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중세의 유대인(6C-14C)

가. 봉건제도내의 유대인

여기서 중세라 함은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된 이후부터 14세기 문예부흥 시기까지 게르만족들의 민족 국가가 안정되고 바티칸의 교권이 이들 민족국가의 왕권보다 우위에 있었던 시기를 말한다. 이 때 유대인은 중세 기독교와 봉건제의 어느 부분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들이었으며 왕과 교황은 이러한 이교도인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정책까지 펴게 된다. 그 예로 피핀과 샤를마뉴는 유대인에게 토지소유를 허락하였고, 기독교도 노동자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이들은 유대인을 개척민과 군인으로 활용하고, 유대인들의 상업활동을 장려했다. 프랑스의 경건 왕 루이도 유대인들의 상업활동을 장려하고, 새로운 유대인 회당 건립을 허용했다. 아울러 유대 상인들의 보호를 위한 특허장을 발행하고, 유대 안식일을 휴무일로 정했다. 반면에 기독교계에서는 538년 오를레앙공의회에서 유대인의 포교활동을 제한하는 법이 선포되었는데 이 공의회는 기독교도와 유대인의 통혼을 비난하고, 기독교도가 유대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금했으며, 기독교도에게 유대의 안식일을 거행하지 말 것과 일요일에 일하지 말고, 유대인과 기독교도가 성주간에 함께 어울리는 것을 금했다. 이후 일련의 공의회에서 이러한 규제들이 거듭 확인된 것은 유대인이 기독교도를 유대교로 개종시킬지 모른다는 기독교 성직자들의 우려를 말해준다. 9세기말 프랑크 왕국에서 열린 공의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목적을 지닌 법령들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령들에는 유대인 회당 신축 금지, 기독교도를 관장하는 고위직에서의 유대인 축출, 유대인의 기독교도 노예 소유 금지, 유대교 포교활동 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유대인과 함께 식사하거나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는 기독교도에게는 처벌이 내려졌고, 유대인과의 통혼이 금지되었다. 실제로 유대인과의 통혼은 간통으로 간주되었다. 서고트족 치하의 스페인에서는 유대인을 척결하기 위한 매우 잔인한 법들이 제정되었는데 '하느님의 신의를 저버린 사람들에 대한 기도교도의 증오감'에서 비

롯된 것으로 보인다.

 

 

 

 

러나 서유럽 대부분의 게르만 왕국에서 유대인은 상인이며, 의사며 외교관이며 군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많은 게르만 왕들은 유대인을 자신들의 왕국을 구성하는 다양한 종족 중에서 자신들의 법률을 받는 한 종족으로 대우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유대인은 중세 초부터 자신들의 법의 지배 하에 살면서 점차 번성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유대인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11세기에 일어났다. 유대인의 사주를 받아 사라센들이 성묘를 파헤치고 예루살렘 대주교를 참수했다는 소문이 1010년 무렵 서유럽에 떠돌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서유럽 여러 지역에서 유대인이 대량 학살되었다. 반 유대 감정은 반 이슬람 감정이 형성되는 것과 같은 시기에 형성되었다. 천년이 지나감에 따라서, 기독교 세계는 팽창국면에 돌입했고, 새로운 종교적 열정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내적으로는 개혁과 외적으로는 십자군 성전을 통해 세계를 기독교로 친화하려는 노력이 이루어 졌다.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B세가 십자군 성전을 선포한 후, 종교적 발작 분위기가 유랑 설교가들에 의해 조장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유대인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1차 십자군 이래로 반 유대적 박해는 위험스런 전염병과 같은 전파력을 발휘하였던 바, 이것이 극도의 정서적 긴장기에는 민족적 경계를 초월한 대중적 정신병으로 변질되었다. '이처럼 중세 민중들의 반유대적 폭력의 파도가 밀어닥치고 있을 때 교회와 세속당국의 반응은 대개의 경우 유대인을 돕는 것이었다. Speyer 대주교는 자신의 성채를 유대인의 피신처로 제공하고 유대인을 공격한 혐의가 있는 자를 처벌하였다. 시민들도 주교를 지지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이 정착하는 시는 부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관계당국에 유대인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강제로 세례 받은 자신들의 신앙으로 복귀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잉글랜드의 월리엄 2세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십자군 설교를 할 때마다 유대인 대량학살이 재현되었다. 일부 수도사들은 십자군을 설파하면서 이슬람교도에게로 진군하기에 앞서 예수그리스도를 살해한 자들에게 복수할 것을 청중에게 촉구했다.

 

 

 

 

 

 

 

이처럼 대대적인 십자군 운동 기에는 중세의 나머지 시기의 모형이 되었다. 기독교적 열정에는 반 유대적 폭력이 수반되었다. 이러한 사태로 인하여 유대인에게는 장기적인 의미를 지닌 두 가지 결과가 초래되었다.

1) 유대인은 이동의 제약을 받고, 보호를 구실로 유대인 강제 거주구역(게토)에 거주해야 하였으며,

2) 상업활동에서 점차 원래 본 업이었던 고리대금업으로 직업을 전환하여 자본을 돈놀이(오늘날의 금융업의 시작)에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나. 로마 교회와 유대인

유대인에 대한 로마 교회의 입장은 마리아를 성모로 인정하는 대신 로마가 교권을 영원히 가지고 교황을 배출한다는 313년 공의의의 유대교(레위)와 로마권력의 결탁에 근거하고 있었는데 즉.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유대인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이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완강하게 거부했으므로 제국 법전의 정식 조치에 따라서는 제재를 받았다. 오랫동안 유대인에 대한 교황의 입장은, 속으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지지하고, 겉으로는 유대인의 자유에 대해 법률적으로 제재를 하는 것이었다. 유대인은 포교활동, 비유대인과의 통혼, 기독교도 노예소유, 관직보유, 새로운 교회당 건축 등을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종교로 인하여 박해받지도 않았고, 그들의 회당이 파괴되거나 약탈되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금융업은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이노켄티우스 3세에 이르러 유대인의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다.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유대인이 기독교와 구별하여 격리될 수있도록 유대인 차별 배지를 도입하도록 한 것도 이노켄티우스였다.

 

 

 

 

 

 

 

 

그는 교황청과 유대인간의 관계에 계약적 요소를 도입하였는데, 유대인이 계약을 위반할 때는 추방될 수도 있다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유대인에 대한 교황청의 태도는 점차 유대교를 이단과 동일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lI~12세기에 십자군 열기가 달아올라 성지를 '불신자'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이단을 근절하는 소명을 교회가 떠맡게 되었을 때, 유대인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불가피하였다. 광적인 십자군 병사들은 동방으로 진군하기 앞서 서유럽에서 '그리스도의 적들'을 제거하려 했다. 또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책임에 주목하였고, 점차 유대인과 이단자는 하나로 싸잡혔다. 중세 교황당국은 공식적으로는 늘 유대인 보호를 외쳐댔지만, 당국은 '구약의 담당자'라는 아우구스티누스적 개념에 순응하는 유대인만을 보호했으며, 그나마 보호라는 것도 점차 실현되지 않았다. 탁발 수도사들은 점점 더 고조되는 반 유대적인 민중 여론에 편승했고, 이들의 민중 선동적 설교는 유대인에 대한 민중의 변화를 수반하였으며, 그리하여 유대인에 대한 폭력은 증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을 보호해온 당시 교부들과 천주교 간부들이 프리메이슨의 효시가 되었고 그들의 돈은 천주교 지배계급에서 점차 기독교 지배계급 쪽으로 전환되었다.

다. 유대인과 세속당국

중세 중기에 유대인들이 주로 정착했던 곳은 스페인, 프랑스, 라인란드였다. 그러나 11세기말에 시작된 잔인한 학살로 유대인이 공격을 받게 되자 I2세기에는 유대인이 기독교 통치자에 '소속한다'는 새로운 개념이 발전되었다. 국왕과 백작 그리고 주교들이 유대인의 권리와 역할을 규정하고 이들에게 보호를 보장하는 특허장을 발부했다. 유대인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대가를 지불했으며, 세속당국의 조치를 지배한 주요한 동기 중의 하나는 유대인의 부를 얻어내려는 욕구였음이 분명하다. 잉글랜드에서 국왕은 모든 유대인을 '소유했다', 프랑스에서는 왕령지에 있는 유대인만을 '소유했다', 독일 황제는 제국 내에 거주하는 유대인에 대한 최종적 재판귄을 주장했지만, 황제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타인에게 재판권을 양도하곤 했다. 그리하여 유대인은 다른 재산처럼 사고 팔고 저당 잡히고 교환하고 할 수 있었다. 역설적인 것은 유대인이 이러한 처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이 가진 돈 때문에 자치도시에서 자유 시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유대인은 유대인마을의 자치를 누렸지만, 시의 관직에 취임할 수 없었으며 유대인 특별세를 납부해야만 했다.

 

 

 

 

 

 

 

 

그들은 중세 사회의 조합적 구조 내에 있는 수많은 조합체와 유사했다. 그렇지만 법률적 지위는 그들에 대한 편견이 증가함에 따라서 모든 지방에서 점차 악화되었다. 중세 대부분 동안 유대인들과 그들의 부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세속당국이 유대인을 애초에는 교회 법정으로부터, 나중에는 종교 재판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강제 세례로부터 보호해주는 일을 신뢰감 있게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I5세기말에 이르면 유대인의 재정적 가차가 계속되는 학살이며 추방을 통해 크게 떨어졌다. 더욱이 풍문이며 중상 비방이며 풍자 등에 의해 쌓여진 반유대적 감정이 고조됨으로써 유대인을 정치적으로 보호하는 일은 위험 천만한 것이 되어 버렸다. 유대인은 중세의 여러 위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양을 찾아야만 했고, 그것은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가 이 시기를 유대인의 핍박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는 열성적인 기독교도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막간극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이 중세사회에 끼친 영향은 여성들이 중세 사회에 미친 영향과 마찬가지로 간과하기 쉬운 부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상업에서, 번역일에서, 문화적인 면에서 유대인은 서구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흑인구타 및 흑인탄압이 국가의 공식적인 정책이 아니듯이 교회의 공식적인 정책은 아니었다.

 

다. 유대인과 세속당국

중세 중기에 유대인들이 주로 정착했던 곳은 스폐인, 프랑스, 라인란트였다. 그러나 11세기말에 시작된 잔인한 유대인 학살처럼 유대인이 공격을 받게 되자 I2세기에는 유대인이 기독교 통치자에 '소속한다'는 새로운 개념이 발전하였다. 국왕과 백작 그리고 주교들이 유대인의 권리와 역할을 규정하고 이들에게 보호를 보장하는 특허장을 발부했다. 유대인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대가를 지불했으며, 세속당국의 조치를 지배한 주요한 동기 중의 하나는 유대인의 부를 얻어내려는 욕구였음이 분명하다. 잉글랜드에서 국왕은 모든 유대인을 '소유했다', 프랑스에서는 왕령지에 있는 유대인만을 '소유했다', 독일 황제는 제국 내에 거주하는 유대인에 대한 최종적 재판귄을 주장했지만, 황제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타인에게 재판권을 양도하곤 했다.

 

 

 

 

 

 

그리하여 유대인은 다른 재산처럼 사고 팔고 저당잡히고 교환하고 할 수 있었다. 역설적인 것은 유대인이 이러한 처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대인들이 자치도시에서 자유 시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유대인은 유대인마을의 자치를 누렸지만, 시의 관직에 취임할 수 없었으며 유대인 특별세를 납부해야만 했다. 그들은 중세 사회의 조합적 구조 내에 있는 수많은 조합체와 유사했다. 그렇지만 법률적 지위는 그들에 대한 편견이 증가함에 따라서 모든 지방에서 점차 악화되었다. 중세 대부분 동안 유대인들과 그들의 부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세속당국이 유대인을 애초에는 교회 법정으로부터, 나중에는 종교 재판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강제 세례로부터 보호해주는 일을 신뢰감 있게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I5세기말에 이르면 유대인의 재정적 가차가 계속되는 학살이며 추방을 통해 크게 떨어졌다. 더욱이 풍문이며 중상 비방이며 풍자 등에 의해 쌓여진 반유대적 감정이 고조됨으로써 유대인을 정치적으로 보호하는 일은 위험 천만한 것이 되어 버렸다. 유대인은 중세의 여러 위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양을 찾아야만 했고, 그것은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가 이 시기의 유대인의 핍박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는 열성적인 기독교도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막간극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이 중세사회에 끼친 영향은 여성들이 중세 사회에 미친 영향과 마찬가지로 간과하기 쉬운 부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상업에서, 번역 일에서, 문화적인 면에서 유대인은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흑인구타 및 흑인탄압이 국가의 공식적인 정책이 아니듯이 교회의 공식적인 정책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