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후삼국 시대(後三國時代, 892년~936년)

가 후삼국 시대의 태동

후삼국 시대(後三國時代, 892년~936년)는 중국의 농경문명에 한계가 와서 당나라가 멸망하기(907년) 15년 전 892년 군부 호족세력이었던 강소성 상주의 호족 이자개(阿慈介)의 아들 견훤이 광주(지금의 광동성 수도로 추정)를 점령하고 자신을 백제 황제라고 칭한 때부터 936년 고려가 중원과 한반도를 통일하기까지의 44년 간의 기간을 가리킨다.

* 이자개(阿慈介)는 원래 당나라 황실의 토호로 성이 이세민과 같은 이씨인데 이조가 그의 성을 아씨로 조작했음

구체적으로 보면 중국에서 9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는 2세기 동안은 진시왕 이후 천 년간 지속된 인본 농경문명이 만든 인간계급사회에 한계가 오고 이에 추종한 신라 역시 인간 계급제도의 극치인 골품제가 붕괴되는 시대가 오고 있었다. 즉, 당나라와 신라가 받들어 모신 황제라는 인본 신도 망하고 농사 중심의 사회도 붕괴되면서 토호들은 부패가 극심하여 국민들에게 과거 삼한 시대의 향수가 팽배해진 시대였다. 그러자 중국 동해안 지역의 과거 백제 땅이었던 강소성을 시작으로 반 농경 봉건체제에 대한 반항 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중심에 견훤이 있었다.

나. 견훤(甄萱)과 왕건(王建)

견훤은 당나라 황실 이연, 이세민의 가계인 이자개(아자개)의 아들

로 수나라 때 지역 태수들을 통해 백제 동성왕에게서 빼앗은 강소성 약탈지역을 할당받은 지방 호족 이자개의 아들이다. 견훤은 옛 백제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광주로 내려가 자칭 백제 황제가 되어 옛 대륙 신라와 백제를 통치했는데 그의 아비 아자개(阿慈介) 때부터 당나라 호족들의 학정에 시달려 오던 현지 백성들의 민심이 신라로 향하자 현지 뱃사람 수장인 수달의 조력으로 한반도 서 신라로 진출하여 경주로 쳐들어가 당시 아달랴 왕의 후손으로 박씨 계 왕이었던 경애왕을 죽이고 김씨인 경순왕으로 교체시키면서 옛 고조선의 땅 회복을 추진해 나갔다. 따라서 견훤이 신라의 군인이었고 경북 인근에 그의 훈련장이 있다느니 하는 말은 이조가 지어낸 말이다.

견훤이 대륙에서 시작했고 황해를 건너가서 경애 왕을 죽였다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자신에게 항거하는 상해 인근 광주 지역 민의 대부분이 옛 진한출신으로 민심이 신라에 있었다고 판단하여 신라만 점령하면 옛 신라 땅(대륙 신라)를 통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2) 경주를 공격하기 위해 남해안 도서인 진도(珍島)를 점령했다는 것은 중국 대륙을 출발하여 한반도 내륙을 공격할 경우가 아

니면 말이 되지 않는다. 진(珍)도 보물 진(珍)이 아니고 津(진) 으로 나루라는 뜻의 백제, 일본어이다.

3) 견훤의 경주 약탈이후 왕건과 전투를 벌인 곳도 대부분 옛 신라 땅이다.

고려 태조 왕건을 잘 살펴보면 이 책의 핵심인 이조의 고려사 조작의 이유가 확연히 드러난다. 왕건의 묘인 신라 황남 대총에서 은 현재 중국 사천성 성도에 있고 지역주민들은 바로 이 영릉이 가우리(고려의 중국식 발음) 황제 묘라고 하며 규모가 높이 15m. 직경 80m 묘실 23m로 아래 개성 묘(높이 2m.직경 8m 묘실 2.3 m)의 1000배에 달한다 그가 삼한 중 진한 인들의 남하 길목의 산악지역 출신임을 증명한다.

* 이조의 세종은 개성에 허술한 고려 역대 왕 묘를 모두 다시 만들면서 까지 고려사를 조작했다.

모두로 일설에 그가 당나라의 제11대 황제(재위 805∼820) 헌종 [憲宗] 의 손자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왕건도 당나라 황실 출신이고 이씨이다. 이조 기록에는 그의 할아버지 이름이 작 재건이라고 했으므로 당나라의 농경 봉건제도를 회복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나 아들의 이름 자체를 왕건(王建)으로 지은 점으로 보아 처음부터 삼한의 제사국가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그를 교육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 이러한 사실로 왕건은 당 헌종의 손자가 확실하고 그의 할아버지 헌종 때부터 수 ,당 시대의 농경 인본주의의 한계를 인식한 결과로 보이며 그 후 이조와 명나라가 양귀비, 안록산과 결부시킨 단 헌종 비하 기록의 이유도 알 것 같다.

따라서 당 황실은 시작 때부터 모두 왕건의 편이었다. 그래서 후삼국 초기부터 서안(장안성)을 포함한 중국 북부 지역을 왕건이 장악한 것이 이해가 간다. 다시 말하면 견훤과 왕건 모두 당 황실 또는 호족 출신으로 당나라의 비호를 받았으며 당나라의 회복을 목적으로 삼았으나 왕건의 경우 농경을 포기하면서 삼한의 포용하여 민심을 얻었으나 견훤은 농경도 포기하 않고 삼한(당시는 신라)을 주 적

으로 삼았다는 점이 다른 점이다. 문제는 이러한 배경을 가진 왕건이 왜 신라 계인 궁예 아래에서 성장을 했느냐 하는 점인데 이는 전체 중국 국민들이 선호하는 삼한의 나라를 회복해야 한다는 꿈을 강하게 가지게 된 대 기인된 것이다.

왕건과 그 후손들의 자연 친화적, 유교에 억 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는 샤머니즘적 사고는 그가 실권을 잡은 후 그와 그의 후손들이 취한 아래 조치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가) 결혼을 통한 전쟁 회피(평화주의 다중 결혼)

나) 광종의 과거제 실시

* 그 이전에는 평등한 과거제도가 중국에 없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과거를 보았다고 하나 특례였다고 볼 수 있다

다) 광종의 노비 안건법 제정

* 삼한시대에는 계급이 없었고 노예제도도 없었다

라) 수로 개척을 통한 전 국민 농사 강요를 지양하고 타고난 재능 별, 지역별 자연적 특산물의 생산을 장려하였다. 그래서 고려 자기, 고려 인삼, 나전 칠기 등이 나왔고 실크(신라금)로드가 나왔다. 보하이, 상하이, 문바이, 두바이까지 무역로가 개척되었고 인도 타골에 의해 동방의 빛이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다.

마) 종교적으로는 삼신교의 팔관회와 삼신교와 유사한 불교의 연등회를 동시에 장려하였다. 그러나 고려 태조 왕건의 이러한 샤머니즘적 정책은 농경 우선주의의 수, 당을 이어받은 명나라와 이씨조선으로 하여금 고려사를 조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다. 고려와 후백제의 전쟁

고려와 후백제의 전쟁은 먼저 견훤의 경우 호남성과 안휘성을 기반으로 산동성을 점령, 옛 백제의 땅을 확보한 후 삼한의 근거지인 신라를 점령하는 것이었고 반면에 고려는 대륙(서안)을 발판으로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면서 신라와 연합하여 황해의 해상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 금성 전투

견훤은 원래 중국 호남성 지역을 장악하면서 그곳 광주에서 황제로 등극을 하고 후백제를 선포한 이듬해에 진출방향을 산동성으로 돌려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903년에는 후 고구려 수군의 해안으로의 기습에 의해 금성(錦城, 호남성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빼앗겼다. 906년에는 상주 사화진 일대에서 패전하였다가 907년 일선군 이남의 10여 성을 장악하였다.

2) 대야성 전투

927년 견훤이 신라를 토벌하러 가기 전 왕건에게 빼았겼으나 928년

돌아올 때 다시 찾은 바 있다.

3) 견훤 경주 침략

- 견훤의 신라공격은 901년부터 927년까지 27년 간 계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신라가 고려와 연합한데도 기인하지만 양자강 이남, 소위 남만지역의 정서가 모두 삼한의 핵심인 신라를 섬기는 민족들이었으므로 그의 조상인 당나라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바다 건너 신라 정벌이 최우선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 901-907년 경주 침략의 해상 발판인 한반도의 서남 해안과 진도를 점령하였으나 908년에 왕건에 의해 도로 빼앗겼다. 견훤이 중국 해안에서 황해를 건너온 것이 아니면 왕건과 견훤이 한반도 서남 해안 끝에 있는 진도를 확보하려고 8년이라는 긴 시간을 소비할 필요가 없다.

- 927년 과거 대륙백제와 대륙 신라의 국경지역인 공산(公山,) 동수(棟藪,)에서 견훤이 왕건군을 기습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고 이 전투에서 왕건은 견훤에게 죽음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된다. 신숭겸이 그의 옷을 바꾸어 입고 대신 죽는 바람에 간신히 탈출 할 수 있었다.

- 이를 기화로 견훤은 산동 반도로 일사천리로 진격하여 해적 수달의 도움으로 한반도 경주로 가서 경주를 침략하고 경애왕을 죽였으며 그의 숙부인 경순왕을 대신 왕으로 세웠다.

4) 왕건의 고창 전투

930년 공산 전투에서 승리한 견훤은 교통의 요충지였던 고창을 포위하여 공격하면서 왕건과 다시 맞붙게 되었고, 이 전투에서 왕건에 크게 패하였다. 그 결과 왕건은 경상도 일대에서 견훤 세력을 몰아낼 수 있었다. 또한, 호족들이 왕건에게 귀속 의사를 밝히면서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왕건과 견훤의 전투 위치는 지도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