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씨 조선

가. 이씨 조선(朝鮮) 개요

이씨 조선(朝鮮)은 1392년부터 1897년까지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통치하였던 중국 선비 족들의 왕국이다. 일반적으로 조선 왕조(朝鮮王朝)라고 한다, 선비 족인 이성계에 의해 고려의 영토를 기반으로 건국되었으며 홍건적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선비 족인 명나라 주원장의 홍무 예제(洪武巤制)를 법으로 정할 만큼 친 농경주의 친 명(明)적인 나라이며 모든 삼한의 전통을 한반도에서 없애려고 애를 썼다. 이후 500여 년 동안 그들의 원래 종족 명칭인 선비(졸본 일대에서 남하한 탁발부의 위나라가 시원이다)를 엘리트 이름으로 부르고 그들이 당나라에서 배운 한문 실력을 배경으

로 한문을 아는 사람들 위주로 양반 계급을 만들어 토착 성씨들의 권력 진출을 막았고 인본주의 중국 농경 민족의 종교인 유교에 의한 통치 이념을 기본으로 삼아 백성들에게 임금에 의한 충(忠)의 정신을 강요했다. 이씨가 조선을 통치하는 동안 한반도에서는 이씨들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한글(천자문에 한국에 토를 달기 위한 글자)과 천자문을 만드는 등 한문 보급에 온 힘을 기울였으나 현재 44만개 한국 어휘 중에게 중국의 한문에서 유래된 어휘 수는 22만개에 지나지 않으며 반은 고유 어휘가 그대로 남아 있다.

한글에 대해 부연한다면 세종의 한글 창제는 조선인들에게 한문과 같은 뜻을 가진 한국어로 한문을 가르치기 위한 가림토를 정리 한데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세종이 창제한 것이 아니고 기원전 8천년 경부터 번한 지역인 황하 농경지역에서 발전되기 시작한 상형문자를 마한과 진한 인들에게 이해시키려고(당시 표현을 빌리면 지방마다 말이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다해도 열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 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워...환단고기 임승국 해설 67P 참조)제 3대 단군 가륵 때 경자 2년(BC 2181년) 삼랑 을보록에게 명하여 정음38자를 만들도록 한 것이 기원이다.(한글 창제시 정인지 서문 참조)

이들은 500년 간 유교, 양반, 선비, 과거, 농사, 한문 등 국가와 가정의 모든 대소사를 중국식으로 강요했으나 6만년 동안 내려온 민족

의 샤만(삼한) 유산, 즉 양심과 언어는 모두 바꾸지 못했다.

* 이성계의 고향은 함경도 영흥이 아니고 중국 (영흥)이고 황하 지류이다. 당나라 때부터 무관 집안으로 조부 이안사가 당나라를 배반하고 몽고 군 휘하에 들어가 만주지역 무관을 하였고 그의 아들 이자춘과 손자 이성계가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나. 이조의 역사 조작

필자가 거의 평생을 우리 민족사를 연구하면서 가장 경악한 부분이 자료와 진실이 차이가 나도 너무나 난다는 것이다. 특히 사고를 좌우하는 언어가 그랬다. 그 원인을 조사한 결과 한문으로 된 자료가 문제였고 대부분 이조가 연유된 것이었다.

그래서 이조의 역사를 자세히 살피게 되었고 이성계의 이씨조선 건국 동기와 목적 및 그 과정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우선 이성계는 주원장의 주(朱)씨와 같은 나무(벼)의 표시를 가진 이(李)씨로 그 뿌리가 같은 황하 농사꾼들 출신이다. 이들은 농사는 천하의 대본(農者之天下之大本)이라는 신념으로 샤머니즘을 증오한다.

둘째, 주원장은 원나라의 농정실패에 반기를 든 홍건적의 우두머리로 원의 수도 원경으로 진격하고 있었고 이성계는 피난 온 고려 황실에 붙었다가 원의 요동지역을 정벌하러 나섰다가 서로 만나 의기 투합하여 주원장으로 부터 "너가 만약 고려 황실을 없애면 나는 대대로 이씨의 조선으로 인정하고 너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위화도에서 회군, 공민왕에게서 고려의 왕위를 찬탈하였다. 다음 이성계의 과업은 가) 고려사를 없애고 나)

한국인을 중국화 한다는 것이었고 이 것이 이방원(태종)과 정도

전을 통해 세종을 비롯하여 후대에 전해졌다.

* 이성계는 당나라를 배반하고 몽고에 붙어 대대로 만주와 한반도지역 군장으로 있던 이안사의 손자로 당시 징기스칸의 막내아들 만주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웃치킨의 부장이었다.

* 이조 전까지 한국인은 수 만년동안 산에서 살면서(강산) 자연이 주면 먹고 아니면 못 먹는 샤머니즘적인 삶을 살고 있었으며 농사를 죄악으로 여기며 속세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조는 이러한 민족을 농사지역(강호)으로 이끌어 농경민족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조의 대부분 업적은 이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대부분 정권이 안정된 세종 이후에 이루어졌다.

1) 국토를 요하 동쪽으로 한정

당시 고려 황실은 고종(23대 高宗, 1192~1259)이 몽고에게 쫓겨 한반도로 와서 강화도에 28년 간 항쟁하다가 1.259년에 고종은 강화도에서 죽었다. 그 후 24대 원종(元宗, 1259~1274) 때에 몽고와 결혼 화친 및 공녀를 통해 개성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는데 당시 이성계는 그의 아비 때부터 한반도와 만주의 원나라 군사령관(옷치킨)의 부장으로 그의 신하 노릇을 하면서 피난 온 고려 황실을 감독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이 때 이성계에게 붙은 고려 신하가 정도전이다. 원나라의 쇠퇴 징후가 보이자 공양왕(34대 恭讓, 1345~1394) 때 이성계는 옛 고려 땅을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모아 출정을 하는 척 하면서 요동지역 위화도에서 홍건적과 짜고 회군을 하고 공양왕의 왕위를 찬탈하고 고려의 황실 법통을 이용하여 이씨의 조선을 건국 한 것이다.

2) 한글 가림토 개발(한글 창제)

세종의 한글 창제는 한국인들에게 중국식 문명(예: 홍무 예제)을 주입하기 위해 한문의 뜻과 같은 한국어 토시를 개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문에 문외한인 한국인의 신속한 중국화 방법 중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이 일을 충녕 이도(李宸)가 한 것이다. 이 일은 후대에 한국인들에게 독자 언어를 유지시키면서 중국문명을 흡수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 환단고기 단군세기 3세 가륵 단군 2년 초에 삼랑 박사 을보록에 명하여 처음으로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 가람토 38자 중 28자는이조 세종대왕 때 창제한 훈민정음 28자와 모양이 같고 나머지 10자는 모양이 약간 변형되어 있다.

* 훈민정음 정인지 서문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 계해년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 예의를 갖추시어 훈민정음이라 이름 지으셨다. 이 글자는 상형문자로써 옛글자를 본따서 만드셨다

3) 고려사 조작

이조의 고려사 왜곡은 동족인 명나라 주원장과 합의하여 이루어 진 것으로 중국에 있던 고려가 한반도 안에 있었다고 한국인과 중국인들을 모두 속여야만 되는 이조의 존재의 정당성을 조작하기 위한 가장 크고 중대한 역사적 국책 사업이었다.

그렇게 하자니 왕건을 한반도 개성사람으로 속여야 되고 더 이전의 왕건과 싸운 견훤도 전라도 사람이어야 했다. 여기서 이방원과 정도전의 고민이 생겼다. 왕건은 당나라 헌종의 손자고 원래 이씨며 견훤도 당나라 호족 출신으로 아버지가 이자개(아자개로 속임)로 당나라 호족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둘은 모두 원나라로부터 당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중국 대륙에서 싸웠고 전술한 것처럼 왕건은 황실을 업고 삼한 사람들을 포용한 반면 견훤은 삼한의 표징인 신라를 적대시하였다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신라로 가는 해상 길목인 한반도 서남쪽 끝 섬인 진도 를 두고 8년 간(901-908년) 격전을 벌리다가 견훤이 산동반도를 점령한 후에라야 황해를 건너옴으로써 경주를 함락할 수 있었다.

이때 이씨들에게 당면한 문제는 이자개와 견훤의 고향이며 발상지인 호남성, 광주, 전주, 상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인데 그래서 호수도 없는 전남북도를 호남으로 바꾸고 그 안이나 주변에 관련지명을 바꿈으로서 지명 조작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후삼국을 조작하자니 삼국이 중국에 있었다는 것 삼조선과 삼한이 중국에 있었다는 것도 모두 한반도 내로 바꾸기 위해 거의 모든 중국의 주요 지명을 좁은 한반도 안으로 가져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오경(동경, 서경, 남경, 북경, 중경)은 규모가 너무 커서 가져 올 수 없었고 최근에 컴퓨터에 의해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상 천문관측지점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가 컴퓨터에 의해 계산해 낼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고려사 왜곡을 확대시키다 보니 필자에 의해 6만 년 전 언어 시대의 머나먼 상고사까지 살펴보게 된 것이다.

4) 삼한주의를 유교 바꾸어 한반도에 강요

자연의 삶을 선비 족 위주 농경 국가로 전환하였다. 언어가 생긴 이후 7만년간 계속된 자연이 조물주이고 인간도 자연에서 나왔고 인간온 자연의 법칙에 따라 자연과 인간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기본 심성 삼한주의(샤머나즘)을 인간이 신이라는 사상 즉 유교로 바꾸었으며 지역 별 특산물을 먹고살던 한반도 인들에게 쌀을 세금으로 바치도록 강요하였고 이 정책은 태조 때(1.392년) 부터 이조 숙종(1.674년) 때까지 거의 300년 간 끊임없이 강요하였다.

* 수 만년동안 해안의 살을 살아오던 삼한의 민족 중 남해안, 특히 전라도 해안 지역의 어민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전라도의 반정부 정서는 이 때 더욱 심각해 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이조는 이 삼한주의를 버렸다는 이유로 임진왜란을 비롯한 청나라의 침입인 병자호란(丙子胡亂)까지 겪었고 고려 시대까지 한반도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왕조의 골육 상쟁, 당파싸움 등 중국식 권력 투쟁을 겪다가 건국 400년 만에 영남의 안동 김씨들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샤머니즘의 관점에서 볼 때 김씨에게로의 권력 귀속은 많은 수의 인구를 차지하는 비율로 볼 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다.

5) 이조가 우리 민족에게 잘한 짓

- 비록 앞에 이씨(중국) 조선이라고 명명했지만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을 남겨둔 점

- 500여 년을 통치하면서 한문을 보급하고 선진 한문 문물을 완전히 흡수하면서도 한국어를 인정하고 언어에 맞는 한글을 찾아 보급

한 점

- 중국의 사회적 통치 방식인 유교를 장려하면서도 조상들의 종교인 무속과 불교를 탄압하지 않은 점

- 황하 문명식 인본 문명인 전제 군주적 국가를 표방하고 왕을 중시하고 충(忠)을 제일 가치로 삼았으나 그 다음으로 한웅 조선 시대부터의 샤머니즘 전통인 가족주의인 효(孝열녀문)와 예(禮 숭예문)를 중시하였고 신토불이(身土不二)의 전통, 조상들의 의술(한의학, 동의보감)등 유익한 실사구시 전통을 장려함

- 과거 제도를 통해 평민에게도 신분 상승의 기회를 준 점

6) 소 결론: 번조선 사람들이 농경 문명을 통해 황하유역에서 발전시킨 인본주의적 계급 통치의 삶도 샤먼 한국에서는 500년 이상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힘, 돈, 숫자, 개인의 이익이 절대가치인 서양의 인본주의도 호모사피엔스의 본질인 한국인의 양심에게는 5세기 이상 버티지 못한다.

다. 이조 왕 계보

1대 태조(太祖) 제위기간: 1392-1398년 재위 년도: 6년

- 고려 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을 함으로써 고려를 멸망 시킴

- 1392년 조선왕조를 세움.

2 대 정종(定宗) 제위 1398 제위 기간 2 년

-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3 대 태종(太宗) 1400 18

- 도적 떼의 두목인 홍건적 주원장이 만든 농민 생활규칙인 홍무예제(洪武 禮制)를 조선의 생활 기본법으로 받아드림

-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

- 여타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4 대 세종(世宗) 1418 32

-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

- 훈민정음 창제

-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

- 북쪽에 사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둠

- 태종의 명에 따라 제위 기간 거의 전부(32년 중 27년) 고려사를 한반도 사로 조작하는데 바쳤고 과로로 말년에 10년 간 은 당뇨로 인해 시각 장애를 앓았다.

5 대 문종(文宗) 1450 2년

- 유교적 이상 정치

- 문화를 발달시킴

6 대 단종(端宗) 1452 3년 -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중국식 권력쟁탈전의 시작

7 대 세조(世祖) 1455 13

- 단종을 좇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 국조보감(國朝拱鑑), 경국대전(啬國大典) 등을 편찬

- 관제 개혁

* 중국식 중앙집권적 농경 군주제를 본격적으로 적용함

8 대 예종(睿宗) 1468 1

- 경국대전을 완성 시킴

9 대 성종(成宗) 1469 25

- 숭유억불, 인재등용 등 조선초기의 문물 제도를 완성

- 경국대전을 편찬함

10 대 연산군(燕山君) 1494 12

- 폭군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임.

-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11 대 중종(中宗) 1506 38

-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

- 1519년 기묘사화, 신사사화를 초래함

12 대 인종(仁宗) 1544 1

-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활함.

13 대 명종(明宗) 1545 22

- 12세에 즉위하여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겪음 * 조선왕조 500년은 사화와 당쟁, 그리고 외침의 연속이었다.

14 대 선조(宣祖) 1567 41

- 16세에 즉위

-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겪음

15 대 광해군(光海君) 1608 15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 (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 저지름

- 서적편찬

-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16 대 인조(仁祖) 1623 26

-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겪음

17 대 효종(孝宗) 1649 10

-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갔다 돌아와 즉위 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18 대 현종(顯宗) 1659 15

-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은 유신들이 희생됨

- 대부분 해안에서 생선을 잡아 먹고사는 전라도 해안 주민들에게 무조건 쌀을 세금으로 바치라는 소위 대동법을 시행함.

- 동 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19 대 숙종(肅宗) 1674 46

- 남인, 서인의 당파싸움(기사사화)

- 장희빈으로 인한 내환- 대동법 전국 확대

-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

20 대 경종(景宗) 1720 4

- 숙종의 아들로 장희빈 소생.

- 신임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이름.

21 대 영조(英祖) 1724 52

-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씀

- 균역법 시행, 신무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듦

- 사도세자의 비극 겪음

22 대 정조(正祖) 1776 24

-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 -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 설치 -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 활자를 만듦 - 실학을 발전시킴 - 문화적 황금시대

23 대 순조(純祖) 1800 34

-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대

- 신유사옥을 비롯한 세 차례의 천주교 대 탄압이 있었음

- 1811년 홍경래의 난 발생

24 대 헌종(憲宗) 1834 15

- 왕5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사옥 발생

25 대 철종(哲宗) 1849 14

-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 황후의 명으로 즉위함-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 들여 안동 김씨세도 정치가 시작됨.

* 한반도 토착민의 주축인 김씨들이 선비족에게서 400년 만에 권력을 되찾게 된것

- 진주민란 등 민란이 빈번

26 대 고종(高宗) 1863 44

-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 대원군과 민비의 세력다툼

- 구미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에 시달림 -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함 - 임오군란이 일어남

27 대 순종(純宗) 1907 3

- 고종의 둘째 아들

-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