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십자군 전쟁과 유대인

가. 이슬람의 등장 배경

이슬람이 등장한 시기에 서구에서는 1) 예수의 탄생부터 2) 유럽의 기독교화 및 3) 게르만 민족 국가의 틴생이라는 역사적 경험이 있었고 동방에서는 1) 고조선의 몰락, 2) 춘추 전국시대. 수, 당, 송나라를 거치면서 3) 유교와 불교가 번성하였다. 특이한 것은 이때에 북방 흉노족의 분열과 당나라 때 고선지가 서역을 정벌한 사건(751년)이 있었다. 당시 중동에서는 셀죽 투르크가 일어났는데( - 1.157년) 십자군 원정은 1200년 경( - 1.270년) 기독교의 발상지인 예루살렘이 이교도인 회교도에게 점령당해서 서양 기독교 국가들이 제각기 성지 회복에 나선 전쟁으로 이 이교도는 서양의 기독교의 중동 침투와 동방 불교, 유교의 중동 침투에 밀린 중동지역 유민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원래 페르시아 영토를 서방과 동방이 공격을 하여 방어적으로 생긴 일이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 땅을 하나님을 핑계로 뺏은 것과 같은 이치에서 생긴 것이다.

나. 마호메트의 등장

6세기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중심한 비잔틴왕국과 이라크를 중심한 페르시아 왕국이 있었으며 이 두 왕국과 문화 사이에는 많은 무역교류가 있었다. 당시 에티오피아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예맨에 기독교를 전했으며, 그곳에 주교가 거주할 정도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또한 많은 유대인들이 상인의 무리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특별히 Mecca는 상인들의 무리가 Syria(Gaza)로 가기 위해서 반듯이 거쳐야 되는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두 왕국 사이를 오가며 무역을 했으며 이것은 먼 여행길로 많은 위험과 함께 엄청난 부를 상인들에게 안겨 주었다. 따라서 이들은 여러 종류의 다신과 함께 유목생활을 하면서 지냈고, 이러한 생활 풍습은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 양식의 변화와 함께 당시의 사회적인 많은 문제점을 낳기도 했다. 예를 들면 당시의 전통으로는 씨족 안에 가난한 사람이나 노약자들을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부익부 빈익빈 형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었다.




 

 

■ 570 - Muhammed는 당시 Hashim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상인 무리의 우두머리였던 것에 비해 그의 아버지는 그리 상업에 뛰어나지 못했었고 "Al-al-Muttalib"는 Syria에서 돌아오는 길에(Medina) 세상을 떠났고, 그때 그의 어머니(Amina)는 Muhammed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후 570년 Muhammed가 출생했고 그가 6살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 마저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가 그를 양육했다. 그러나 다시 2년후 그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삼촌(Abu-Talib)이 그를 책임졌다.

■ 595 - Muhammed가 성장한 후 그는 삼촌 상선을 따라 Syria여행을 했고 그러던 중 부유한 상인의 미망인 "Jhadiha"를 만나 그를 위해 일하던 중 Muhammed의 나이 25세 그녀의 나이 50세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 당시 그녀는 6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2명의 아들이 죽고 4명의 딸이 있었다. 그후 Muhammed는 종종 생각에 잠기곤 했는데 특별히 그는 매년 Mecca 부근에 있는 "Hira"산의 동굴에 들어가 묵상에 잠기곤 했었다. 그는 또한 그 당시의 사회적인 여러 가지 현상, 여러 신을 섬김, 심각한 빈부의 격차 등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 610 - 그가 40세가 되었을 때 그는 하늘로부터 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 "암송하라. 피덩어리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주님을 암송하라. 풍성하신 주님, 펜으로 가르치신 분, 사람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가르치신 분을 암송하라." 이것이 그가 코란을 기록하게된 동기가 되었고, 이슬람의 출발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에게 나타난 현상들에 대해서 많은 날 동안 번민을 했으며 성경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을 지니고 있었던 아내의 친구로부터 조언을 듣기도 했었다.




 

그 후 Muhammed는 자신에게 나타난 형상과 일들을 주시하는 가족들로부터 적극적인 동조를 얻으며 제일 먼저 그의 아내가 첫 번째 모슬렘이 되었고, 삼촌, 9-10명의 아이들, 아내의 몸종과 Muhammed의 절친한 친구가 모슬렘이 되어 그를 따랐다. 이로서 가족들을 통해 그의 가르침을 확산하던 중 613년부터는 공적인 장소에서의 가르침이 시작되었고 약3년 후 그는 다시 Allah(알라)의 음성을 들게 되었다. 그리고 39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매일 같은 시간에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그후 그는 그의 가문으로 부터의 반대에 부딛쳐 주변의 도시로 피신했었으나 그곳에서도 역시 반대를 받아 위험을 무릅쓰고 고향 Mecca로 되돌아 왔다. 621년에는 그를 만났던 5명이 다른 7명과 함께 최초의 회심자가 되었고, 620년에는 Medina에서 6명이 Muhammed를 찾아와 그와 합세했다. 그후 그는 그의 수종자와 12명을 Medina로 보내 750명의 개종자를 얻었 두 번째 회심자가 되었다.

■ 622 - Muhammed는 Mecca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혀 Medina로 이주했다. 그곳은 Mecca에서 북쪽으로 약400Km 떨어지 오아시스로 이슬람이 성장하는 중요한 환경적인 요소를 제공했다. Medina에는 아랍상인 그룹과 유대상인 그룹 사이의 싸움으로 사람들이 평화를 갈망하고 있었으며 유목민들이 정착하면서 도시의 도덕적인 윤리가 흔들이고 있었다. 이것은 Medina 사람들이 Muhammed를 받아들이는 환경적인

배경이 되었다. Muhammed 역시 그곳에서 유대상인들과 싸움이 있었고 이것을 계기로 그의 가르침이 바뀌게 되었다. 그는 이전에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은 같은 음식 습관과 풍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형제요 친구라고 했었으나 이후에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적대시했다. 또한 이전까지는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었으나 이후에 는 Mecca를 향해 기도하도록 했다. 그래서 아직도 Medina에는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기 위해 표시해두었던 것이 가려져 있고 다시 Mecca를 향해 표시되었있다. 또한 Muhammed는 Mecca를 떠나기 전 모슬렘 과부가 이교도에게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결혼했으며 그 후에도 Medina의 거상의 두딸들과 결혼했으며 다른 모슬렘과부들과도 결혼했다. Muhammed는 Medina에서 건축했던 집은 그와 그의 가족들이 Mecca로 옮긴 후 Central Mosco가 되었다. 그가 Medina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으나 그들중 대부분은 다른 지역으로부터 피신해온 사람, 상인들 속에서 힘을 얻으려는 사람 등 다른 목적으로 그에게 접근한 사람들이었다.

 

 

 

 

 

■ 630 - Mehammed는 Mecca를 향한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Mecca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623년), 다시 300여명의 군사를 직접 지휘하여 Mecca를 정복했다.(그러나 한때 그는 그곳에서부터 산속으로 피신하기도 했었다.) 이로서 그는 Islam에 Pilgrim제도(성지순례)를 확립했다.

629년 Muhammed는 Mecca에 Umra(?)를 만들었고 또 그는 "Kaba"에 있던 많은 신상들을 제거해 버림으로 상인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 후 Muhammed는 시리아, 이라크를 향해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 632 - Muhammed가 사망.

■ 632-634 Alb-Bakr가 모슬렘의 수장으로 2년 동안 지내면서 모슬렘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제압해 나갔고 Muhammed의 가르침들을 모아 "Qur'an"을 만들었다.

■ 634-644 Umar가 수장으로 있으면서 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 644-656 Othman이 수장으로 북아프리카, 사이프러스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며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다수의 문건을 "Qur'an"으로 단일화시킴.

Muslim이 페르시아 왕국의 쇠퇴와 함께 Zoroastrian이 있었던 이란을 정복하고 중앙 아시아. 북서 인도에 까지 세력을 확장시킴(652).(이 전쟁은 Islam의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의도보다는 상인들의 상권과 안전을 보호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함?)

■ 656-661 Ali가 수장으로 있으면서 Muhammed의 조카와 사위들 사이에 수장권의 계승에 대한 심각한 분쟁이 일어나 "Shiites(시아파)"가 생김. 지금까지 선로 선출하던 수장을 Muhammed의 자손으로 제한하여 계승해 나감. 그는 정복에 치중하지 않았으나 후반에는 북아프리카, Mosoko를 정복했다.

 

 

 

 

 

 

■ 661-750 시리아의 Umayyid가 수장으로 스페인까지 세력을 확장함

711년 Muslim은 스페인의 Visigothic왕조의 Roderick왕과의 싸움에서 승리했고, 중부 프랑스까지 그 세력을 펼처 나갔다.

■ 732 - 프랑스 중부 Tours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 더 이상의 확장이 중단되었다(-759년 까지)

■ 750-1258 바그다드의 Abbasid수장의 주장으로 의약(Alcohol을 발견)과 과학의 연구에 주력함.

■ 850 - 모슬렘으로의 개종보다는 세금의 징수에 치중하는 평화적인 확장에 주력하며 상인들이 중국과의 Slik Road 무역이 시작됨.

■ 873 - 12번째의 Imam이 5살 때 사라짐. 모슬렘은 그가 하늘로 승천했으며 심판 때에 다시 온다고 함.

■ 975 - 이집트의 카이로에 최초의 이슬람 대학 "Azhar"를 건립.

■ 970-1080 시리아의 Seljuk(터어키출신)이 팔레스틴, 이라크를 다스리면서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을 인정하며 세금을 징수하던 것에서 강하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따라서 성지 순례가 불가능하게 됨.

 

 

 

 

 

 

 

 

■ 1058-1111 Al Ghazzali이 이슬람을 철학적 논리적으로 체계화함.

■ 1096-1099 비잔틴의 성지 순례자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팔레스틴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파견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을 점령함.

■ 1171-1187 Saladin이 모슬렘 왕국을 제건하여 팔레스틴과 이스라엘을 점령함.

■ 1220 - 몽골의 징기스칸의 공격이 시작됨

■ 1300 - 수장의 아들이 다시 스페인으로 피신해 스페인을 이슬람 왕국으로 만들어 1031년까지 통치했고 그라나다는 1492년까지 통치했었다. 모슬렘이 대부분의 스페인을 빼앗김.

■ 1280-1480 몽골이 이슬람을 받아 들였고 모슬렘들은 인도네시아에까지 무역과 Sufi이슬람 선교사는 벵갈과 카자크스탄에 까지 갔다.

다, 십자군 전쟁과 유대인

11-13세기 농민들의 십자군 참여와 특히 빈농들의 참여는 어떠한 계기로 이루어지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대부분의 기사들이 그러했듯이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열정이었을 것이고 그 이면을 살펴보면 땅을 찾아서 혹은 십자군에 참전한 농노들에게 자유를 보장한다는 교황의 약속 때문이었을 것이다. 11세기 이전의 경제는 근본적으로 장원을 중심으로 한 자급 자족적 농촌경제체제였고 상업은 전반적으로 저조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중세의 상업이 침체의 늪을 벗어나 농촌적인 중세의 경제와 사회에 환기와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인구와 생산이 획기적으로 증가하는 11세기부터였다. '상업의 부활'이라고도 불리는 11세기이후의 상업발전은 그 이전시대와 비교할 때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11세기 이후 원격지 상업은 농촌경제의 성장에 힘입은 서부 유럽 경제의 발전과 귀족계급의 사치품에 대한 수요 증대 그리고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을 배경으로 하여 지중해권과 북유럽권에서 크게 발달했다. 지중해 지역의 원격지 상업은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이 주도했다.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와 피사가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일찍이 베네치아는 고대부터 발달된 무역과 도시의 활기가 유지되고 있던 콘스탄티노플에 식량을 조달하고 이슬람 지배하의 시리아와 아프리카에 노예 철 목재 등을 수출하여, 동부 지중해의 교역 중심지적 역할을 담당했다. 베네치아 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11세기에는 아드리아 해의 해적을 소탕했고, 아드리아 해와 이에 접한 지중해를 장악했으며, 비잔틴 제국 내 여러 곳에 사법적 특권이 부여된 식민지를 건설하여 아시아와의 수송을 사실상 독점했다. 피사 인들은 11세기에 티레니아 해와 시칠리섬 주변 해역에서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었다. 1096년에 시작된 십자군 원정에서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 등의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은 군대와 군수품 수송을 독점했고, 레반트와 예루살렘 지역에 상업거점을 확보하여 교역했다. 이 당시 유대인의 유입을 국가별로 살펴보면 이탈리아에서는 데오도릭 대제(454-5B6)는 로마, 나폴리, 베니스, 밀라노와 새 수도인 라벤나에 유대인을 불러 정착하도록 했다. 이 유대인은 상인, 은행가, 법률가, 농부, 보석상, 예술가 등이었다. 유대인의 이주는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같은 경로를 밟았다. 샤를마뉴 대제는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을 그의 제국으로 불러 들였다. 특히 그는 유대인들이 도시에 정착하여 산업을 일으키고 상업지역을 확대시키기를 원했고 그래서 유대인에게 자치 윤허장을 주었다. 이 같은 특별배려는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봉건제도는 3가지 계층-싸우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일하는 사람-만을 제공했고 상인계층은 여기에 없었다. 이 계층은 유대인들에게 개방된 영역이었다. 유대인은 중세 기독교와 봉건제의 어느 부분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들이었으며 왕과 교황은 이러한 이교도인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정책까지 펴게 된다. 그 예로 피핀과 샤를마뉴는 유대인에게 토지소유를 허락하였고, 기독교도 노동자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이들은 유대인을 개척민과 군인으로 활용하고, 유대인들의 상업활동을 장려했다. 프랑스의 경건왕 루이도 유대인들의 상업활동을 장려하고, 새로운 유대인 회당 건립을 허용했다.

 

 

 

 

 

아울러 유대 상인들의 보호를 위한 특허장을 발행하고, 유대 안식일을 휴무일로 정했다. 반면에 538년 오를레앙 공의회에서는 유대인의 포교활동을 제한하는 법이 선포되었다. 이 공의회는 기독교도와 유대인의 통혼을 비난하고, 기독교도가 유대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금했으며, 기독교도에게 유대의 안식일을 거행하지 말 것과 일요일에 일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유대인과 기독교도가 성주간에 함께 어울리는 것을 금했다. 이후 일련의 공의회에서 이러한 규제들이 거듭 확인된 것은 유대인이 기독교도를 유대교로 개종시킬지 모른다는 기독교 성직자들의 우려를 말해준다. 9세기말 프랑크 왕국에서 열린 공의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목적을 지닌 법령들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령들에는 유대인 회당 신축 금지, 기독교도를 관장하는 고위직에서의 유대인 축출, 유대인의 기독교도 노예 소유 금지, 유대교 포교활동 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유대인과 함께 식사하거나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는 기독교도에게는 처벌이 내려졌고, 유대인과의 통혼이 금지되었다. 실제로 유대인과의 통혼은 간통으로 간주되었다. 서고트족 치하의 스페인에서는 유대인을 척결하기 위한 매우 잔인한 법들이 제정되었는데 '하느님의 신의를 저버린 사람들에 대한 기도교도의 증오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유럽 대부분의 게르만 왕국에서 유대인은 상인이며, 의사며 외교관이며 군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많은 게르만 왕들은 유대인을 자신들의 왕국을 구성하는 다양한 종족 중에서 자신들의 법률을 받는 한 종족으로 대우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유대인은 중세 초부터 자신들의 법의 지배 하에 살면서 점차 번성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유대인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11세기에 일어났다. 유대인의 사주를 받아 사라센들이 성묘를 파헤치고 예루살렘 대주교를 참수했다는 소문이 1010년 무렵 서유럽에 떠돌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서유럽 여러 지역에서 유대인이 대량 학살되었다. 반유대 감정이 반이슬람 감정이 형성되는 것과 같은 시기에 형성되었다. 천년이 지나감에 따라서, 기독교 세계는 팽창국면에 돌입했고, 새로운 종교적 열정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내적으로는 개혁과 외적으로는 십자군 성전을 통해 세계를 기독친화 하려는 노력이 이루어 졌다.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B세가 십자군 성전을 선포한 후, 종교적 발작 분위기가 유랑 설교가들에 의해 조장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유대인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1차 십자군 이래로 반유대적 박해는 위험스런 전염병과 같은 전파력을 발휘하였던 바, 이것이 극도의 정서적 긴장기에는 민족적 경계를 초월한 대중적 정신병으로 변질되었다. '이처럼 중세 민중들의 반유대적 폭력의 파도가 밀어닥치고 있을 때 교회와 세속당국의 반응은 대개의 경우 유대인을 돕는 것이었다. Speyer 대주교는 자신의 성채를 유대인의 피신처로 제공하고 유대인을 공격한 혐의가 있는 반대자를 처벌하였다. 시민들도 주교를 지지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이 정착하여 시가 부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관계당국에 유대인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강제로 세례 받은 자신들의 신앙으로 복귀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잉글랜드의 월리엄 2세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십자군 설교를 할 때마다 유대인 대량학살이 재현되었다 일부 수도사들은 십자군을 설파하면서 이슬람교도에게로 진군하기에 앞서 예수그리스도를 살해한 자들에게 복수할 것을 청중에게 촉구했다. 이처럼 대대적인 십자군 운동기는 중세의 나머지 시기의 모형이 되었다. 기독교적 열정에는 반유대적 폭력이 수반되었다. 이러한 사태로 인하여 유대인에게는 장기적인 의미를 지닌 세 가지 결과가 초래되었다. 유대인은 이동의 제약을 받고, 보호를 구실로 유대인 강제 거주구역에 거주해야 하였으며, 상업활동에서 점차 대금업으로 직업을 전환하여 자본을 대금업에 투입하였다. 유대인에 로마 교회의 입장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서 유대인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이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완강하게 거부했으므로 제국 법전의 정식 조치에 따라 그들은 제재를 받았다. 오랫동안 유대인에 대한 교황의 입장은, 한편으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지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의 자유에 대해 법률적으로 제재를 하는 것이었다.

 

 





유대인은 포교활동, 비유대인과의 통혼, 기독교도 노예소유, 관직보유, 새로운 교회당 건축 등을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종교로 인하여 박해받지도 않았고, 그들의 회당이 파괴되거나 약탈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노켄티우스 3세에 이르러 유대인의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다.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유대인이 기독교와 구별하여 격리될 수 있도록 유대인 차별 배지를 도입하도록 한 것도 이노켄티우스였다. 그는 교황청과 유대인간의 관계에 계약적 요소를 도입하였는데, 유대인이 계약을 위반할 때는 추방될 수도 있다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유대인에 대한 교황청의 태도는 점차 유대교를 이단과 동일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lI~12세기에 십자군 열기가 달아올라 성지를 '불신자'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이단을 근절하는 소명을 교회가 떠맡게 되었을 때, 유대인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불가피하였다. 광적인 십자군 병사들은 동방으로 진군하기 앞서 서유럽에서 '그리스도의 적들'을 제거하려 했다. 또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책임에 주목하였고, 점차 유대인과 이단자는 하나로 싸잡혔다. 중세 교황당국은 공식적으로는 늘 유대인 보호를 외쳐댔지만, 당국은 '구약의 담당자'라는 아우구스티누스적 개념에 순응하는 유대인만을 보호했으며, 그나마 보호라는 것도 점차 실현되지 않았다. 탁발 수도사들은 점점 더 고조되는 반유대적인 민중 여론에 편승했고, 이들의 민중 선동적 설교는 유대인에 대한 민중의 변화를 수반하였으며, 그리하여 유대인에 대한 폭력은 증가했다.

다. 십자군 전쟁의 영향

- 종교적인 영향

십자군의 파견이 실패하며 크리스트교의 위세는 저물고 서유럽에 이슬람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 경제적인 영향

영주에게 속해있는 농노가 줄고 자영농민이 늘자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시장이 발달하여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 문화적인 영향

서유럽과 동유럽에 이슬람 문화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ex: 비잔틴+ 이슬람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