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역사 바로 잡기

가. 선사(언어)시대 역사 바로 잡기

현재 역사 기록은 문명시대 7천 년 만 포함시키고 그 이전 언어시대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나. 과학의 발전 이후 발견된 유적과 IT 발전 이후 연구결과를 토대로 언어시대 7만년을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언어시대를 포함시키지 않으면 인류의 집단생활 이전과 이후, 문명이 있기 전에 형성된 인간의 인간다운 생리적 기초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문명 이후의 역사기록도 기록의 승자 독식 원칙에 따라 살아남은 자가 유리한데로 거짓말로 기록해 왔으므로 믿을 수 없다. 언어시대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언어의 생성과 전파인데

1) 언어의 생성

언어의 생성은 7만 년 전에 루시의 후손 중 십 수 만년간 가장 고생을 하며 해를 따라 아프리카>중동>히말라야 회랑을 따라 이동한 한 무리가 바이칼 호수에 도달했을 때 일어난 최초 언어의 탄생 즉 창시자 효과를 들 수 있다. 이는 뉴질랜드 진화 심리학자 쿠엔틴 엣킨슨(프랑스 계)의 창시자 효과 이론괴 서울대 의대 당뇨전문교수 이홍규 박사(전 서울의대 학장, 전 세계당뇨학회 회장)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이동도(1996년)에서 증명된다.

2) 둘째는 이 언어의 전파이다.

이홍규 교수의 이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이동도를 보면 바이칼 지역에서 루시의 여성 유전자 미토콘드리아 이브가 사방으로 분산되었음이 확인되고 시기는 엣킨슨은 기원전 5만년으로 발표했고 우리 기록인 고려말 학자 이암이 쓴 환단 고기 삼성기 전 하권에는 한인

시대 존속 기간을 3.301년 간 또는 63.182년 간의 두 가지로 잡았으면서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한 데서 힌트를 얻어 이 때를 창시자 효과가 바이칼 지역의 한인들에게 나타났고 이 말이 사방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부도지(신라시대 박재상 씀)에는 언어의 전파에 관한 기록이 역시 인종의 분리 현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려 학자 이암이 쓴 삼성기전 하권은 한인의 나라 12연방을 통해 인간의 최초 언어가 전파된 범위를 시사하는데 수밀이국(수메르), 우루국(우르), 서납아국(인도), 동부 시베리아(구모액국, 매구여국) 페르사아(비리국), 중국(매구여국, 양운국) 일본(일군국) 한반도(매구여국)으로 동서 2만리 남북 오 만리였고 이 넓이 역시 고려시대 마니산 제사 기록에 반복되어 있다. 아리안의 이동은 서양학자는 기원전 2~3만 년 전에 인도 북부 초원에 기원전 1.2만년~기원전 7천년에 간지스강 유역에 있었고 박재상은 백소시가 파미르고원에서 서쪽 월식주로 갔다고 하나 사실은 언어 전파 인원이 서쪽으로 이동한 기록으로 보인다.

3) 언어시대 환경

이 언어시대는 우리 기록상 한인 시대 중 후자 63.182년 시대로 보이며 이 시대의 환경은 과학적으로 기원전 만5천 년 전부터 기원전 8천년까지 있었던 홍수이전 기간으로 지구 환경이 지금과 판이하게달랐다. 우선 중력이 지금보다 70% 이하이고 대기 압력이 더 낮아 사람을 비롯한 동식물의 크기가 훨씬 크고(사람은 3~4m) 신진대사가 느렸다.

4) 이 시대에 있었던 주요 사건

이 시대에 있었던 주요 사건은 인간의 가족단위 집단 생활, 불의 사용, 빗살 무늬 토기의 제작, 5대륙 등 주요지명의 통일, 벼농사, 군대의 구성, 제사장집단지도체제 형성 등이다.

이 시대 역사 기록 중 가장 큰 과오는 문명시대의 10배가 넘는 기간의 이 시대를 문명시대 기록에서 제외시켰다는 점이다. 인간의 언어와 말, 인간성의 형성, 기초적인 민족성이 형성된 이 시대를 문명사에서 제외시킴으로서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모르는, 그 저 문자의 헤택을 입어 욕구충족을 향해 달리는 방향 잃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설사 종교를 통해 그 방향을 찾아왔으나 종교 역시 인간의 생각에서 문명 적용의 한계를 모르는 인간의 작품에 지나지 않아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자연의 섭리를 넘지 못한다.

4) 언어 시대의 유산

언어시대 5-7만년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인간은 자연에서 나왔다는 자연중시 사상(양심)과 언어의 발전 및 이를 전달하기 위해 나타난 창조주에 대한 인식인 종교(샤머니즘), 벼농사. 군대와 무기, 사냥, 생리와 자연을 통한 건강법 등이다. 한국인에게 남아있는 언어시대의 가장 큰 유산은 아리랑 노래와 최초 인류인 한국인이 한국어로 그 뜻을 담되 특히 언어의 전파를 위해 창조주 하나님을 뜻하는 알이라는 단어를 넣어 지은 지구상 주요 지명의 이름이다. 예를 들면 알프스(알을 벗어남), 아틀라스(알이 틀렸어)산맥, 아틀란티스(인구의 반이 사생아,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 아프리카(알 뿌리가)아메리카(알서 멀리가), 알라스카(알서 새가)울알, 알타이, 알물, 알아랏(알을 알아), 앙알해, 알마하타(알 맡아), 알라, 이스라엘(있어라알), 알물(아무르강) 등이다. 그리스는 "그랬어" 그 나라에서도 우리처럼 "네! 네"라고하며 불을 맡은 신을 "푸로메테우스" 라고 한다. 이 글을 통해 한국인들은 자신이 원조인류이고 창의적인 생각과 행

동의 가능성이 가장 많은 민족임을 깨달아 서양문명이 초래한 이 처참한 현실을 타개할 책임을 통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 문명시대 역사 바로 잡기

문명시대 역사는 승자 독식 법칙에 의거 모두 승자에게 유리하게 조작된 거짓말인데 집단구성원의 이해, 즉 언어시대에 형성된 구성원 양심의 이해를 얻어야 하므로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이 거짓말을 바로 잡는 방법은 유적이나 과학적 추리로 그 합리성과 연계성의 실수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문명이후의 모든 인간끼리 정보 교환과 집단적 행동은 종교를 포함하여 모두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편익을 추구하거나 타 인류집단과 자연을 지배하기 수단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4대 문명 모두 일단은 인류의 편익이란 이기적인 발상에서 인간이 집단적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자손을 늘리려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문명시대는 기원전 만4천년 전부터 기원 전 8천년 전까지의 홍수기간이 끝나고 지면이 말라 범람의 위험이 사라지자 비옥한 곳에 모여 농사로 인구를 불린 종족들에 의해 만들어졌 다.

히말라야 동쪽 지방은 기원전4천년 경 요하와 양자강 하류에서 기원 전 3천년에 황하문명이 그것이다. 홍수이후까지 유전 된 언어시대의 유산은, 언어, 농경, 군대, 가족제도, 불의 사용, 사냥기구 등이다. 홍수 기간에 동방은 7천년 이상 한없이 계속되는 비와 계속 차 오르는 강물과 바닷물을 접하면서 바이갈 창시자 효과 지역의 고지대에 그대로 머문 일족(모한)과 언어를 창조주를 통해 인식시켜 인류의 영역을 넓히려는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높은 산을 따라 멀리 이동한 제사장 집단(진한)과 비옥한 지역을 찾아 강 유역에 머문 집단(번한), 즉 3한으로 나뉘어 졌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들의 삶의 방식에 차이가 생겼다. 이 때에 번한 지역에는 아프리카에서 해상으로 이동해 온 미개한 흑인 르완다 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번한인들은 이들을 농사를 위한 노동력으로 이용하였고 성경 상 노예제도의 기원이 된 것 같다. 중국어는 르완다 발음으로 상형문자인 한문이 생겨났다. 진한은 삶의 중심이 산이었으므로 언어의 중심도 산이 되었고 보이는 모양을 이름으로 하는 창조주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모한은 창조주를 답습하면서 평원을 중심으로 하는 언어를 가지게 되었다. 삼한은 본래 일한, 즉 한인들이었다.

삼한은 일한이고 일한은 최초의 창조주인식이 언어로 표현되어 바이칼에서 사방으로 전파된 공동체이다, 샤머니즘은 1700년대까지 에벤키족이 가지고 있던 이 최초 언어의 홍수 후 삶의 방식이었다.

홍수가 그친 후 지구상에는 인간 삶에 영향을 주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1) 중력의 2배 증가. 해수면 150m 상승으로 대륙의 연결이 끊어지고 아틀란티스, 요와구니등 많은 인간 터전이 해저로 사라짐, 2) 동식물 크기와 규모의 축소, 사람은 공룡의 크기에서 현재로 작아짐, 당시, 빅풋, 설이ㄴ, 닌겐 등이 있었다. 3) 신진대사속도의 10배 중가로 인간 수명 천년에서 100년 이하로 단축, 4) 저지대 농경 시작, 특히 비옥한 강 유역에는 인구 증가 속도 빨라짐, 5) 짧은 수명으로 종족번식 욕구 증대 등이다.

다. 한웅시대 역사 바로 잡기

이 때에 각기 군대를 가지고 벼농사를 하던 먼 곳 즉,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가 12연방에서 분리되었고 한국은 동방에서 3한으로 한정되었는데 지배력은 제사집단이 가지고 있었는데 인간 삶의 해답을 구하는 홍수이전 자연제사(천지인)는 빈번한 강우가 삶을 좌우하였으므로 천신제사로 변화하였고 강력한 군대를 통한?(공자의 6대손 공부의 증언) 지방군주 폭압 제지 역활을 수행하였다(걸왕의 폭거를 진압한 하의 기록)

천신 제사로 살아남았던 홍수 전제사장 집단은 기원 전 3.896년 요하 지역에서 홍수 이전의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변화되어 제사장 직을 계속했는데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농사를 해야하고 남자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웅시대에 곰 토템은 서양사람들의 추측이다. 번한 지역에서 농사를 통해 인구가 불어나기 시작한 소위 황하문명이후 한웅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2천 년경 제 14대 한웅 지오지(일명 치우, 민간 전승에는 도깨비) 번한의 집단농사, 인구 폭발 지역에서 한웅의 제사권에 반발하여 삼신도, 천신도 필요 없고 인간 노동력만 있으면 된다는 뜻으로 모인 헌원의 무리에 의한 반란이 일어났고 이때 치우와 헌원의 전쟁을 탁록 전투이라고 한다. 치우 이후 번한은 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

왔고 기원 후 2천년 동안 정권이 73회 바뀌는 등 힘 만 있으면 뺏으면 주인이고 내 것이라는 뙤 놈 근성이 생겨났는데 호남인의 근본은 배타고 그곳에서 온 사람들이다. 반면에 우리는 정권이7회 바뀌었다. 김대중은 산동성 제갈씨 집성촌에서 온 어민으로 하의도에 와서 살단 죽은 제갈성조의 부인 장씨와 제갈성조의 형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인데 중국식으로 힘을 추구하면서 한반도 남쪽을 유린하고 갔다. 이 전쟁 이후 번한 사람들 중 지배계급인 선비족들은 자신들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벼의 자식의 의미인 나무 목 변에서 난 아들인 이(李)라는 성을 갖게 되었고 원래 2한 사람들을 해와 달에 제사를 지내고 물고기와 양을 키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의미로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탁록 전쟁이후 한웅의 제사권은 무위로 돌아가고 중국사람들은 잔신들의 수장을 왕 위에 있는 분이라는 뜻으로 황제라 불렀고 심지어 그를 천자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한웅이 곰 토템이라는 주장은 남성을 뜻하는 웅(雄)씨를 곰 웅(熊)으로 중국인들이 바꿔 부른 것을 서양 사람들이 답습한데 지나지 않는다.

탁록 전투 이후에 번한은 독립해서 중국이 되었고 동방의 역사 기록도 중국 중삼이 되었으나 중국인들 정서에 삼한의 습관과 전통은 그대로 남아 있다.

중국인들이 치우와 64명의의 형제를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부른 점으로 미루어 철기시대가 기원전 1200년이라는 학설은 틀린 학설이다. 이 때부터 동방은 중원 제국(하,은,주)이 그외의 동방은 고조선이 되었다. 또 중국인들은 그들의 시조를 헌원과 황하 농사 신 신농씨 그리고 제 5대 한웅인 태호 복의씨 태우의(太虞義)한웅를 들고 있으며 최근에는 치우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우기고 있다. 뙤놈 버릇이다. 한웅시대의 이름을 배달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벼농사와 함께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나라 볏알>배달이라는 뜻이므로 물건을 배달(配達)하는 속된 의미로 사용하여 우리 자신을 추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다. 단군시대 역사 바로잡기

단군의 나라는 처음(기원 전 2.333년)에는 헌원의 황하농경지역을 제외한 동방 전 지역이었으나 진시왕에 이르러 기원 전 290년 경 만리장성 북쪽과 중국 동해안으로 줄어들었다. 국호는 처음에는 3한이라고 불렀으나 44세 단군 구물 때 홍수가 크게 난후 삼한을 3조선으로 국호를 대 부여라고 불렀다. 부

여는 고조선이고 북쪽은 북부여 중간은 동부여, 또는 중부여(백제) 남쪽은 남부여(기원 후 501년 고구려 문자왕 4년 당시 고구려 땅이었던 한반도로 피난 와 그 후에 신라)라고 불렀다. 단군 시대는 홍수 이전 한인시대(언어시대=아리랑시대)의 전통을 이어 자연에 순응하면서 제사장을 중심으로 천지인을 경외하고 삼신에 제사를 지내면서 살아오던 원조 단군의 나라, 조선과 폭발한 황하 인구를 중심으로 농경을 발전시켜 인간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계급과 유교를 통해 전쟁과 침략을 통한 억압과 수탈을 일 삼아 온 인본주의 유교 국가인 중원 패자국가가 동시에 존재하던 시대이었다. 단군의 지역은 평화로웠고 의식주개선 공동생활을 위한 규범(거짓말과 탐욕 제지. 효도, 동정과 나눔강조), 폐제조, 상형문자해독을 위한 가림토 제작 등 더 나은 삶을 추구했으며 중원은 벼농사 이외에 권력쟁탈전이 끝이 없었다. 이 때까지 단군의 지역에는 국경 개념이 없었고 사는 곳이 집이었다가 단군위 자손들은 점처 중원 농경지역을 벗어나 중국의 동해안과 한반도, 일본으로 퍼져 살았다. 황하 유역의 제후 국가들은 한웅 시대까지는 한국의 제사권에 복종하였으나 탁록 전투 이후 점차 반발이 심해졌고 그들은 자신들의 군대로 지경을 넓혀왔으므로 44세 단군 구물 때(BC 425년)에 지경을 버 농사를 짓지 않고도 자연에서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지역인 중국 동해안, 모한 지역., 한 반도 동쪽(일본 포함)으로 한정하고 국호를 뿌리라는 의미를 가진 대부여(大夫餘)로 바꾸었으며 제사권도 분할하여 모한 지역과 한반도를 북부여 산동 반도지역을 중부여(자신들은 그냥 부여라고 부른다),상해 일대를 남부여로 하였다.

지금 2017년에도 상해 인근 촌락에서는 "빨리 가자"라는 말을 중국어로 "콰이 라이"(快來)라고 하지 않고 "어서 가자"라고 한다.

단군조선 말기의 역사를 단군세기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고구려의 실체와 백제, 신라의 기원과 어떻게 중국에서 한반도로 왔는지 더 명백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기원전 2천년 이후 2천년간은 황하유역(당시는 희대 戱臺라고 불렸음)의 제후들이 바이칼한국의 수 만년 제사권에서 독립하여 인본주의 농경 계급국가로 독립하려고 발버둥치던 시기였다. 한웅 시대의 치우에 이어 단군 조선 시대에도 조선군대에 의한 희대 지역 정벌이 계속되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제후들의 군사력이 강해져 44세 단군 구물29년기원 전425년 3한을 대부여(부여는 뿌리라는 의미)로 이름을 바꾸고 국호를 조선으로 하면서 북쪽을 북부여, 중간 지역을 중부여, 남쪽을 남부여로 나누고 제사권과 군권을 이양하였다. 그러나 중국제후들의 제사권에 대한 위협이 계속되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백제의 경우 BC 341 46세 단군 보물 때 번왕 해인이 연 나라 자객에게 시해된 것이었다. 단군조선의 멸망에 관해서 기원전 238년 47대 단제가 스스로 제사권을 버리고 신선이 되었다는 단군세기의 설과 기원전 194년 연나라에서 이주한 위만(衛滿)이 고조선의 왕인 준왕(準王)의 왕위를 찬탈하고 준왕은 한반도 익산으로 도주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기원전 2~3세기에 제사국가가 사라지고 중국에 제후 국가가 창궐한 점(춘추전국시대)은 확실하다.

라. 삼국시대 역사 바로 잡기

삼국시대 역사는 신라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봐야한다. 남부여였던 신라는 북위가 북경에 들어오자 겁먹은 중부여(백제) 동성왕(24대)이 먼저 수나라 태수들에게 치리권을 내어주자 개로왕(智證王, 437년~514년, 재위: 500년~514년 신라의 제22대 왕 지대로왕, 성기가 큰 왕)이 가신들을 이끌고 고구려 문자왕 4년에 고구려 땅인 한반도로 망명해 왔다(삼국사기 참조), 삼국시대의 모든 전투는 모두 옛 고조선 땅을 당나라에게 내어주기 위하여 나당이 연합하여 중국 동해안의 신라와 백제의 국경(황산벌)에서 또는 백제와 당의 국경(사비성),고구려와 당의 국경(요동성)에서 싸운 전투이다. 신라는 중국 동해안의 옛 고조선의 땅을 모두 당 나라에 갖다 바치고 대신 고구려 땅이었던 한반도로 도망 와 안전하고 살기 좋은 곳에 터전을 잡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후 인본주의 문명주의자들의 칭호인 왕을 쓰고 그들의 법과 제도를 본받으면서 7만년간 내려온 삼한의 전통도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박용숙 교수의 이론(6세기영 한반도 샤먼 유적의 증가)이 맞다. 신라의 통일전쟁은 모두 한반도로 피난 온 백제 인들과 고구려 유민들을 복속 시킨 과정에 불과하다. 김씨들은 금속 도구의 선점 잇 점을 도구로 박씨 신라를 아달랴왕(신라 제8대 왕 ?~184 그의 집단은 앗틸라라는 이름으로 양자강, 차마고도를 따라 계속 서진하여 나중에 훈족, 사실은 한족이 되었다)에게서 빼앗았고 이를 만회하고자 선비 족(조선의 노비라는 의미)이 중원으로 쳐들어오자 재빨리 한반도로 도망 온 것이다.

마. 고려시대 역사 바로 잡기

고려는 당 황실(번한)에 흘러 내려온 두 가지 사조 하나는 인본주의 왕조이고 하나는 자연주의로 표현되는 사머니즘(삼한이즘) 왕조이다. 당의 중앙집권적 지방제후(모두 선비 족 이씨)에 의한 노예 중심적 집단 농경체제가 실패하자 선비 족 이씨인 당 헌종의 증손자이며 사천성 성도에서 불우하게 자란 왕건이 신라(궁예)와 북쪽 사먼 종족(양길)을 등에 업고 샤먼(삼한)을 복원한다는 구실로 성씨를 벼에서 난 자식이라는 뜻의 이(李)씨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제사장이라는 뜻인 왕(王)씨로 바꾸고 고조선(대부여)의 밥통을 이어받는 신라와 함께 고조선의 남은 뿌리인 중국 동해안의 백제와 북쪽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복속 시킨 삼한 통일의 역사이다. 그래서 2천년 대인 현재 중국인구13억 중 이씨가 3.6억이고 왕씨가 1.8억 도합 5억 4천이다. 중국 중심의 3한 통일은 신라가 한반도 땅을 얻는 보증으로 당과 함께 조선을 배반하여 얻어진 결과로서 진 조선은 한 반도에서 명맥만 유지되게 된 것이다. 명맥유지가 옳으냐 국토유지가 옳으냐 하는 문제는 인류가 멸망할 때라야 판명된다. 당시 신라는 상해부근의 대륙에도 영토가 있었고 한반도에도 영토가 있었는데 고구려가 멸망되어야 한반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백제와 신라가 싸운 공산성은 상해 북쪽에 있고 왕건과 견훤이 서로 삼한의 근거지에 들어가려고 서로 견제하던 지역인 진도는한반도 서남 끝에 있으며 대야성은 북경이고 백제 의자왕과 그의 아들 풍의 묘지는 북경북쪽 북망산에 있다. 또 후백제 견훤은 호남성제후 이자게(아자게)의 아들로 같은 이씨이고 신라와 싸운 것, 경주로 쳐들어 간 것, 모두가 신라와 고려의 야합을 둴에고 땖 고조선의 땅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의 삼한 역사는 이씨를 따르던 일부 선비 족(이성계)와 그의 후손)들과 명나라 주원장(주씨 역시 나무 목(木) 변(邊)

으로 인본주의, 유교주의, 국가주의, 권력주의, 계급주의자로 중국선비족의 심성을 그대로 이어받은자) 의해 철저히 소멸되었고 그래서 현재 중국에는 인본주의 심성(숫자가 최고)만 남았고 인류의 근본인 삼한의 전통은 한반도에만 남아 있다. 이제야 삼한의 수만 년 전통인 학정에 대한 하늘 군대의 징계로 보이는 몽고 군대가 왜 같은 삼한인 고려를 침략했는지 이해가 간다.

바. 이조시대 역사 바로 잡기

이성계는 선비(조선의 노예로 탁발을 했던 종족의 후예로 졸본 지역에 살았음)족 출신으로 후에 중원에 와서 북위, 수, 당을 거치면서 황하 농경을 거쳐 종족을 번식시긴 당나라 원조 이세민의 가지이다. 그의 고조부 이안사(?∼1274)는 무장으로 당나라가 고려가 된 후에 만리장성을 지키는 통문장 직을 수행하다가 몽고가 처 들어 오고 고려 고종이 황하하류를 거쳐 강화도로 피난하자 휘하군대와 제4통문 지역(산서성 편관, 쌍성)의 여진족 5천 여명을 이끌고 몽고로 투항한 후 군대의 중간 지휘관으로 국경 경비를 맡았던 사람이다. 이안사에 이어 증조부 이행리, 조부 이춘 등은 계속해서 원나라 군대의 중간 지휘관 자리를 승계하며 살았다.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李子春)도 상성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이성계도 중국 산서성 편관 쌍성에서 태어났다. 이성계는 인본주의적 유교의식이 강한 선비 족의 무장으로 기회와 변절에 능하며 중국의 문명에 동화된 명나라 주원장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다. 이성계는 지신들이 수 만년 조선의 노비로 살았던 원한을 조선법통을 이어 받은 한반도에 와서 풀려고 이름을 이씨조선으로 바꾸었다. 유교와, 양반제도, 선비, 충효예의 충, 명에대한 무조건 사대주의 등은 모두 이러한 생각의 반영이다. 이조의 가장 큰 역사적 과오는 자연주의(삼한의 전통)을 없애기 위한 역사 조작은 물론 고려의 역사를 아예 중국에서 지운 것인다. 그들은 고려를 지우기 위해 후삼국시대부터 있었던 모든 전장을 한반도 안으로 조작텖는데 가장 큰 공은 세종(이도)에게 있다,. 그는 고려사절요는 물론 공산성, 대야성, 십리천 전투는 물론 부여의 위치 의자왕의 무덤까지 한반도로 조작했고 모든 고려의 왕과 인물들을 폄하 했다. 남여 평등, 기회 평등의 사회를 양반, 쌍놈의 계급 사회로 만들로 서원을 지어 유교를 모르고 선비(자신들의 종족 이름)가 되지 않으면 사회 진출을 금했다. 이도(세종)는 조선의 정신을 중국화 하는 것 즉 천자문을 만들기 위해 한글을 창제했다. 수 십년 간 밤낮 없는 조작을 위한 공사(예 전주 공산성(200m길이인데 실제는 상해 북쪽에 4~ 6km 가 넘는 성곽이다)을 만들고 왕건과 견훤의 무덤을 만드는 등(왕건의 묘는 사천성 성도에 궁궐 만한 크기로 있다) 고된 일로 말년에는 조갈증(당뇨)에 걸려 죽었다. 조작의 명수를 떠받들고 있다. 이조는 이 땅의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이 나면 도망가고(선조, 인조) 나라는 의병과 이순신(덕수 이씨)이 지켰다. 이완용, 이병도 모두 이씨다. 5천년 중국의 선비 족 이씨가 없애려던 한반도의 7만년, 언어와 양심, 자연 사랑, 홍익 인간의 정신은 없애지 못했고 약 260만 명의 전주 이씨만 살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