왕은 한반도 이동과 동시 우두머리의 명칭을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는 등 모든 국가제도를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그 후 23대 법

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백성의 단결을 꾀하였으며, 24대 진흥왕 대에 이르러 첫 번째 전성기를 맞아 7세기경 한반도 내의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589년에 중국을 통일한 수(隨)와 그 뒤의 당(唐)과 동맹(나 · 당 연합)을 맺은 신라는 660년에 대륙 백제의 잔존 세력을, 668년에는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한반도 이전 후 180년 만에 한반도와 만주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한반도와 만주를 동시에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를 나당 전쟁을 통해 몰아내고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고구려멸망 약 30여 년 뒤 698년 발해가 세워짐과 함께 남북국 시대의 남쪽 축이 되었다. 통일 이후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 집권 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 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건축 · 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왕과 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내부 분열이 이는 와중에 지방에서 자립잡고 있던 호족의 세력이 성장하여, 892년 견훤이 대륙에서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만주에서 태봉을 세움과 함께 후

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려와 후백제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신라 경순왕은 935년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하여 56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신라(진한, 진 조선)가 대륙에서 한반도로 영토를 옮긴 이유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신라는 원래 삼한 중 언어를 전할 목적으로 산으로 이동한 한국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홍수 이전의 12연방이 동방에서 축소된 이름인 진한이었다. 즉, 만리장성 북쪽 지역을 모한 또는 마한, 막한(막조선, 후에 고구려가 일어남)이라고 부르고 황하에서 양자강 지역(동쪽은 황해 서쪽은 청해까지) 지역을 번한(백제)이라고 불렀으며 양자강 남쪽을 진한(신라)으로 나누었는데 이 때 치리는 제사권의 경우 소도에서 단군이 관리를 하고 관경은 따로 화백을 두어 관리하도록 했다.(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 35p)

2. 당시 신라는 소도는 양자간 중류 동정호 인근 충칭에 있었고 관경 관리는 양자강 하류나 해안에 있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가 기원 후 2세기까지 신라의 일식과 월식 등 신라의 지상 천

문 관측 지점이 충칭 인 점이 이를 증거 한다.

3. 당시 중국은 진시왕의 진나라가 망하고 춘추 전국시대 중 군웅할거가 가장 심했던 오호 16국시대로 농경민족의 관심이 황하에서 양자강 쪽으로 점점 내려오고 있었던 관계로 한인 시대부터 삼한의 소도와 관경 전통을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대 제사장 나라 진한(眞韓)의 입장에서는 영토를 옮길 수밖에 없었으며 같은 한웅의 땅인 마한에 진한이 피난한 것이었다.

4. 그래서 신라는 한반도에 와서도 소도 관경의 전통인 소도, 천신제사, 화랑도, 화백제도, 원화, 단오 등 한인시대, 한웅 시대를 거쳐 내려온 민족의 전통을 비롯하여 민족의 혈통을 굳게 지키게 되었다.

- 신라의 만주와 한반도 통일 과정

현재까지 역사 기록에 의해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한반도 내에서 국경을 접하고 있던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했다고 알고 있으나 전술한 바와 같이 사실은 다르다. 당시 고구려는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를 점령하고 있었고 백제는 산동 반도에서 기원 후500년 24대 동성왕 때 이미 일차적으로 망했다가 그 아들 무왕(무령왕 일명 사마왕)이 한반도에 와서 죽었는데 무왕의 아들 26대 성왕 때 다시 산동 반도 사비성을 탈환하여 백성의 주력은 산동성에 거주하고 한 반도에는 무왕을 따라왔던 유민들 일부가 남은 상태였다. 신라는 서 신라(기원 후 501년 22대 지증왕이 한반도로 피난 온 후 남은 유민들의 나라)와 동 신라(지증왕 이후의 반도 신라)로 나뉘어져 있었고 원래 이들 고구려와 신라, 백제는 고조선의 마한, 진한, 번한의 삼한 지역에서 일어난 나라였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가 1993년 삼국유사등 사기에 기록된 일식과 월식 등 각종 천문현상의 지상 관측 지점을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역 추적 한 결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관측지점이 전술한 바와 같이 모두 대륙이었다.

이를 근거로 고구려, 백제와 신라의 초기 위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삼한으로 분리되었을 때는 황하 북쪽의 경우 마한, 즉 고구려이고 황하에서 양자강 사이는 번한으로 백제였고 양자강 이남은 진한으로 신라가 위치해 있었다.

그 후 화하족의 농경 문명이 번성하여 단군 조선의 관경이 영토로 변경되고(기원전 5세기) 후기 고조선 시대에는 통치 지역이 전체 대륙에서 중국의 동해안과 한반도를 포함하는 황해 연안으로 좁아졌

고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영토도 북쪽부터 황하(만리장성) 이북(고구려), 황하에서 양자강 북쪽(백제), 양자강이남(신라)으로 각각 축소되었다. 여기서 보면 삼한 시대의 관경 지역은 넓고 삼조선 시대의 영토지역은 좁은데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전에 관경 이었다가 농경군주의 영토에서 농사를 짓게 된 농민의 경우와 같다. 현대적으로 설명한다면 회교도가 미국에 사는 경우와 같은 것이고 분쟁의 화근이 된다. 삼조선이 인접해 있는 중국의 경우라면 당연히 분쟁을 고토 회복의 기회로 삼을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 건국 이후 한나라, 연나라, 북위, 수, 당 나라, 백제와 분쟁이 계속되었고 백제도 서쪽으로는 당나라와 남쪽으로는 신라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당나라와 고구려 간 분쟁이 시작되었을 때 불붙기 시작한 삼조선과 중국과의 전쟁은 고구려와 백제는 고토 회복전쟁이었지만 신라로서는 단군이 물려준 만주를 비롯하여, 산동, 하북 등 중국 내 모든 조선 땅을 양보하고 반도내의 백제 유민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한 반도 남쪽 땅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그 동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박창범 교수의 삼국의 천문관측 지점 분석 결과를 비롯하여 삼천 궁녀의 낙화암 자살, 의자왕의 아들 풍까지 북경 인접 북망산에 묻힌 점, 근초고왕과 개로왕의 북경 인근에서의 수많은 전투들, 의자왕의 사비성 전투, 황산벌 전투, 나아가 백제 31대 왕 중 무령왕 이외의 모든 왕릉이 중국에 있는 점 등 모든 백제의 주요 역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 신라의 한반도 선점 전쟁

1). 지증왕 때 신라 정부를 중국에서 한반도로 이동

박용숙교수의 샤먼제국에서 보듯이 5세기 즈음에 한반도에 신성한 제기나 의례기구들이 많이 들어왔다는 주장과 함께 이 때에 나타난 것으로 알려진 많은 고인돌 등 샤먼의 유적들이 한반도 남쪽에 주로 분포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이는 4,5세기경에 어떤 종교세력이 한반도로 밀려 왔다는 것으로 박창범 교수의 신라의 천문 지상관측 지점이 양자강 중류 충칭에서 한반도로의 이동해 왔다는 삼국사기에 실린 신라의 천문 관측지 이동 결과와 일치되어 신라의 한반도 이동이 증명된다. 그 종교의 실체는 소위 샤머니즘(삼한주의)이다. 19세기 초에 서구 학자들이 샤머니즘이 미개 종교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는데 이 삼한 중 진한이 신라 지증왕의 주도로 대륙 신라를 한 반도로 옮겨 원래 있던 마한과 결합함으로써 번한(중국)이 만든 농경 인본주의의 오염에서 삼한을 구한 것이다. 648년 김춘추가 당태종을 만나 나당 연합 조약을 맺고 654년 대륙의 서 신라와 대륙백제를 포기하는 대신 고구려 땅의 대부분과 한반도를 성공적으로

점령하였던 것이다.

* 지증왕

출생-사망 : 437 ~ 514, 재위기간: 500년 ~ 514년

본명: 김지대로, 김지도로, 김지철로, 별칭: 지증마립간

본래의 칭호는 지증마립간(智獞麻立干). 성 김(金). 휘(諱) 지대로(智大路)·지도로(智度路)·지철로(智哲老). 갈문왕(葛文王) 습보(習拱)의 아들. 어머니는 눌지왕(訥祗王)의 딸 조생부인(鳥生夫人) 김씨. 소지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왕위에 추대되었다. 502년 순장법(殉葬法)을 폐지하고 농사를 장려, 우경법(牛耕法)을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503년 국호를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德業日新), 사방을 망라한다(網羅四方)'는 뜻의 '신라'로 개정하였다. 또, 왕을 뜻하는 마립간(麻立干)의 칭호를 폐지하고 정식으로 왕이라고 칭하게 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504년 상복(喪服)제도를 제정하였고, 다음해에 주(州)·군(郡)·현(縣)을 정하고, 실직주(悉直州)에 군주(軍主)를 두었다. 512년에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于山國)을 공취(攻取)하였다. 죽은 뒤에 지증(智獞)이란 시호(諡筃)를 받았는데, 이것이 신라 시법(諡法)의 시초이다. 지증왕은 일련의 개혁을 실시하여 신라가 국가 체제를 갖추도록 하였으며 법흥왕은 이러한 지증왕의 업적을 토대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지증왕 [智獞王] (두산백과)

요약하면 김춘추의 한반도 확보를 위한 대 고구려, 대 신라 전쟁은 제사장 나라 신라의 존속이라는 명분이 있었으나 대륙의 단군 조선 땅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김춘추에 의한 통일전쟁의 가장 큰 과오는 자신을 지키려고 번한(당)에게 모한(고굴)를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그에 의한 대 당 협력 전쟁은 백제에 대해서는 황산벌 전투와 사비성 전투이고 고구려에 대해서는 평양성 전투이다. 황산벌 전투(660년)의 황산은 안휘성 황산으로 대륙백제와 신라의 국경이며 사비성(660년)은 북경 인근으로 고구려, 백제, 당나라의 접경지역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평양은 현재의 평양이 아니고 중국 요녕성 요양이다

* 사비성 전투

660년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 5만 명과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 13만, 합하여 18만의 군사가 백제의 수도(북경)로 쳐들어갔다. 당나라는 수로를 이용해 백제의 백마강(황하) 쪽으로 쳐들어갔고, 신라군은 육로를 이용하여 백제의 탄현(하남성 낙양시 맹진현) 쪽으로 쳐들어갔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의자왕은 대소신료들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빠르게 대처해야 한다는 편과 지연작전을 써야 한다는 편이 나눠 다투는 동안 연합군은 요충지인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넘어 왔다.

* 황산벌 전투

이에 의자왕은 급히 계백을 황산벌로 보내 신라군과 싸우게 하였다. 660년 8월20일 계백은 5천 김유신의 신라군 5만 명이 중국 안휘성 황산(양자강, 상해 인근, 대륙 백제와 대륙 신라의 경계지역)에서 싸워 신라군이 이겼다.

* 평양성전투

668년 9월 나당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전투로 655년 고구려의 집정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자 그의 독재정치의 후유증으로 집권층 내부에서 심각한 정권쟁탈전이 전개된다. 장남 남생은 동생인 남건과 남산의 내분이 그것이다. 이 같은 고구려 내부의 약점이 노출되자 당은 이적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략케 하였고, 김인문이 이끄는 신라군 또한 북진해왔다. 668년 7월 말 당의 선발대가 먼저 평양성 외곽에 도착했고, 신라군도 평양 근교의 사천벌판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평양성(지금의 지린성 지안)에 다다랐다. 나당연합군은 그 후 1달간 평양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하였다. 당시 고구려 보장왕은 저항을 포기한 상태로 남산과 수령 98명 등을 보내 이적에게 항복 의사를 표했으나 남건은 이에 반대하여 평양성의 문을 굳게 닫고 항거했다. 이로써 9월 평양성전투가 시작되었다. 나당연합군은 평양성이 바라다보이는 사수(蛇水)에 집결했다. 성이 포위된 상태에서 급박해진 남건이 한 번의 결전으로 승부를 결판내기 위해 성문을 열고 고구려군을 내보냈다. 그러나 기병의 규모가 약세에 있던 고구려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때 신라군이 사수의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 진격하여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고구려군의 군영은 의외로 쉽게 무너졌고, 패잔병들이 성문 안으로 몰려들어갔고, 평양성 안에 있던 사람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9월 21일 나당연합군이 평양을 에워쌌고 신라군의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5일 동안 맹렬한 공격을 받는 가운데 고구려 저항군 수뇌부에서 변절자가 나왔다. 저항군의 최고지휘자인 남건의 심복인 승려 신성이

평양성의 성문을 열었던 것이다. 신라군 기병 500이 먼저 평양성 안으로 들어와 길을 열어놓자. 당군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고구려는 이로써 멸망하였고, 당은 보장왕과 남건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그 후 당나라는 과거 백제 땅인 산동 반도에 웅진 도독부를 설치하

였고 이에 반발하여 661년에 복신·도침이 이 지역에서 일어나 백제 부흥운동 전개하였으며 663년에는 당나라가 만주에 계림대도독부 설치하여 만주까지 점령을 시도했으나 675년 신라군이 요하 인근 매소성(買肖城)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이어 676년에 기벌포(요하 하구)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당의 세력을 완전히 만주에서 제거, 요서 지역으로 후퇴시키고 지증왕과 김춘추의 170여 년에 걸친 진한의 한반도 이전 작업이 완성되었다.

신라의 한반도 이동 및 통일의 의미

1. 신라의 반도 통일을 두고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고구려의 땅을 당나라에 내어 주고 호남지역을 평정한 반민족적인 처사라고 하고 둘째는 고 조선의 황해 연안에 있었던 대륙 백제와 대륙 신라, 그리고 고구려까지 포기한 막중한 실패작이라고 하며 셋째는 조상들의 정신인 샤머니즘을 살리면서 조선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인 바다에서는 고기를 잡고 육지에서는 목축을 하며 사는 조상들의 뜻을 살리려고 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하는 견해가 있는데 필자는 세 번째 견해에 찬성한다. 그 이유는 지금도 우리는 해양에서 살길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육지와도 교역을 하고 바다로도 교역을 하는 그러한 나라가 한국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역사 왜곡 내용과 실례

- 역사 왜곡 내용

1. 신라의 김씨들은 한반도로 국토를 옮기면서 중국에 있던 고구려, 백제 등 고조선과 한인 및 한웅 시대의 중국 내 삼한의 역사를 모두 당나라에 자진하여 내 주었다.

2. 백제인들이 주가 되어 선비 족들이 만든 이세민을 당나라 왕을 하늘로 모시고 인간 황제를 신으로 섬겼다.

3. 피난 온 샤먼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려고 초기에는 샤먼을, 후기에는 불교를 장려했다.

- 역사 왜곡 실예

두보와 함께 당나라 때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태백은 일반적으로 시선(詩仙)이라 부르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태백의 시를 좋아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이태백이 고구려와 신라에 관련된 시를 남겨놓은 것은 잘 모른다. 이태백은 8세기의 당나라 때의 사람으로서 이미 멸망한 고구려나 또한 발해와 신라에 대하여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이태백이 남긴 ‘고구려’라는 시가 이태백 문집에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金花折風帽(금화절풍모) 절풍(折風) 모자에 금화(金花)를 꽂고 白馬小遲回(백마소지회) 백마(白馬)를 타고 머뭇거리며 돌아들고 翩翩舞廣袖(편편무광수) 넓다란 소매를 펄럭이며 춤을 추니 似鳥海東來(사조해동래) 나래를 펴

고 해동(海東)에서 날아온 새 같구나! 여기에서 절풍(折風)은 고구려 사람들이 쓰던 모자이다. 위의 시를 보면 우리가 벽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고구려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시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 때 이연수가 편찬한 북사(北史) 권94 고구려 편에는 위와 같은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절풍(折風)을 쓰는데 모습은 변(弁)과 같고, 선비들은 두 가닥의 새 깃털을 모자위에 꽂는다. 귀족들이 쓰는 관(冠)을 소골(蘇骨)이라 하는데 자줏빛 비단으로 많이 꾸미며 금과 은으로 장식된 옷

은 소매와 적삼이 크며 꾸밈이 없는 통이 큰 바지를 입는다. 가죽으로 된 띠를 두르고 누런 가죽신을 신는다. 부녀자들은 비단으로 겹쳐 만든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다.”라고 하여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상과 모자 그리고 의복에 관하여 자세하게 전하고 있으며 화려했던 고구려의 옛 영광을 떠올리게 한다. 경주 인근 중심 신라 강역 주장, 다시 살펴야 이태백이 썼다는 신라에 관한 시는 후대에 주해를 한 것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볼 때 어느 시기까지는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남아있지는 않다. 명(明)나라 양신(楊愼)이 찬한 『단연적록』과 『단연총록』에 이태백의 시와 신라와 관련된 것이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백이 쓴 시(詩)의 주(註)에 신라국은 해홍(海紅)이 많이 나는데 당나라 사람들이 그 것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해홍은 융왕자(월지국에서 나는 꽃의 종류)와 같은

종류이다. 또한 감귤에 관하여 기록한 『귤보(橘譜)』에 해홍이 보인다.”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해홍은 무엇일까? 조선시대에『지봉유설』을 쓴 이수광은 양신의 위의 책을 인용하여 해홍에 관하여 식물부 과일 편에서는 꿀처럼 단 맛을 내는 감귤의 종류로 보았으며 또한 훼목부 꽃 편에서는 남해안 해변에 피는 동백으로 보고 있어 신라에서 많이 났다는 해홍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또한 해홍을『태평광기』에서는 신라에서 온 바다 석류화라 보고 있고 『흠정속통지』에서는 중국 절강성 온주지역의 유감(乳柑)과 동정호 지역에서 나는 동정감(洞庭柑)과 함께 해홍을 해홍감(海紅柑)이라 하여 감귤의 종류라고 하는 등 해홍에 관하여 앞서와 마찬가지로 꽃과 감귤로 나뉘어져 있다. 현대적인 시각으로 볼 때

해홍에 관하여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만약 이수광의 말대로 남해안 인근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동백꽃이라면 그 꽃의 아름다움이 멀리 대륙에까지 미쳤을 것이지만, 해홍이 감귤의 일종이라면 현재 한반도 경주 인근 유역을 중심으로 한 신라의 강역과 인문지리를 다시 살펴야 할 것이다.

중국 절강. 복건성, 신라 관련 지명.유적 유난히 많아 중국에서도 감귤이 생산되는 지역이 한정되어 있음을 볼 때 해홍이 감귤이라면 『흠정속통지』의 기록처럼 지금의 절강성과 복건성 유역에서 생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절강성과 복건성 유역에는 신라와

관련된 지명과 유적이 유난히 많다. 대만과 마주하고 있는 복건성에는 지금도 ‘신라’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중국 복건성 용암시에 아직도 남아 있는 신라라는 지명>

현 중국 복건성 용암시(龍巖市) 신라구(新羅區)가 바로 그 곳이다.

용암시정부에 의하면 ‘신라’라는 이름이 지명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736년 당나라 때 신라현을 설치한 것으로 1997년 3월 용암시에 신라구를 설치되었으며, 3 개 향과 12개의 진과 12개의 가도 사무소가 있고 면적은 2,677 평방미터이고 인구는 45만 명이며 홍콩, 마카오, 대만과 해외에 거주하는 신라현 출신의 동포가 10만 명이나 되며 이곳은 아름다운 토지와 산이 푸르고 물이 수려하여 4계절이 봄 같으며, 기후는 사람이 살기 적당하다. 위 신라 현에 대한 기록으로는 『진서(晉書)』지리(地理)하편에 “진안군(晉安郡)은 진나라 태강3년(282년)에 설치하였는데 8개의 현(縣)을 거느리고 있으며 그 중의 하나가 신라현(新羅縣)이다.”라고 되어 있어 이곳에 신라현이설치가 된 것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대에 교간된 <진서>에는 천주에 있는 신라 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를 달아 놓았는데 “신라성이 정주부의 동남에 있다.”라고 되어 있으며, 정주(汀州)는 신라현이 표기된 곳 바로 서북에 있는 현 복건성 장정(長汀)을 말한다. 그 동남에 신라성이 있었다는 말이며 실제로 그곳에는 신라현이 있었고 지금도 신교(新橋)와 나방(羅坊)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또한 중국의 고지도에는 절강성 임해현 북쪽에 신라산이라고 뚜렷하게 표기되어 있는데 청나라 때 편찬된 『대청일통지』에도 “임해현 서쪽 30리에 신라 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산이 있는 절강성의 임해는 신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신라 21대 소지마립간 때의 기사에 “15년 가을 7월에 임해와 장령 두 곳에 진을 설치하고 왜적을 방비하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으며 또한 신라 30대 문무왕 15년에 문무왕이 당나라로부터 임해군공이라는 봉작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으며, 30대 소성왕 2년의 기록과 46대 문성왕 때의 기록에는 “평의와 임해의 두 전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신라가 절강성 및 복건성 등지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기록들은 신라가 대륙에 근거하고 있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다. 청 한림원 편찬 <만주원류고>, 만주도 신라 강역에 포함된다. 아니다. 우리는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의 강역이 대동강 유역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한반도의 남쪽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고 배워 왔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설로 보고 있지만 청나라 시대 건륭 42년(1777년) 한림원에서

편찬된 『만주원류고』에서는 신라의 강역을 현재의 만주지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만주원류고』에 따르면 『구당서』를 인용하여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삼고 그 왕 김법민을 계림도독으로 삼았다는 내용과 『신당서』를 인용하여 신라왕은 금성(金城)에 거처하며 금성의 둘레는 8 리이며 그 왕을 계림주도독으로 삼았다는 내용과 함께 신라는 동서 천 리, 남북 3천 리였다는 내용으로 볼 때 신라의 계림은 현재(청나라 시기)의 길림 지역이라 하였다. 계림(鷄林)과 길림(吉林)은 우리 발음으로는 달리 부르지만 중국 발음으로는 지린[jilin]으로 발음이 같으며 현 길림이라는 지명이 신라의 계림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을 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신라의 구주(九州)를 설명하는 항목에서는 “신라의 땅은 동남쪽으로 오늘날 조선의 경상도 강원도의 2개의 도를 아우르고 서북쪽으로는 길림 오랍에 이르고 또한 서쪽으로 개원 철령에 가깝다.”라고 하였으며 “개원(開元) (당나라 현종 713 ~ 741)이후 발해가 성할 때 압록강으로 경계하였다.”고 하였으며 신라의 구주(九州) 설치는 동쪽으로 길림에 이르고 서쪽으로 광녕에 이른다고 하여 결국 신라강역은 북쪽의 동쪽은 길림에서 서쪽은 개원 철령까지라고 하였다.

<만주원류고 등을 중심으로 본 신라의 강역>

이러한 신라의 강역에 대한 기록은 『만주원류고』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후예가 세운 나라의 역사인 『요사(遼史)』나 신라의 후손인 아골타(阿骨打)가 세운 금(金)나라의 강역을 설명하는『금사(金史)』나 중국의 사서 어디를 보아도 통일신라의 강역이 현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른다고 한 사서는 단 하나도 없다. 신라의 영토였다는 부산에서 대동강까지 아무리 길게 잡아도 3천 리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역사 강역에 대한 설정의 오류는 비단 통일신라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와 그리고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이다.

해상 왕국을 지향한 신라

신라에 대한 의문이 몇 가지가 더 있다. 신라가 양자강 이남으로 배치된 가장 중심이 되는 소도 관경인 진한(진짜 하늘 나라 제사장)인데 한인 시대인지 한웅 시대인지 모르나 왜 진한을 중원대륙의 맨 남쪽에 있는 나라 이름으로 정 했을까? 에 대한 의문을 가져 본다 그 이남을 우리는 왜(倭)라고 불렀다. 그 답은 진한 지역은 해상으로 나가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두 번 째 의문은 왜 단군이 중국 내륙의 진한 관경(양자강 유역 전 지역)을 버리고 황해 연안을 통치 지역으로 선정했을까? 그 해답도 역시 바다에 있다. 육지의 강 유역이 홍수로 위험한 속세 지역이라면 바다는 풍랑이 있지만 예측만 잘 하면 예고 없는 재난을 치할 수 있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의 터전이라고 본 것 같다. 나아가 부족한 물자를 해상 무역을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세 번째 의문은 황해 연안 단군 조선을 버릴 때 신라 지증왕은 왜 한반도를 새 터전으로 택했을까? 그 해답은 첫째 첩첩이 산맥과 강으로 막혀 북쪽에서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고 사방이 바다여서 안전하고 둘째는 집단 농경 보다 어업과 무역이 민족의 생존에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그랬을 것이다. 역시 바다가 해답이었다. 한민족의

오래된 바다로의 진출 염원은 그 후에 여러 번 나타나는 미스터리한 동서 해상교류의 흔적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

1. 그래서 김수로와 석탈해는 초기 신라 왕조의 구성원인데 김수로와 허황옥의 가야의 존재는 신라시대 훨씬 이전부터 인도, 동남아, 중국 동해안, 한반도, 일본에 이르는 철기 문명을 가진 해상세력이 존재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 해상 루트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페르시아(수메르)까지 포함되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까지 닿을 수 있었으리라 본다. 이름이 가야가 딘 것은 해상길 위에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2. 그래서 1940년에 발굴된 신라 황남 대총 금관이 로마에서 만든 것임이 증명된다.

3. 그래서 한인과 한웅시대 부터 민족의 염원이었던 해상 진출을 반대하는 내륙집단 농경 주의자들의 방해가 계속되었는데 제일 큰 것이 상하이를 통해 최고의 해상 비단길을 완성시킨 왕건의 고려사를 말살시킨 이성계와 이방원 이도(세종) 등 이씨 왕조이고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그 마지막 발악이었다.

4. 장보고는 중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해상을 개척하려 했던 위인인데 당시 친 선비 족 주의자들인 신라 왕권에 의해 피살되었다. 당시 신라 국민들은 이세민을 천자라고 불렀다(정수일 저 신라와서역 교류사 참조)

5, 거북선은 신라의 오래된 귀면 선박에서 유래되었고 조상들의 혼이 깃든 무기이며 현재 우리 라 조선 공업의 기반도 이 조상들의 염원에서 형성된 것이다.

6. 게르만족의 대 이동의 단초가 된 훈족의 유럽 진출 시 지도자인 앗틸라를 두고 신라의 제 8대왕 아달야(서 신라시대 왕 상하이 인근 금성에 주둔)이라는 설이 있는데 사실이라면 앗틸라의 서진은 신라의 체계적이고 강력한 해상 지원의 힘을 입었으리라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