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고려(중국어: 가우리)

존속 기간: 918년 ~ 1392(474년)

수도: 사천성, 성도, 서안, 하남성 개경

공용어: 중국어 한국어

정부 형태: 군주제

마지막 왕: 공양왕(1389년 ~ 1392년)

고려(高麗)는 918년 태조 왕건(918년 ~ 943년)이 건국한 이후, 1392년 몽고의 징기스칸에게 멸망하기까지 474년 간 중원과 한반도를 지배하였던 왕조이다. 태조 왕건은 당태종 이세민의 후예인 당 15대 황제 무종의 손자로 사천성 성도 지방의 호족으로 있다가 샤머니즘(도교)의 복원을 내세워 당 황실을 비롯하여 수나라 황실(양길)과 신라(궁예)의 도움을 받아 개국, 사천성 성도에서 서안과 개경 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양자강 북쪽 옛 삼한의 전 지역과 한반도를 통치하였다. 역대 왕 중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노비 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어서, 경종 때는 전시과 제도를 실시하였고, 성종은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다. 수도 중 하나인 남경의 외항인 벽란도(상해)에서 중국, 일본,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지의 상인들과 무역했다. 요나라(거란), 금나라(여진)등의 침공을 격퇴했으며 송나라와는 우방과 같은 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왕건의 왕조는 최선을 다하여 북위 때부터 시작한 선비 족의 농경 인본주의를 무너뜨리고 사면의 제사장 국가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여 코리아가 전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12세기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해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최충헌, 최우로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이 수립되었다. 또한 유민들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중원 도처에서 정부에 반항하였다. 13세기에 30여 년에 걸친 원나라(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직·간접적인 지배를 당하면서 국력이 쇠퇴했고, 고종(1213-1259) 때에 왕실을 이끌고 개경(텐진 인근)에서 황해로 나와 강화도로 피난을 하였다. 이 때 최 우 등 무신 군대의 일부는 서해안과 제주도 등지에서 30여 년 간 항쟁을 계속했고 당시에 제주도 항쟁 장수의 성이 지금 제주도민의 주성(主姓)인 고, 량, 부(高, 粱, 夫)였다. 고종은 강화도에서 죽고(홍릉) 강화도에서 29년 간을 은거하다가 공주를 비롯하여 왕실의 여인들을 몽고로 공물로 보내는 등 국제 결혼을 통해 몽고와 화친을 맺고 이를 기화로 왕실의 1010년 경 소도로 미리 정해둔 신라의 중심 개성(고려의 천문 관측 지점으로 )유지를 허락 받아 개성에서 130년 간을 천도 상태로 지내다가 1392년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결국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기점으로 멸망하였다.

당헌종 [ 唐憲宗 ]

출생 - 사망 778 ~ 820

이순(李純). 당나라의 11대 황제(재위, 805-820). 본명은 순(淳)이다. 순종(順宗)의 일곱 번째 아들이다. 정원(貞元) 21년(805) 태자가 되고, 그 해 8월 즉위했다. 관료 조직을 개혁하고 강회(江淮)의 재부(財賦)를 정돈하면서 월권과 반란을 제압하려고 했다. 이강(李絳)과 배도(裴度) 등을 기용해 유벽(劉?)과 이기(李錡), 오원제(吳元濟) 등을 토평(討平)하자 강번한장(强藩悍將)들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명령을 들었다. 또 번진(藩鎭)이 발호했던 국면도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가 당나라 조정의 위명(威名)이 회복되었다. 만년에 금단(金丹)을 먹고 조급증에 빠져 결국 환관 진홍지(陳弘志) 등에게 모살(謀殺)당했다. 15년 동안 재위했다. 시호는 성신장무효황제(聖神章武孝皇帝)다.[네이버 지식백과] 당헌종 [唐憲宗]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1.20, 이회문화사)

고종[ 高宗 ]

고려의 제23대 왕(재위 1213∼1259). 재위 기간에 몽골 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았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에 천도, 28년간 항쟁했다. 팔만대장경 조판, 유학 장려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출생-사망: 1192 ~ 1259 본명 철 별칭 초명 진·질, 자 대명·천우, 시호 안효

강종의 맏아들. 어머니는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柳氏). 비(妃)는 희종의 딸 안혜태후(安惠太后) 유씨(柳氏). 1212년(강종 1) 태자에 책봉되고,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최씨(崔氏)의 무단(武斷)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다가, 1258년 최의(崔?)가 살해되자 정권을 되찾았다. 재위 기간에 몽골 등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특히 1231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몽골의 침입을 받고 강화(江華)에 천도하여, 28년간 항쟁하였다. 왕의 친조(親朝)와 태자 전(?)의 볼모를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되어, 이후 고려는 사실상 원(元)나라의 속국으로서

공민왕 때까지 한 반도 개성에 칩거하며 굴욕을 겪었다. 그동안 한 반도는 황룡사탑(皇龍寺塔) 등 많은 문화재를 소실하였으나, 원나라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조판(彫板)하게 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능은 강화의 홍릉(洪陵)이다.

가. 왕건

* 왕건 묘의 위치

중국은 "전촉왕 왕건묘"라고 하는데 현지에서는 토속 거주민들은 "가우리(고려) 왕건묘" 라 부른다. 사천성 성도(청뚜) 시내의 영릉로에 왕건묘가 위치하며 전촉왕 왕건묘라고도 하고 입구에는 영릉이라 표기되어 있다. 10세기 초 혼란기에 성도를 중심으로 전촉(前蜀:903~925)을 세운 왕건의 묘로 영릉(永陵)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태조 왕건의 묘로서 왕건이란 인물은 대륙에서 오직 하나이다. 적사암으로 만든 묘실은 전실과 중실, 후실로 나뉘고, 전 길이 23.4㎝로 관좌양측에는 12위의 역사상(力士像)이 늘어서 있고, 동. 서. 남의 3방에는 24위의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기생상이 새겨져 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동작의 특징을 보면 각각의 그림이 각기 다른 자태와 조형의 미를 보여주며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왕건의 묘는 1942년에 발굴되었고 1961년 국무원에 의하여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로 지정되었는데 무덤의 길이는 80m정도에 15m높이로 묘실이 남아 있다 .

[묘명의 변경]

중국은 왕건묘가 한국인들에게 알려진 이후 이름을 영릉으로 바꾸어 고려왕건의 이미지를 지우고 있다.

[의의]

- 1. 동시대에 있던 고려 태조 왕건릉, 고려가 한반도에만 있었다면, 거론의 가치도 없건만, 고려가 대륙에 위치했다는 사실하나만으로 왕건릉, 왕건묘는 귀중한 발견이고, 귀중한 유물이다.

- 2. 사천성 성도(成都)에 왕건의 묘는 1942년 이곳 주민들이 일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방공호를 파다가 우연히 발견이 되었으며 1961년 국무원에 의해 전국중점 문물보호 단위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이성계가 대륙 왕건을 한반도 왕건으로 조작해야 하는 이유

- . 주원장의 홍건적을 합법화하고 자신의 한반도 지분을 학보하기

위해

- 2. 당의 이씨 무사이면서 당을 배반하고 몽고 징기스칸 막내 아들 웃치킨의 부장이 된 이자춘을 닮아 배반을 잘하고 반면에 권력욕이 강함

* 이러한 힘과 숫자면 다 된다는 인본주의 농경민족 현상은 이조 후 지금 까지도(2017년) 그의 자손들에게서 많이 보인다. 예 이씨조선 왕과 선비들 이완용, 이병도, 이석기, 이해찬,(이순신은 덕수 이씨)

- 3. 삼한의 자연 주의 정통을 부활시켜 수, 당의 농경 계급제도, 왕권 수탈주의 전통을 없애려던 왕건 태조를 매장하기 위해

- 4. 주원장을 옹호하면서 삼한 전통의 신라와 조선을 말살하고 묘

판에서 태어난 성씨의 선비족 표징인 이씨(李氏)가 조선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 그래서 국호를 이씨조선이라고 불렀다.

고려 왕조계보

다음은 소위 이조의 세종(본명 이도:李宪)에 의해 악의로 변조된 고려왕조사의 요약이다. 세종은 태종의 명을 받아 평생을 단군조선과 삼국과 고려의 역사기록을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 안으로 옮기려고 주요 지명을 변개하고 유적을 조작하고 고려 역대 왕들을 비하하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1대 태조(太祖, 877~943)

이름은 왕건(王建). 신라 궁예의 부하로, 부하에게 옹립되어 송도에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오름. 935년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실은 중국과 한반도 전지역)를 통일함

2대 혜종(惠宗, ?~945)

휘는 무(武). 태조의 맏아들. 대광인 왕규(王規)의 음모에 신경 쓰다 병사함.

3대 정종(定宗, 923~949)

왕규의 난을 평정하고 불교를 숭상함. 서경(평양)에 왕성을 쌓고 천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4대 광종(光宗, 925~975)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노비 안검법을 제정하고,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梔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동방에서는 최초)를 실시함.

* 노비 안건법은 중국 농경 계급제도의 상징인 노예제도를 개선한 것으로 자연에서 자신의 천부적인 능력대로 식량을 얻어 살게 해야 한다는 샤머니즘의 부활이다.

* 이전의 중국에는 과거제도가 없었고 이조시대 양반들처럼 힘으로 점령한 권력 집단의 세상이었다..

5대 경종(景宗, 955~981)

휘는 주(인宙).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아들. 전시과를 제정함. 방탕한 생활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고 세종이 기록.

6대 성종(成宗, 960~997)

휘는 치(治).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유교를 국가지도의 원리로 삼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함

* 고려의 국가지도 원리는 샤머니즘에 입각한 불교이다.

7대 목종(穆宗, 980~1009)

휘는 송(誦).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고치고 학문을 장려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강조(康兆)에게 피살되었다고 비하.

8대 현종(顯宗, 992~1031)

휘는 순(詢). 천추 태후의 강요로 중이 되었다가 강조의 옹립으로 즉위함.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하였으나, 강화하여 국내가 안정되고 문화가 발전함.

9대 덕종(德宗, 1016~34)

휘는 흠(欽). 왕 2년에 천리장성을 쌓고, 국사편찬 사업도 완성함.

10대 정종(靖宗, 1018~46)

휘는 형(亨).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만리장성의 완성)

을 쌓고, 장자 상속과 적서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음.

11대 문종(文宗, 1019~83)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많은 법류을 제정하여 내치의 기초를 닦음. 학문을 좋아하고 서예에 능함.

12대 순종(順宗, 1046~1083)

문종의 맏아들로 즉위한 해에 죽음.

13대 선종(宣宗, 1049~1094)

휘는 운(運). 문종의 둘째 아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 송나라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오는 등 고려문화의 융성기를 이룸.

14대 헌종(獻宗, 1084~1097)

휘는 욱(昱). 즉위하자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평정하고, 다음해에 신병으로 숙부

에게 왕위를 물려줌.

15대 숙종(肅宗, 1054~1105)

문종의 셋째아들. 조카인 헌종을 폐위시키고 즉위함. 해동통보를 주조하여 화폐제도를 시작, 고려의 황금시대를 이룸.

16대 예종(睿宗, 1079~1122)

휘는 우.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는 등 학문을 크게 진흥 시켰음.

17대 인종(仁宗, 1109~1146)

휘는 해(偕).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겪었으나 선정을 베품.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케 함.

18대 의종(毅宗, 1124~1173)

휘는 현(晛). 인종의 맏아들.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을 우대하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폐위되고, 명종3년에 살해됨.

19대 명종(明宗, 1131~1202)

휘는 호(皓). 의종의 동생. 정중부의 추대로 즉위하고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쫓겨남

20대 신종(神宗, 1144~1204)

휘는 탁(晫). 인종의 다섯째 아들로 최충헌이 옹립한 왕임.

21대 희종(熙宗, 1181~1237)

휘는 영. 신종의 맏아들. 최충헌을 없애려다 오히려 쫏겨남.

22대 강종(康宗, 1152~1213)

휘는숙(璹), 정, 오. 명종의 맏아들. 명종과 함께 쫏겨났다가 최중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오름.

23대 고종(高宗, 1192~1259)

몽고의 침입을 받아 1229년 개경에서 천진--> 황해를 거쳐 강화로 천도한 뒤 28년 동안 항쟁하였으나 결국 굴복함. 황실을 한반도 개성에 존속시키기 위해 그의 손자를 노국 공주에게 장가를 보낸 것을 비롯하여 조공 녀를 보내었고 이후 280년 간 고려 황실이 한반도 개성에 있게됨. 불교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중국에서 가져와 해인사에 보관.

24대 원종(元宗, 1259~1274)

휘는 정(禎). 몽고에 굴욕을 당한 뒤 즉위. 임연(林衍)의 난, 삼별

초의 난 등으로 화평한 날이 없었음.

25대 충렬왕(忠烈, 1236~1308)

원(元)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제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았음.

26대 충선왕(忠宣, 1275~1325)

휘는 장(璋). 몽고 황실의 딸과 결혼하고 1298년 왕위에 올랐으나 7개월만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다 다시 즉위하여 원나라에서 국정을 봄. 고려와 원나라의 학문교류에 힘을 씀.

27대 충숙왕(忠肅, 1294~1339)

휘는 도(燾). 정사에 염증을 느껴 아들 충혜왕에게 양위 하였다가 행실이 좋지 않자 2년 만에 복위하였다고 이조가 기록.

28대 충혜왕(忠惠, 1315~1344)

휘는 정(禎). 행실이 좋지 않아 정사를 혼란에 빠뜨렸음. 원나라로 귀양을 가다 병사했다고 이조가 고려사에 기록.

29대 충목왕(忠穆, 1337~1348)

휘는 흔(昕).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8세에 원나라에 의하여 즉위함. 어머니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함.

30대 충정왕(忠定, 1337~1352)

휘는 저. 12세에 즉위하여 외가친척인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裴佺) 등으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지고, 왜구의 침입이 잦아 3년 만에 폐위됨.

31대 공민왕(恭愍, 1330~74)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여 친원파인 기(奇)씨 일족을 제거하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침. 말년에 왕비인 노국 공주가 죽자 정사를 그르쳐 최만생 (崔万生)과 홍륜(洪倫)에게 시해 당함.

32대 우왕(禑, 1364~1389)

공민왕의 아들. 10세에 즉위하나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폐위됨.

33대 창왕(昌, ?)

이성계 등이 우왕을 내쫏은후, 창왕을 내세웠으나 1년만에 강화도로 붸겨나 10세 때 시해됨.

34대 공양왕(恭讓, 1345~1394)

휘는 요.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을 빼앗기고,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폐위 당하고 고려는 멸망함.

다. 고려의 실체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실체에 대해 알아내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왜냐 하면 이조가 오랜 기간에 걸쳐 고려의 역사를 말살했기 때문이다. 다만 훈요십조 등 왕건 자신의 유훈과 그의 계보가 추진한 정책 등을 통해 유추해 볼뿐이다. 사실 왕건(王建)이라는 그의 이름도 그 유래가 의심스럽다. 王(왕)씨 성은 중국에서는 수 천년 전부터 하늘과 땅을 잇는 대 제사장을 의미하는 성으로 함부로 쓸 수 있는 성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세울 건(建)자까지 넣었으니 아무래도 샤먼의 전통을 부각하려고 인위적으로 만든 이름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일설에 왕건이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가계로 17대 선종(이침 李? 846~859)의 손자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가 선비 족의 대표 성씨로 벼농사를 지으면서 번성한 혈족을 의미하는 이(李)씨였음이 틀림없다. 우리는 중국의 농경민족을 대표하는 이들 이씨에 관해 알아야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삼신을 섬기던 한웅 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중화 이단 민족이나 그 이름은 스스로 그럴싸하게 조선의 백성이라는 선비(鮮卑)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 선비(鮮卑)라는 의미는 조선(朝鮮)에서의 선(鮮)의 의미와 같이 "자연이 주는 물고기와 양을 먹고산다" 라는 뜻으로 원래 삼한의 자손이었으나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시왕 이후 오호 십육 국의 난립으로 중국이 혼란해 지고 고조선이 망하고 고구려, 신라, 백제가 등장하자 고구려의 발원지인 내 몽고 지역에서 발원하여 오호 심육 국의 난을 평정하고 진시왕 다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북위 탁발부(머리깎은 부족의 원조)의 후예이다.

* 북위 [ 北魏 ]

선비족(鮮卑族)의 탁발부(拓跋部)가 중국 화북지역에 세운 북조(北朝) 최초의 왕조(386∼534).원위(元魏)·후위(後魏)라고도 한다. 3세기 중엽 탁발부는 내몽골의 바옌타라[巴彦塔拉] 지방에서 세력을 넓혔으나, 4세기 초 이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북변의 보위(保衛)를 도모하려는 서진(西晉)으로부터 산시성[山西省]

북부의 땅을 얻음으로써, 그곳에서 세력을 신장하였다. 315년 군장(君長)인 탁발 의로(拓跋?盧)는 서진의 관작을 받고 대왕(代王)으로 봉해졌다. 위는 중국 고래의 전통에 의한 국가 체제를 채용하기로 정하고, 화북지방을 평정하기 위하여 몽골에서 데려온 여러 유목 부족을 해산시켜 부민(部民)을 군현(郡縣)의 호적에 편입하게 하였다. 그리고 훈공이 있는 부족 중의 유력자에게는 관작을 수여하고 한족(漢族)의 명문(名門)과 똑같이 고급관리로 채용하여 귀족제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명원제(明元帝) 때 남조(南朝)의 송(宋)을 공략하여 허난[河南]지방의 땅을 빼앗았고, 태무제(太武帝) 때 하(夏) ·북연(北燕)·북량(北崣)을 멸망시킴으로써 5호 16국(五胡十六國)의 난을 종식시켜, 439년 마침내 북위는 강북지역 통일을 완성하였다. 이로 인해 대륙백제는 말하고 대륙 신라는 한반도로 피난하였다. (두산백과)

이들은 원래 북이(北夷)중 하나였으나 황하 일대를 점령한 후 자신들의 성을 한자(漢字)의 의미 상 벼농사 아래에서 난 자식이라는 뜻을 가진 이(李)로 표기하고 발음은 동이의 이(夷) 발음을 그대로 쓰는 이씨가 되었다. 그 후 거의 1천6백년 동안 농경 사회와 유교를 이용하여 자손을 늘인 결과 2천 년 현재 중국에 이씨는 13억 중 왕씨와 비슷한 1억 명을 헤아린다. 이들은 전제군주제와 균전제, 수로 사업 등을 이용하여 초기 농경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해 왔으나 당나라에 이르러 세금징수의 한계, 지방의 호족들과 북방의 민족들의 침략, 부패 등의 취약점이 노출되어 한계를 보여 왔다. 그래서 왕건은 건국 후 당나라의 패망 원인을 제거하는데 애쓴 것 같다. 왕건의 의외성은 다른 곳에 있다. 그가 이들 선비 족들이 천여 년을 넘게 지켜 온 농경 인본주의 계급 제를 버렸고 삼한의 습속을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그가 호족들을 전쟁으로 굴복시키지 않고 결혼으로 해결한 것, 광종 때 과거 제를 만들고 노비 제도를 개선한 것 등 끊임없이 농경 사회제도를 과거 삼한 식으로 발전시킨 것이 그것이다. 왕건은 개인과 지역 이 모두 자연과 더불어 자연에 순응해서 사는 삶을 중시했고 유교를 없애고 삼신신앙의 본 류인 팔관회 와 이의 아류인 불교의 연등회를 아울러 정착시켰다. 고려 때 완성된 남녀 평등과 계급 타타, 자연지역 물산과 국내외 교역의 장려, 해군의 운용, 관리들의 사명감 등은 실크로드, 고려 청자, 고려 인삼과 함께 고려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러한 사실을 인도의 시성인 타골이 증거한 바 있다. 그러면 왜 왕건이 선비 족의 전통을 버리고 삼한의 습속을 장려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도 원래는 조선의 가지였다는 것이고 둘째는 당나라의 부활을 위해서는 일반 서민들의 정서 속에 녹아있는 이러한 심성에 호응해야만 한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삼신 사상의 원류인 신라의 후예로 만주에 기반을 가진 궁예의 (원래 수나라 호족인 양길의 부하)예하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당 황실 기반이 견훤과의 후삼국 패권을 다툴 때 서안을 중심으로 한 중국 대륙의 핵심부 점령이 기정사실이 된 것이다. 또 그래서 후에 신라의 김씨 왕조(경순왕)는 그래서 조건 없이 왕건에게 복속한 것이고 한반도는 삼한의 습속과 전통을 계승할 수 있었다.

고려 왕조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왕조의 역사이다.

* 경순왕은 신라 7도의 땅문서를 왕건에게 가져다 바치면서 이것을 바칠 터이니 조건은 김씨들이 한반도에서 계속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남북한에는 김씨가 20% 내외로 가장 많다.

고려의 위치와 수도가 개경임을 증거하는 결정적 근거

고려와 수도 개경(개성)의 위치에 대하여 결정적 근거는 바로 '동명성왕'의 무덤이다. 1123년 고려에 왔던 중국 송나라 사신이 서긍이 기록한 고려도경에 동신성모지당(東神聖母之堂)이 개성에 모셔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도경'은 김부식이 송에 다녀온 이후 고려에 왔던 사신 서긍이 지었는데, 1123년(인종 1) 송나라 휘종(徽宗)의 명에 따라 한달 남짓 개성(開城)에 머물면서 체험한 견문을 바탕으로 송나라에 돌아가 편찬한 사서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체적인 동명성왕무덤의 위치는 절강성의 선도산인데, 중국고지도인 "주경도(州境宜)"에 따르면, 절강성 임해현의 '신라산'이다. 또 천하고금대총편람도에 따르면, 경주 바로 밑에 팔공산이 표시되어 있다. 팔공산 아래 '수' 지명이 있는데 이는 '천하고금대총편람도'상의 '경주'위치이다. 고려의수도가 개경이라면, 개경은 현재의 개봉이었을 때, 장안(지금 서안 : 섬서성)은 서경이었고, 이성계는 華山(섬서성) 아래 3년 간 도읍 하였다가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고, 한양이라 한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사실을 추가로 덧붙이자면, 섬서성의 화산 부근에 화양과 화양구곡(송시열의 건물)도 있다. 10CҌ14C의 조선사 속의 고려는 현재 반도 사람들이 제도권 교육을 통해 지식화 되어 알고 있는 것처럼 조그마한 스케일이 고려는 아니었다. 高麗史와 대륙 정사서에 쓰여져 있는 고려는 대륙1 만 리 강역에서 황도를 하남성 개봉(開封)으로, 동경(東京)을 낙양(洛陽)으로 서경(西京)을 섬서성 서안(西安:호경)으로 했던 황하지대의 황제국이었다. 때문에 고려 광종은 즉위 11년(960)에 개경(開京:開封)을 황도(皇都:황제가 자리하고 있는 나라의 중심지)로 고쳐 부르도록 했던 것이다. 993년에 요(遼)의 80만 대군이 고려에 침입하였을 때에 고려의 내사 시랑(內史侍郞) 서희(徐熙)가 단신으로 적장 소손녕(蕭遜寧)을 만나 외교 담판을 벌인 자리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고구려의 옛 국도(國都)였던 서경(西京)이 고려 영토로 포함되어 있다. 고구려 땅의 경계로 따진다면 요나라의 동경(東京)도 그 경계 안에 있다."고 반박하여 오히려 강동 6주를 회복하기도 하였다. 중국고금지명 사전에 따르면, 요나라의 위치는 섬서성과 섬서성의 서쪽 주변에 있다고 하였다. 중국인들이 편찬한 송사(宋史)에서도 고려는 본래 고구려라고 인식하여 '고려열전(高麗烈炩)'을 서술하였던 바, 이는 고려가 고구려를 승계한 국가라고 생각한 것이 당시 사람들의 역사인식이었으며, 이러

한 인식은 이후 명사(明史)에까지 이어졌고 고려는 서경(西京)에 고구려의 국조(國祖) 동명성왕(東明聖王)을 모신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개경(開京)의 동신사(東神寺)에는 주몽(朱蒙; 東明聖王)의 어머니 하백녀(河伯女)를 동신성모(東神聖模)로 모셨다. 이는 고구려 국모신 신앙과 제의(祭儀)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려 문종 시대에 전중국왕조 당나라시대의 안서도호부의 지명이 그대로 차용되면서 그 곳의 지진상황이 기록된 점이 대륙고려의 중요한 증거로 판단된다

* 1. 현종 (AD1009년~)

3년 11월 - 漣州 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15년11월 -金州 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금주는 현 감숙성 소재) 16년 4월 - 嶺南道 廣平,河浜 등10현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영남도는 호남성, 호북성, 하남성 일대) 慶州, 尙州, 淸州(10도중 중원도),安東,밀성 등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21년 2월 - 交州(10도중 삭방도),익령, 동산현에서 지진

2. 덕종 (AD1016~)

원년 10월 - 尙州(10도중 영남도)등 10여 현에서 지진이 일어남 2년 6월 - 安東府 峽州에서 지진

4. 靖宗(정종 AD1035~) 원년 6월 - 開京에서지진이 일어남 8월 - 개경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벼락 치는 소리와 같았다 .9월 - 慶州(영동도 -내몽고 감숙성)등19주에서 지진이 일어남 2년 6월 - 개경 및 동경 및 상주 광주 등 2개주, 안변부 관내 주현에서 지진이 일어나 가옥이 폐허로 변했다 동경에서는 3일 동안 지속되다가 그쳤다. 동경관 내 州縣, 밀성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마치 벼락치는 소리와 같았다.

3년9월 - 龜州,朔州,博州,泰州에서 지진이 일어나 그 곳에서 멀리 떨어진 鎭까지 위협했다

4.문종(AD1047~)

6년 2월 - <안서도호부>에서 지진이 일어남 ((<안서都護府>는 고려에는 관제가 없었고 당나라 때 도호부명으로 서역 지역인 티벳 투르판 등지의 실크로드 상 오지. 우리는 여기서 고려가 과거 당나라 때의 10도와 일치하고 당서부터 내려오는 안서도호부까지 총칭 고려의 관할지역 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12년4월 - 지진이 발생 20년4월 - 개경에 지진발생 27년1월 - 지진발생

5.선종(AD1092~)

9년11월 - 지진발생

6.숙종(AD1103~)

8년11월 - 개경지진...등 (하략)

위의 기록에서 보았듯이 고려라는 나라를 한반도로 상정할 때 10년도 안 되는 기간마다 큰 지진이 일어났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한 가지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개경에서부터 전국적으로 지진의 피해가 있었다는 것을 반도식민사관으로 볼 때 어떻게 설명하여야 하며 정종 때 보드시 경주를 포함한 19주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면 엄청난 지역인데 첨성대는 왜 아직까지 멀쩡한 것인지 궁금하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지진 다발지역이 개경, 경주, 금주, 안서 도호부등 소위 감숙성 및 신강성, 청해성, 위구르자치구 등이라는 것이다. 추론이지만 1976년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당산대지진은 무려 60만 명 이상이 사망했었으며 북경에서 150Km떨어진 내몽고 자치구와 접경지역이라는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 그리고 당의 재배 지역이었고 고구려명장 고선지 장군이 대회전을 치르며 활약했던 투르판 등이 안서도호부이고, 고려사에서 고려의 관할지역 안서 도호부의 지명과 고려10도의 지명인 嶺南道(현 호북, 호남, 하남성 일부)등이 고려사에 기록이 나온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왕경인 중주의 땅 한양을 설명하고 있는데 산하가 얽히고 기자의 땅이고 화산이 솟아있고 한강이 띠를 두른 형상은 장안(호경 지금의 서안)과 낙양과 개경(개봉)을 중심으로 이른바 패수(조선의 물줄기)를 묘사한 말이다. 한강은 한수(漢水)이고 후대에 황하라 하지만, 옛부터 중원 땅에는 인체의 허리부분을 두르는 띠와 같다 해서 대수(帶水)라 불리고 한양을 감싸고 돌아간다 하여 한수가 되었다 .황하의 이름은 수십 가지가 있고 또 토막토막 잘라 부여된 명칭이 많아 일일이 설명하자면 끝도 없다 그렇다고 한수는 황하만의 명칭이 아니다. 조선 후기에는 호북성 무한의 양자강과 합류하는 물줄기가 한수가 되고 서세동점에 따라 한반도에도 한강은 만들어진다. 조선의 중심지는 "낙양"이라고 분명히 지도의 문장에 쓰여 있다. 한반도의 어디에도 낙양이 존재했거나, 낙양의 근거가 없다. 낙양은 신라 천년의 고도 장안과 개경의 가운데 있으며 동관과 서관의 가운데 있고 경기도이며 관내도 중심에 있는 것을 어찌 해석할까? 그런데, 경기도가 결정적으로 고려가 대륙이었음을 알려주는 열쇠라는 것이다 . 당나라가 편제한 경기도에 섬서성의 서경(서안, 장안)이 있으며, 고려가 이를 다시 편제하여 고려의 지방으로 삼았다. 고려의 경기도에 나오는 지명을 찾다보면, 한반도에 위치할 수 없는 지명이 나오는데, 섬서성, 하남성(신라의 옛 강역)에 찾을 수 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개경주변에 6개의 적현(赤縣)과 7개의 기현(畿縣)이 설치되었는데, 1018년(고려 현종 9)에 이들 적현과 기현을 묶어서 왕도의 외곽지역을 정식으로 '경기(京畿)'라 부르기 시작했다. 본래 '京'은 '천자(天子)가 도읍한 경사(京師)'를, '畿'는 '천자 거주지인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사방 5백 리 이내의 땅'을 의미 한다 '경기'라는 말은 당나라시대에 왕도의 주변지역을 경현(京縣,赤縣)과 기현(畿縣)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고려의 패서도(浿潟) 즉, 경기도는 수도 서경(西京)을 관할하는 지방이기 때문에 당 태종의 경기도(京畿道)와 같을 수밖에 없다. 하남성 개봉에 가보면 송나라 시대의 시장을 복원해 놓았다는 곳이 있는데, 시장 한가운데 고려의원이라는 큰 의원이 있고 설명문에 쓰기를 고려와 송나라는 많은 교류가 있었고, 그리하여 일찍부터 고려의 의원이 와서 진료하였다고 한다고 기록하였다 김종무의 대륙 고려 설에 따르면, 하남성 개봉(송나라 수도)의 서쪽에 낙양과 장안이 있는데, 이곳이 고려의 수도이라고 한다. 게다가 대륙 고려로서 결정적인 증거는 절강성의 항주에서 일어난 홍건적의 난인데, 호북성, 하남성, 산동성까지 확대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와 TV 드라마에 따르면, 홍건적은 한반도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는 홍건적의 난에 의해 유린당하였다는 기록이 나와 있으므로, 반드시 하남성과 산동성 주변에 있어야 한다. 현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중국의 기록을 토대로 고려의 지경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 그러면 강화도로의 천도는 원나라의 압력에 못 이겨 대륙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씨 박씨 호족들의 지역에 고려 황실이 피난 와서 28년 간 강화도에 있다가 개성으로 가서 남은 161년 간 임시 수도에서 살았다고 보여 진다. 따라서 이씨조선의 강역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며 실제 지명을 대입해 보면 전체 만주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다음과 같다. 그러면 왜 현재 우리나라의 영토는 한반도 이내로 좁혀졌는가? 우선 원나라에 쫓긴 대륙 고려의 강화도 천도, 대몽 화친(황실 혼인 및 공녀)으로 개성을 얻음,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이주, 삼별초의 대몽항쟁 포기(이때 제주도에서 끝까지 항거하던 최우(崔禹)의 부장들의 성씨가 고, 양, 부 (高, 梁, 夫)였다. 그 다음에는 이씨조선의 병자호란을 그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위의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나라 초기만 해도 고려는 중원에 발을 붙이고 있었으나 점차 영토를 잃고 동진을 거듭했다. 이씨조선 인조 때 청태종이 남한산성으로 들어오기 전 영토는 아래 그림과 같다. 삼전도 항복이 있은 후 인조는 그 때만 해도 가지고 있던 만주지역을 청나라에 내어준 듯 하다. 당시 누루하치가 인조에게 꾸짖은 말은 "네가 조상의 도(삼신교)를 버리고 되놈들의 유교법(홍무예제 洪武巤制:명태조의 유교를 기본으로 하는 국법을 이조의 2대 왕인 태종이 받아드림) 받아드렸으니 징계를 받아 마땅하다" 라는 말이었다. 이조는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연해주와 만주 동북지역은 일본과 중국의 몽골 정통후예 말살정책에 의한 합작 결과로 밖에 볼 수 없다. 모든 빼앗긴 땅들은 복원되어야 하지만 우선 일제 36년 동안 이루어진 만주 동북 지역은 시급히 환수되어야 한다. 참고로 언어의 문제인데 주몽이나 최치원의 기록에서 보듯이 단어만 같으면 일년이 지나지 않아 말은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