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목차

1. 개요**********************************************************2

가 아리랑의 의미************************************************2

다 바이칼에서의 창시자 효과***********************************9

마 현재 한국의 아리랑*****************************************11

2. 한인 시대의 아리랑*****************************************16

가. 문서상 아리랑**********************************************16

나. 아리랑의 내용 *********************************************27

다. 아리랑의 전파 **********************************************29

3. 삼한 시대의 아리랑*****************************************33

가. 삼한의 정의************************************************33

나. 삼한의 분리************************************************34

다. 샤머니즘***************************************************36

4. 한웅시대의 아리랑******************************************45

5. 단군시대의 아리랑******************************************65

6. 신라의 아리랑***********************************************93

7. 고려의 아리랑*********************************************113

8. 이조의 아리랑*********************************************135

다. 이조의 아리랑 말살***************************************139

라. 이순신과 아리랑의 부활**********************************150

9. 현대의 아리랑*********************************************154

10. 아리랑과 관련된 현실 이해*******************************196

11. 하나님 우리 한민족의 하나님****************************211







1.개요

가. 알(아리랑)의 의미(언어의 시작)

알은 "안다", "알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최초의 호모사피엔스가 자연에 대해 가지게 된 인식으로 살아있는 젓을 안다는 뜻에서 "사람"이라는 말도 나왔다. 인간은 우선 알아야한다는 데서 "알다"라는 말은 바로 "언어"를 의미하고 동시에 인간이 모든 부분이 알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자연에서 나왔다는 뜻에서 명사 어휘인 "알"로 의미가 발전되었다. . 이 두 가지가 가장 기본적인 의미였다. 그래서 인간의 기본 조건은 말을 아는 것이고 그 다음 모든 자연은 살아있고 자연은 해치면 인간에게 재앙이 온다는 생각이다. 즉 창조주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온 세상을 만드셨다는 인식이다. 은 수만 년 간 인간의 언어와 생각의 기준이 되어왔으며 현생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행동의 근본이 되어왔다. 인간만 가지고 있는 이 언어를 통한 생각, 양심, 정서, 웃음,





가족 애, 자연관찰, 자연에 대한 적응방법, 육아. 집단 생활 방법 등 문명이전의 모든 인간성은 이 알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면 된다.

이 언어의 시원 민족이며 시원 국가인 우리 한국 민족을 통하여 "알과 함께"라는 노래 즉 아리랑이 통해 수만 년 전해져 내려온다.

나). 문법적 정의 "알"

알이라는 말은 한문으로 란(卵)이고 일본어 음독으로 랑(らん)이라고 하나 영어 에그(egg)가 한문보다 발음상 더 비슷하다. 현재의 의미는 모든 조류나 어류의 세끼가 태어나기 전의 보호된 상태를 말하며 모양은 둥글다. 그 속에는 성체 세끼가 되기 전에 필요한 모든 영양분이 포함되어 있으며 자체의 유기적인 활동으로 태어나기 전의 생명을 보호하고 양육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우주를 인간에게는 하나의 큰 "알"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우주의 영장으로 생명이 서로 시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인식했다. 이 알이라는 말은 안다.알다라는 말의 근원이며 세월이 흐르면서 지역과 시대에 따라 "" 또는 "엘" 로 변화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다) 문법적 정의 "이랑"

아리랑은 그 자체가 어떤 이름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알"이라는 이름에 "이랑"이라는 돕는 말이 보태어져서 된 말이다. 그래서 아리랑이라는 이름은 "알"이라는 이름씨(명사)와 "이랑"이라는 도움씨(조사)가 더하여 져서 된 말이므로 각각 따로 분리해서 그 의미를

* 여기서 이름씨. 도움씨 등 품사의 이름은 해방이후 처음 통용되었던 최현배의

한글 문법에 근거한 것으로 1967년에 개정된 한문 식 한글 문법에 근거한 이름이 아니다





찾아야 한다. 우선 "이랑"이라는 도움 씨는 "누구누구와 함께"라는 뜻으로 영어로 "with"와 같은 뜻이다. 이 조사는 자연환경이 변하지 않는 한 수 만년간 변하지 않는 말로써 원조 호모 사피엔스의 삶의 기반 용어이다. 그래서 이 "아리랑"의 이랑은 "알과 함께" 또는 "알과 더불어 살아온"이라는 뜻이다. 특히 이 "이랑"이라는 도움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누구와 함께"라는 말보다 소원의 정도가 훨씬 강하고 절실한 가까운 사이에서 쓰인 말인데 그 실례로 엄마 아빠, 형, 동생, 바둑이등과 함께 할 경우 "아빠랑" "엄마랑" "형이랑" "동생이랑" "바둑이랑" 이라는 말을 주로 쓰고 "아빠와, 엄마와 함께" 또는 "엄마, 아빠와 같이" 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즉 "이랑"은 존재를 가장 크게 원하는 상대 즉 가족처럼 가까운 상대일 경우 쓰는 말이다. 그래서 "알"이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 우리에게 내려온 알은 알과 함께 하라는 뜻으로 아리랑이 보편적이다.

나. 아리랑의 기원

1) 네안데르탈인의 이동












이 유전자 이동도는 서울대 의대 당뇨 전문 교수였던 이홍규박사가 1992년 미토콘드리아 분자시계에 의한 현 인류의 생성 및 이동에 대한 연구를 실시한 결과 에모리 대학의 월레스, 스탠포드 대학의 피터 언더힐 및 루카 카발리 스포르차의 자료들을 종합하고 뉴욕타임스의 스티브 듀에네즈 기자가 만든 인류의 이동도에 이박사의 추론을 더해 다시 만든 것이다,

나)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

이 이동 도에 의하면 현 인류인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의 생성은 아프리카에 있던 네안데르탈인의 한 여인(통칭: 루시)에게서 약 15만 년 전에 발원 된 것이고, 이들이 세계 각처로 이동하였다는

것이 현생 인류 이동에 대한 학자들의 마지막 과학적 종합적 결론이다. 즉, 최초에 아프리카 기원의 미토콘드리아 이브 염색체를 가진 네안데르탈인의 주류가 태양이 비치는 곳에 먹을 열매가 많은 점을 알고 아프리카 대륙에서 동진을 시도했으나 태평양에 막혀 못 가고 결국 아프리카 동해안을 따라 북진을 했고 적도를 지나 결국 홍해를 건너 아시아 대륙을 따라 동북 진을 계속하다가 남으로는 히말(흰말)라야 산맥에 북으로는 위도로 인한 추위에 막혀 "C" 및 "D" 지역인 천산, 알타이, 바이칼호 일대에서 멈추게 된 것을 나타낸다.

다)바다로의 이동

그러나 필자는 아래 그림과 같이 더 빠른 속도로 바다로 이동한 집단이 있었음을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의 발전은 8천여 개라는 어휘 수가 뉴질렌드 진화 심리학자인 쿠엔틴 엣킨슨 교수가 주장한 창시자 효과가 나타나 수배, 수천 배로 늘어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말한다.

* 이홍규

의사 , 출생 1944년 4월 14일 (경상남도 진주) 전 서울대 교수 현 을지병원 (내분비내과교수) 한국지질동맥경화학회 고문

대한내분비학회 이사장 한국지질동맥경화학회 회장

세계보건기구 만성퇴행성질환전문 자문위원







*루카 카발리-스토르차

미 스텐포드대 유전학 교수 1988년 언어의 차이와 유전자 풀의 차이를 통하여 전 세계인을 분류했다. 유전자 풀(gene pool)이란 한 종류의 생물 집단이 가진 유전자의 다양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 미토콘드리아 분자시계 [ molecular clock , 分子時計 ]

유전자(DNA) 또는 단백질 등의 분자 속에 있는 특정 부분이, 생물이 진화하는

동안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분자진화시계라고도 한다. 진화의 과정에서 DNA나 단백질 등의 분자 속에 시계처럼 시간을 새겨가면서 변화해 가는 부분이 있다고 보고, 그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서로 다른 생물 사이에서 그 변화의 차이를 조사함으로써 생물 사이의 유연 관계나 그들이 분기(分岐)한 정확한 연대도 추정할 수 있다.

* 미토콘드리아 이브[ Mitochondria Eve ]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하여 추정한 인류의 모계조상.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가 어머니를 통해서만 전해진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현존하는 인류의 가계도를 추적하여 밝힌 인류의 공통조상을 의미한다. 이 연구결과는 1987년 고대인류의 화석에서 추출한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를 바탕으로 처음 제기된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론'을 뒷받침해 준다. 이 기원론은 어머니를 통해서만 전달받는 미토콘드리아 DNA를 통해 '이브'를 추적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의 한 여성의 분자시계에서 15만 년 전에 비롯된 네안데르탈인이라는 결론이고 이를 맨 먼저 발견한 일본 국립 미토 대학의 이름을 따 만들었다. 일본인들은 만주 침략 후 우리 조상에게서 샘플을 채취해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한 셈이 되었다. [출처] 미토콘드리아 이브 | 두산백과





이 이동도의 완성으로 지금까지 서구인들이 주장해온 인류학, 인종

학, 문화 인류학, 민족의 기원 등 제반 학문이 그 기반부터 흔들리게 되었으나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지금도 서양 사람들을 최고로 진화된 인간이라는 의미인 슬기 슬기인간(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라

고 가르치고 있고 우리도 그들의 학문을 그대로 믿고 있다.

이 이동도가 한국 민족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최초의 호모사피엔스이며 현생 인류의 시원 민족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국인의 언어. 외모, 체형, 성품, 지능, 정서 등 모든 특징에서 세계의 인류의 현대적 특성이 갈라져 나갔다는 것으로 한국인인 우리 자신을 모르면 백인, 흑인을 포함한 인류 자체를 그 근본부터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고 소위 인류가 만든 세상의 기초부터 알 수 없으며 막말로 야만인인 백인종을 따라 어둠 속을 헤매고 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이동도에서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진실은 창시자 효과를 처음으로 발견한 한 서양의 학자(쿠엔틴 엣킨슨)에 의해서 바이칼의 우리 한국민족이 인간이 자연에서 나왔음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언어로 정리하여 알다라는 과정부터 시작하여 성경 창세기에서 말하는 천지 만물의 이름을 부르는 아담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언어는 홍수 이전 장구한 수 만 년의 기간에 한국인에 의해 전 세계에 전파된 것이다. 인도 유로어와 우리 언어의 어근이 20만개 이상이 같고 그리스어와 우리말이 많은 부분이 같은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백인들이 신성시하는 성경 창세기 11:1에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와도 일치한다.





다. 바이칼에서의 창시자 효과

그리고 이 가설은 인류이동도가 언어의 분산이 바이칼 지역임을 함께 뒷받침하고 있어 더욱 확실하다. 이 언어발전의 규모는 1. 유전자 이동도에서 보듯이 바이칼 지역에서 인류의 사방으로의 확산 원인이 인류들 간 대량의 의사소통이 필요했고 또 가능해졌음을 의미한 것, 2. 2000년대 현재 이 지역 언어인 우랄 알타이어(특히 한국어)와 인도 유로어가 그 어근에 있어서 22만개 정도가 같다는 러시아 언어학자 스타로스틴의 주장에 따라 기원전 2~3만 년 전에 이 인도 유로어의 기원이 된 아리안 족이 인도 북쪽 스텝지역에 있었고 이들이 최초로 바이칼에서 알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서진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기초로 이 아리안이 바로 뉴질랜드 진화심리학자 쿠엔틴 엣킨스 교수가 주장한 창시자 효과가 일어난 지역이고박재상의 )부도지 참조)판단에 따라 한국인에게서 나타나 북쪽으로 갔다사 다시 내려온 우리의 조상 청소씨(淸宵氏)에 이루어졌음을 투론할 수 있다.

* 창시자 효과

왼쪽의 원래 집단에서 일부가 떨어져 나와 만들어진 개체군의 다양한 변이를 볼 수 있다. 창시자 효과(創始者效果)는 집단유전학에서 한 개체군에서 낮은 빈도의 대립인자를 가진 몇몇 개체들이 새로운 곳으로 이주했을 때, 그 대립인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효과를 말한다. 1963년 에른스트 마이어가 주창한 개념이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인디언의 혈액형은 B형이 없고 O형이 많은데, 이






것은 오래전 아시아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적은 수의 창시자 집단에 B형 유전자가 없고 O형 유전자가 많았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있다.

* 크웬틴 엣킨슨(Quentin Atkinson)

뉴질랜드대 교수. 2011년 4웡 그는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음소 다양성이 증명하는 창시자 효과의 연쇄와 언어의 아프리카 기원설(Phonemic Diversity Supports a Serial Founder Effect Model of Language Expansion from Africa)’이라는 논문을 통해 약 5만 년 전에 현생인류가 행동하는 방식에 갑작스러우면서도 확실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인류가 동굴벽화와 뼈로 만든 공예품을 창조하고, 과거에 비해 크게 진화한 사냥도구를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도 이러한 갑작스런 창조활동 발전이 추상적 사고를 가능하

게 한 복잡한 언어의 등장이라는 혁신에 힘입어 나타났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라. 언어의 전파

이렇게 발전한 시원 언어는 바이칼 지역에 그냥 머물지 않고 인구가 늘어나고 선주 네안데르탈인끼리의 의사소통의 필요에 따라 사방으로 전파되었는데 그 근거는 다음 4가지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서구인들이 믿고 있는 성경 창세기에 최초의 인간 구음이 하나였다(창세기 11장 1절)는 기록이다. 둘째는 전술한 이홍규교수가 정리한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이동도에서 인류의 확산 경로를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한국어가 시원 언어라는 점에서 전세계를 덮고 있는 유로어의 경우 70%가 한국어와 어근이 같고(하나, 둘, 셋= 완,투,스리. 한국 똥은 영국에서도 똥, 되지다=데스. 외이=왜? 무엇=뚵.등 등) 아메리카 아즈 택어에도 한국말과 같은 것이 많다.(애 세끼, 다조타, 마친니 등등) 가장 신기한 것은 그리스에서 불의 신을

푸로메테우스=불로맡았어로 어른이 물으면 "네, 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해상으로도 시원 언어가 전파되었음을 의미한다. 언어 전파의 가장 명확한 근거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아시아의 주요 지명이다. 알프스, 아라랏, 아라비아, 울알, 알타이, 알물(중국인은 흑룡강이라고 부른다)알 아스카. 등은 옛 알의 지역을 시사하는데 알프스는 알을 벗어났다는 의미이고, 이를 증명하듯 빗살 무늬 토기 분포도 이 지역을 벗어났다. 홍수 이전(기원전 만4천년전~기원 전 8천년

전까지) 지구의 전체 대륙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고려하면 이해가 간다. 이를 정리하면 시원 언어인 한국어는 1. 알 지역(아시아 북방). 2. 인도 유로어 지역, 3, 남방 지역(말레이지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폴리네시아) 4. 아메리카 지역 5. 북방 지역)에스키모) 등

5개 방향으로 전파되어 그 지역의 지리적, 생태적 환경과 결합하여

각기 다른 지역적 특성을 가진 언어로 발전하였다.

마. 현재 한국의 아리랑

1) 개요

민요 아리랑은 “아리랑 또는 이와 유사한 음성이 후렴에 들어있는 민요의 총칭”으로 남북을 통틀어 약 60여종 3천6백여 수에 이른다.





우리나라에는 평안도에 '서도 아리랑', 강원도에 '강원도 아리랑', '정선아리랑' 함경도에 '함경도 아리랑', '단천 아리랑', ‘어랑타령’ 경상도에 '밀양 아리랑', 전라도에 '진도 아리랑', 경기도에 '긴 아리랑' 등이 대표성을 띈 아리랑이고 그밖에 지역마다 각기 다른 아리랑이 있다. 나라 밖으로도 우리민족이 사는 중국 땅에 ‘독립군 아리랑’, 러시아 땅에 ‘사할린 아리랑’ 등이 있다. 여기서 이 아리랑 해석에 있어 우리가 범하고 있는 과오는 이 아리랑은 오래 전 부터 우리 민족에게 전래된 노래로써 언어(최고 6만 년 전에 생성)에서 파생된 산물인데 이것을 6천 년 전에 만들어진 문자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아리랑의 가사를 좀더 상세히 살펴보자. 대표적인 아리랑 가사는 다음과 같다. 그리고 무속의 씻김굿이나 임진왜란 후 유행한 남도 민요 성주풀이 가사에도 알 또는 아리랑이라는 가사가 들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 경기(서울)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 병 난다

* 정선 아리랑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심리가 아니라며는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 삼월이 아니라며는 두견새는 왜 울어

앞 남산의 뻐꾹이는 초성도 좋다

세 살 때 듣던 목소리 변치도 않았네






삼십 육 년 간 피지 못하던 무궁화 꽃은

을유년 팔월 십 오일에 만발하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날 넘겨주게

* 진도 아리랑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 음 음 아라리가 났네

1.문경새재는 왠 고갠고, 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 난다.

2.만경 창파에 두두웅실 뜬 배 어기여차 어야 디여라 노를 저어라

* 밀양 아리랑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함경도 아리랑

아니랑세 아니랑세(아리랑 아리랑)

별기룩이 지나갈세(星鳥가 지나가네)

아니랑세 아니랑세(아리랑 아리랑)

청옷빛아 같이갈세(파란색옷 아기야 같이가자)

붉은베단 갱이맑네(붉은 비단 光이 맑네)

황장 물려들가라(왕자는 물려가라)

우리 옥아 제일리요(우리자식은 제일이요)

- 함경도 아리랑은 전래민요로써 조선과 고려의

행실을 비판하던 노래로써,주로 통일 돈돌라리&

아리랑과 같이 조선민요의 수록되어 있었으나.

민족비판을 초래한다는 뜻으로 검열당했다고 함-





* 진도 씻김굿(굿거리 셋째~넷째 마당)

이로 구나 잔등 잔등 새로 송 잎이 나네 어라 만수 경상도는 대 풀이요 전라도는 종천 풀에라 어라 만수 어라 대 신이야 많이 흠양 허고 평안히 돌아가소

- 가사 출처 : 가사집 http://gasazip.com/231916 -

* 성주 풀이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 이 몇몇이며 절대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가면 저기 저 모양 될 터이니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저 건너 잔솔밭에 솔솔 기는 저 포수야

저 산비둘기 잡지 마라 저 비둘기 나와같이

님을 잃고 밤새도록 님을 찾아 헤맸노라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이 노래는 임진왜란 후 남도 지역의 무속에서 나와 유행된 노래이다-

2). 노래 가사들의 의미 요약

지금까지 한국어로 된 아리랑과 관련된 각 지역의 아리랑과 씻김굿 가사, 성주풀이 아리랑 관련 모든 노래 가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아리랑의 의미는 다음 세 가지이다.

첫 째는 알(자연의 섭리)이 가장 큰 신이고

둘 째는 알(자연의 섭리)과 함께 해야 무 탈한다는 것이며

셋 째는 알(자연의 섭리)이 수리(독수리 정수리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계급, 권력, 돈을 말함)보다 낫다(better than)는 것이다





* 수리

한국어 고유어로 우두머리를 뜻한다. 산이나 봉우리 이름 중에 수리봉 수리산이 들어간 말은 모두 봉우리 위에 족두리 같은 바위가 붙어있을 때 수리봉 또는 수리산이란 명칭을 사용한다.

정리하면 바이칼 자연주의가 홍수 후 중국( 번한)에서 나타난 인본주의 보다 나으니 자연의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하라는 뜻이다.



















2. 한인 시대의 아리랑

가 문서상 아리랑

1) 천부경의 아리랑

* 천부경

一始無始 일시무시 하나가 시작되고 무가 시작되었다.

있음이 시작되자 비로소 없음이 시작되었다.

一析三極 無盡本 일석삼극 무진본

있음은 쪼개어져서 세 개(천,지,인)의 방향으로 끝까지 펼쳐지고, 그리 되면 없음은 그 근본이 다 소진된다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하늘이 있음이 그 하나요, 땅이 있음이 그 둘이며, 사람이 있음으로 그 셋이니라.

一積十鉅 無櫃化三일적십거 무궤화삼

있음은 쌓여서 열이 되나 없음은 궤와 같아서 셋으로 남느니라.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하늘이 없음도 셋이요, 땅이 없음도 셋이요, 사람이 없음도 셋이라.

大三合六 生七八九대삼합육 생칠팔구

큰 셋이 더하여져서 여섯이 되고 이 여섯에서 일곱, 여덟, 아홉이 생기는구나.

運三四成環 五七一妙衍운삼사 성환 오칠일묘연

셋과 넷이 운용되어 고리가 만들어지니 그것이 다섯과 일곱이라는 크고 묘한 이치로 확장되느니.

一終無終 一 일종무종 시

있음이 끝나면 없음도 함께 끝나는구나, 아~ 아 있음이여!

앞의 창시자 효과에 대한 여러 가설들을 종합해 볼 때 아리랑 사상은 인간이 창조주를 인식하게 된대서 시작된 것으로





1) 사람은 창조주께서 만들었고 만물의 영장이다

2) 하늘. 땅,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셋이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고 적어도 만 단위까지 수가 일반화되었다.

3) 자연을 해치면 인간도 상한다.

4) 창조주는 전지전능하고 무소 부재하시다.

5)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연과의 조화에 대한 기준은 양심이다.

6) 인간의 요구나 소원은 모두 이루어지며 필요의 증가에 따라 기도라는 권리와 응답 받는 능력을 주셨다.

7) 그래서 인간은 가장 먼저 자연에 적응해야 하며(조화造化) 그 다음 자식을 조화시켜야 하고 (교화敎化) 그 다음 인간끼리와 사회를 양심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치화治化)

* 유대인들의 경전 구약 창세기 2.17-18절에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라고 한 것은 나무에 붙어있는 과일에 손대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 즉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므로 먹지 말라고 하신 것으로 기록하였다.

2) 부도지의 아리랑

* 부도지 제2장

城中에 地乳始出하니 二姬又生四天人四天女하야 以資其養하고 四天女로 執呂하고 四天人으로 執律이러라

성중(城中)에 지유(地乳)가 처음으로 나오니, 궁희와 소희가, 또 네 천인(天人)과 네 천녀(天女)를 낳아, 지유를 먹여, 그들을 기르고, 네 천녀에게는 여(呂)를, .



네 천인에게는 율(律)을 맡아보게 하였다

성경 구약의 창세기에는 금단의 과일 식용 금지를 명하면서도 그 대안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부도지에는 떨어진 과일을 지유(地乳)라고 하여 대신 먹도록 함으로써 자연을 해치지 않도록 했다는 훨씬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다. 자연을 해치면 인간은 죽는다는 사상이 당시 아리안 족이 서양으로 이동 할 때 가지고 간 사상으로 아리안 족의 이동 원인도 역시 자연보호를 위한 알의 가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다음 부도지 5-8장의 오미의 난을 통해서 재차 확인할 수 있다.

* 부도지 第五章

백소씨족(白巢氏族)의 지소(支巢)씨가, 여러 사람과 함께 젖을 마시려고 유천(乳泉)에 갔는데, 사람은 많고 샘은 작으므로, 여러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마시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다섯 차례나 되었다. 곧 돌아와 소(巢)에 오르니, 배

가 고파 어지러워 쓰러졌다. 귀에는 희미한 소리가 울렸다. 오미(五味)를 맛보니, 바로 소(巢)의 난간의 넝쿨에 달린 포도열매였다. 일어나 펄쩍 뛰었다. 그 독력(毒力)의 피해 때문이었다. 곧 소(巢)의 난간에서 내려와 걸으면서 노래하기를.

[넓고도 크구나 천지여! 내 기운이 능가한다. 이 어찌 도(道)인가! 포도의 힘이로다.] 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 지소씨의 말을 의심하였다. 지소씨가 참으로 좋다고 하므로, 여러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고, 포도를 많이 먹었다,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이에 제족이 포도를 많이 먹었다.

白巢氏之族 支巢氏ㅣ樳者人으로 往飮乳泉할새 人多泉少어늘 讓於諸人하고 自不得飮而如是者五次라. 乃歸而登巢하야 遂發飢惑而眩倒하니 耳嗚迷聲하야 呑嘗五味하니 卽巢欄之蔓籬萄實이라. 起而偸躍하니 此被其毒力故也라. 乃降巢闊步而歌






曰浩蕩兮天地여 我氣兮凌駕로다. 是何道兮요 萄實之力이로다. 衆皆疑之하니 支

巢氏曰眞佳라하거늘 諸人이 奇而食之하니果若其言이라.於是에 諸族之食萄實者多러라.

第六章

백소씨(白巢氏)의 사람들이 듣고 크게 놀라, 곧 수찰(守察)을 금지하니 이는 또 금지하지 아니하되, 스스로 금지하는, 자재율(自在律)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이 때에 열매를 먹는 습관과 수찰을 금지하는 법이 시작되니, 마고가 성문을 닫고 수운(水雲)의 위에 덮혀 있는 실달대성의 기운을 거두어버렸다. 열매를 먹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齒)가 생겼으며, 그 침(唾)은 뱀의 독(毒)과 같이 되어 버렸다. 이는 강제로 다른 생명을 먹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수찰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눈이 밝아져서, 보기를 올빼미 같이 하니, 이는 사사로이 공률(公律)을 훔쳐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의 혈육이 탁(濁)하게 되고, 심기(心氣)가 혹독하여져서, 마침내 천성을 잃게 되었다. 귀에 있던 오금(烏金)이 변하여 토사(兎沙)가 되므로, 끝내는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발은 무겁고, 땅은 단단하여, 걷되 뛸 수가 없었으며, 태정(胎精)이 불순하여, 짐승처럼 생긴 사람을 많이 낳게 하였다. 명기(命期)가 조숙(早熟)하여, 그 죽음이 천화(遷化)하지 못하고 썩게 되었으니, 이는 생명의 수(數)가 얽혀 미혹(迷惑)하게 되고,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白巢氏之諸人이 聞而大驚하야 乃禁止守祭하니 此又破不禁自禁之自在律者也라. 此時에 食實之習과 禁祭之法이 始하니 麻姑閉門撤冪이러라. 已矣오 食實成慣者ㅣ皆生齒하야 唾如蛇毒하니 此는 强呑他生故也오 設禁守祭者ㅣ皆眼明하야 視似치目하니 此는 私 公律故也라. 以故로 諸人之血肉이 化하고 心氣ㅣ酷択하야 遂失凡天之性이라. 耳之烏金이 化作兎沙하야 終爲天聲하고 足重地固하야 步不能跳하며 胎精不純하야 多生獸相이라. 命期早熟하야 其終이 不能遷化而 하니 此는 生命之數ㅣ惑 縮故也라.

第七章

이에 사람(人世)들이 원망하고 타박하니, 지소씨가 크게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져서, 권속(眷屬)을 이끌고 성을 나가, 멀리 가서 숨어 버렸다. 또 포도의 열매






를 먹은 자와, 수찰을 하지 아니한 자도, 역시 모두 성을 나가,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 가니, 황궁(黃穹)씨가 그들의 정상을 불쌍하게 여겨 고별(告別)하여 말하기를, [여러분의 미혹(迷惑)함이 심대(甚大)하여 성상(性相)이 변이(択異)한 고로 어찌할 수 없이 성중(城中)에서 같이 살 수가 없게 되었오. 그러나, 스스로 수증(修獞)하기를 열심히 하여, 미혹함을 깨끗이 씻어, 남김이 없으면, 자연히 복본(挈本) 할 것이오, 노력하고 노력하시오.]하였다. 이 때에 기(氣)와 토(土)가 서로 마주치어, 시절(時節)을 만드는 광선(光線)이, 한 쪽에만 생기므로, 차고 어두웠으며, 수(水)와 화(火)가 조화를 잃으므로, 핏기 있는 모든 것들이 시기하는 마음을 품으니, 이는, 빛을 거둬들여서 비추어 주지 아니하고, 성문이 닫혀 있어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人世ㅣ怨咎하니 支巢氏ㅣ大恥顔赤하야 率眷出城하야 遠出而隱이라. 且氣慣食萄實者와 設禁守祭者ㅣ亦皆出城하야 去各地하니 黃弓氏ㅣ哀憫彼等之情狀하야 乃告別曰 諸人之惑量이 甚大하야 性相択異故로 不得同居於城中이라. 然이나 自勉修獞하야 淸濟惑量而無余則自然挈本하리니 勉之勉之하라. 是時에 氣土相値하야 時節之光이 偏生冷暗하고 水火失調하야 血氣之類ㅣ皆懷猜忌하니 此는 冪光이 卷撤하야 不爲反照하고 城門이 閉隔하야 不得聽聞故也라.

第八章

더구나 성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전날의 잘못을 뉘우친 사람들이, 성 밖에 이르러, 직접 복본(挈本)을 하려고 하니, 이는 복본에 때가 있음을 모르는 까닭이었다. 곧 젖샘을 얻고자 하여, 성곽의 밑을 파해치니, 성터(城址)가 파손되어 샘의 근원이 사방으로 흘러 내렸다. 그러나, 곧 단단한 흙으로 변하여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성 안에 마침내 젖이 마르니 모든 사람들이 동요하여, 풀과 과일을 다투어 취하므로, 혼탁(混濁)이 지극하여, 청정(淸淨)을 보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황궁(黃穹)씨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어른이었으므로, 곧 백모(白茅)를 묶어 마고(麻姑)의 앞에 사죄하여, 오미(五味)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복본할 것을 서약하였다. 물러나와 제족(諸族)에게 고하기를 [오미의 재앙이 꺼꾸로 밀려오니, 이는 성을 나간 사람들이 이도(理道)를 알지 못하고, 다만 혹량






惑量)이 불어 났기 때문이다. 청정(淸淨)은 이미 없어지고, 대성(大城)이 장차 위험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이를 어찌할 것인가.]하였다. 이 때에 [35]천인(天人)들이 분거(分居)하기로 뜻을 정하고 대성을 완전하게 본전하고자 하므로, 황궁씨가 곧 천부(天符)를 신표(信標)로 나누어 주고,칡을 캐서 식량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사방에 분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청궁(靑穹)씨는 권속(眷屬)을 이끌고 동쪽 사이의 문을 나가 운해주(雲海洲)로 가고, 백소(白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서쪽 사이의 문을 나가 월식주(月息洲)로 가고, 흑소(黑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남쪽 사이의 문을 나가 성생주(星生洲)로 가고, 황궁씨는 권속을 이끌고 북쪽 사이의 문을 나가 천산주(天山洲)로 가니, 천산주는 매우 춥고, 매우 위험한 땅이었다. 이는 황궁씨가 스스로 떠나 복본(挈本)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맹세였다.

已矣오. 出城諸人中悔悟前非者ㅣ還到城外하야 直求挈本하니 此未知有挈本之時所故也라. 乃欲得乳泉하야 掘鑿城廓하니 城址破損하야 泉源이 流出四方이라. 然이나 卽化固土하야 不能飮철이 黃穹氏ㅣ率眷出北間之門하야 去天山洲하니 天山洲는 大寒大險之地라. 此는 黃穹氏ㅣ自進 難하야 忍苦挈本之 盟誓러라.

이상의 내용을 현대적 개념으로 분석한다면 기원전 3-5만 년경부터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식량이 부족해지자 창조주의 명령을 어기고 살아있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기 시작했고 정신이 혼미해지며 사나워져 수명이 짧아졌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분거(分居) 제족(諸族)이 동, 서, 남, 북으로 흩어졌으며 백소씨(白巢氏: 백인들이 사는 곳으로 간 바이칼 사람들로 알을 아는 제 족을 말하며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아리안 족을 의미한다)는 서쪽으로 황궁씨(황인종 지도자 급)은 천산쪽으로 흑소씨는 남쪽으로 청궁씨는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에 빙하가 녹고 홍수가 시작되었는데 사람들은 이 홍수의 원인을





창조주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포도 생 과일을 먹기 시작한 것 때

문이라고 기록했다. 즉 알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인간이 포악해 지고 수명이 짧아졌으며 홍수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국인에게 내려온 아리랑 노래는 이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리랑은 자연을 보존하여야 하고 인간은 자연에 적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말이다.

3) 한단고기의 아리랑

* 한단고기 삼성기 전 상권 안함로 지음

吾桓建國 最古 有一神 在斯白力之天 爲獨化之神 光明 照宇宙 權化 生万物

오환건국 최고 유일신 재사백력지천 위독화지신 광명 조우주 권화 생만물

우리 한(환, 桓)1)의 건국은 가장 오래전에 이루어졌다.

한분의 신이(一神)2) 시베리아(斯白力)3)의 하늘에 계셨는데

홀로 변화 한 신(獨化之神)이 되시어, 밝은 빛으로 온 우주를 비추고 권능(權能)

과 조화(造化)로서 만물을 낳으셨다.

長生久視 恒得快樂 乘遊至氣 妙契自然 無形而見 無爲而作 無言而行

장생구시 항득쾌락 승유지기 묘계자연 무형이견 무위이작 무언이행

오래 오래 살면서 항상 즐거움을 누리셨고, 지극한 기(氣)를 타고 노닐며, 자연과 오묘하게 어울리시면서, 형체가 없어도 볼 수가 있고, 행(行)함이 없어도 이룰 수 있으며, 말이 없어도 행하여졌다.

日 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 일 강동녀동남팔백어흑수백산지지






어느날 동녀동남 800명을 흑수,백산의 땅에 내려 보내셨다.

於是 桓因 亦以監? 居于天界 ?石發火 始敎熱食 謂之桓國 是謂天帝桓因氏 亦睨安巴堅也 炩七世 年代 不可考也

어시 환인 역이감군 거우천계 부석발화 시교열식 위지환국 시위천제환인씨 역칭안파견야 전칠세 년대 불가고야

이때에 한인(桓因)께서 또한 감군(監群)1)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부

딪쳐서 불을 만들어, 처음으로 음식을 익혀 먹는 방법을 가르치시니, 이를 한국(桓國)이라 하였고, 이 분을 ‘천제 한인씨(天帝桓因氏)’ 또는 ‘안파견(安巴堅)’이라고 불렀다. 일곱 대를 전하였는데 그 연대는 가히 알 수가 없다.

제1세 한인 안파견(安巴堅)

제2세 한인 혁서(赫胥)

제3세 한인 고시리(古是利)

제4세 한인 주우양(朱于襄)

제5세 한인 석제임(釋堤壬)

제6세 한인 구을리(邱乙利)

제7세 한인 지위리(智爲利)

이 글을 보면 우리나라가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집단화되었음을 말해주고 있고 최근 한국인이 시원 민족이고 한국어가 시원 언어라는 서양학자들의 주장과 일치한다

먼저 시베리아에서 신을 인식할 만한 장소는 바이칼 호수 밖에 없다. 다른 곳은 너무 춥다. 그래서 홀로 변화 한 신이 된 것이다. 신이 되었다 함은 인간이 신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밝은 빛으로 온 우주를 비추고 권능(權能)과 조화(造化)로서 만물을 낳으셨다."라고 함으로써 이 때에 온 세상이 창조되었고 바로 현재 학자들이 말하듯 "창시자 효과"가 나타난 때임을 증명하는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오래 오래 살면서 항상 즐거움을 누리셨고, 지극한 기(氣)를 타고 노닐며, 자연과 오묘하게 어울리시면서, 형체가 없어도 볼 수가 있고, 행(行)함이 없어도 이룰 수 있으며, 말이 없어도 행하여졌다."

이 말은 매 구절마다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창시자 효과 당시의 인간의 상황을 나타내는 아주 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우선 "오래

오래 살면서" 라는 기록은 카터 코벨 부부의 요동성 인근 인골(일제 때 일본이 발굴, 국립 미토 대학에서 연구)의 DNA분석 결과 1만 7천 년 전 인골의 수명이 1천 년에 이른다고 한 것과 일치한다. "항상 즐거움을 누리셨고"라는 말은 당시의 삶에는 고통이 없었음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었음을 나타낸다.

"지극한 기(氣)를 타고 노닐며"라는 말에서는 "기"라는 단어에 유의해야 한다.

이 말은 생명과 자연의 변화에 작용하는 힘을 통칭하는 말로 거침이 없는 삶을 즐기면서 살았음을 뜻한다.

"자연과 오묘하게 어울리시면서, 형체가 없어도 볼 수가 있고,

행(行)함이 없어도 이룰 수 있으며, 말이 없어도 행하여졌다"

이 말에는 후대의 종교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즉 후대에 생긴 인간의 모든 종교에 소원을 비는 행위가 시작된 근원이기 때문이다.

4) 언어의 폭발과 아리랑의 생성





이 때에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상호 대화를 위해 언어가 아프리카

시절 8천 개에서 수 십 배로 폭발하였다. 언어 폭팔의 과정은 인간의 집단화,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 관측 및 정의, 천문 관측, 자녀 및 후대 교육, 집단별 역할 기능의 세분화 등이 그 원인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의 이러한 언어 폭발과정을 증거 하듯 러시아의 세르게이 스타로스틴 교수는 이 때부터 사용된 우랄 알타이

어가 중국어의 모어(母語)라고 주장하였고 구한말 선교사로 한국어 연구 전문가인 호머 할버트는 한국어와 인도어(타밀어, 드라비다어, 산스크립트어)는 그 어원이 같다고 주장했다. 즉 인도 유로어, 페르시아어, 유럽어 등 모든 언어의 근원이 모두 한국어인 것이다. 이 때 생긴 언어 중 유일하게 전 세계에 남아있는 말이 창조자의 이름 즉, "알"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민족들이 발전시킨 언어에는 페르시아 외에 거의 없고 유라시아 주요 지명에만 있다.

* 세르게이 스타로스틴

세르게이 아나톨례비치 스타로스틴(러시아어: ܡܵ݀ܳܵ?ܹ ܐ݂ܾܽܰ?ܻ݌ܸܵܲ݇ ܡ݂ܰ?ܾ݂ܸ݀݁ܽ, 1953년 3월 24일 ~ 2005년 9월 30일)은 러시아의 역사언어학자이다. 스타로스틴은 조어(祖語)에 대한 연구, 특히 알타이어족과 드네카프카스어족 가설에 대한 연구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키란티 조어, 티베트버마 조어, 예니세이 조어, 북카프카스 조어, 알타이 조어를 만드는 데에기여했다. 그의 아들 게오르기 스타로스틴도 언어학자이다.



* 호머 할버트

호머 베잘렐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년 1월 26일 ~ 1949년 8월 5일)는 미국의 감리교회선교사이자, 육영공원에 교사로 근무하여 영어를 가르쳤던 교육인으로 한국의 항일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헐벗 또는 흘법(訖法), 할보(轄甫)이었다. 그는 고종 황제의 최 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고종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은 외국인이었고, 한국의 분리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 1907년 헤이그 비밀밀사에 적극 지원하여 밀사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매우 유창하게 하였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대한제국 시대에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어니스트 베델(영국 출신)과 더불어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이 외에도

- 인간이 집단화되어 식량 확보를 위한 사냥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고고학 적 유물에서 개선된 사냥 도구를 발견함)

- 자연 현상의 관찰(낮과 밤, 계절, 시간, 동식물, 천체의 움직임 등)과 천지인이 하나의 생명이며 인간이 자연에서 나왔다는 삼신 사상 서양 사람들의 표현에 의하면 소위 샤머니즘이 생성되었다.(천부경,

삼일신고 참조)

4) 모계 사회였다. 이 시기의 모계사회에 관한 기록은 박재상의 부도지 기록되어 있으며 유대인들이 쓴 성경 창세기 인간 창조의



부계 위주 기록은 바로 이 바이칼 창시자 효과 이후의 전승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 부도지 1장

第一章

마고성(麻姑城)은 지상(地上)에서 가장 높은 성(城)이다. 천부(天符)를 봉수(奉守)하여, 선천(先天)을 계승(喩承)하였다. 성중(成中)의 사방(四方)에 네 명의 천인(天人)이 있어, 관(管)을 쌓아 놓고, 음(音)을 만드

니, 첫째는 황궁(黃穹)씨요, 둘째는 백소(白巢)씨요, 셋째는 청궁(靑穹)씨요, 넷째는 흑소(黑巢)씨였다. 두 궁씨의 어머니는 궁희(穹姬)씨요, 두 소씨의 어머니는 소희(巢姬)씨였다. 궁희와 소희는 모두 마고(麻姑)의 딸이었다. 마고는 짐세(朕世)에서 태여나 희노(喜怒)의 감정이 없으므로, 선천(先天)을 남자로 하고, 후천(後天)을 여자로 하여, 배우자가 없이, 궁희와 소희를 낳았다. 궁희와 소희도 역시 선천의 정을 받아, 결혼을 하지 아니하고, 두 천인(天人)과 두 천녀(天女)를 낳았다. 합하여 네 천녀였다.

麻姑城은 地上最高大城이니 奉守天符하야 喩承先天이라, 成中四方에 有四位天人이 堤管調音하니 長曰 黃穹氏오 次曰 白巢氏오 三曰 靑穹氏오 四曰 黑巢氏也라. 兩穹氏之母曰穹姬오 兩巢氏之母曰巢姬니 二姬는 皆麻姑之女也라. 麻姑ㅣ生於朕世하야 無喜怒之情하니 先天爲男하고 後天爲女하야 無配而生二姬하고 二姬ㅣ赤受其

精하야 無配而生二天人二天女하니 合四天人四天女야라.

라. 아리랑의 내용

1) 개요

바이칼에서 형성된 인간의 창조주에 대한 관점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수 만년이 걸린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최초로 "알"이라는 명칭이 나타난 시기를 근거로 유추해볼 수밖에 없다. 엣킨슨 박사가 창시자 효과가 나타난 시기를 기원전 5만년이라고 했고 삼성기 전 하권에 한국의 건국이 기원 전 7만 년이며 게르만족의 모체인 아리안 족이 인도 북부 초원지대에 나타난 시기가 기원전 2-3 만 년 전이라고 했으므로 알이 나타난 시기는 대략 기원전 5-6만 년 전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간이 창조주를 알게되기 까지는 바이칼 일대에서 멈춘 이후 1-2만년이 소요되었을 것이고 우리 한국의 역사 속에서는 한인 시대에 속한다.

이 1-2만년간 있었던 일을 현재의 인간의 여러 특징을 고려하고 고기를 참조하여 묘사해 볼 수 있겠다. 우선 자연에 대한 오랜 관찰을 입에서 입으로 후손에게 전했을 것이고 아프리카에서부터 사용해온 단순한 숫자나 기호를 활용하여 남겼으리라고 본다. 이 사상이 천부경의 사상이며 원래는 한문글자를 빼야 하므로 숫자로만 되어 있었을 것이고 요약하면 하늘, 땅, 사람 즉 자연이 하나라는 사상이다. 이 사상은 역사 이후 인간집단이 문자로 만든 인본주의 사상과 대조되는 말이다. 이 자연주의 유일신 사상은 하늘과 땅과 인간과 그 속에 있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 자연에서 나왔고 각기 그 역할이 있으며 서로 영향을 미치며 의지해야 산다는 사상이다. 결과적으로 우주는 하나의 큰 알과 같은 생명체인 자연 이다. 인간은 이러한 창조주 즉 자연을 바이칼 거주 수만 년 만에 알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천부경은 홍수 이후에 구전에서 한문이 보태어져서 이 세상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마. 아리랑의 전파

지구상 마지막 빙하기인 뷔름 빙하기에 바이칼 호에서 창시자(알) 효과가 있은 이후부터 홍수 이전까지 수 만년은 지구의 네안데르탈인에게는 이 최초의 호모사피엔스에게 인식된 "알"이 주도하는 알"의 세계였다.

부도지의 기록에 따라 바이칼의 호모사피엔스가 동서남북으로 분산된 사실은 전술한 이홍규 박사의 미토 콘드리아 유전자 이동도에서도 분명하게 증거한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은 하나님의 자손(알의 자손)이라고 하였으며 특히 서쪽으로 간 족속은 자신들의 이름을 아예 알족(아리안: "이안"은 한문의 "인"에서 따온 것으로 보임)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기원전2-3만 년 전





에 인도 북부 발하슈 호와 알알해 지역 초원 지대에 있었던 아리안 족이다. 바이칼에서 분산한 이 들 제족은 모두 가는 곳마다 자신들이 살던 지명에 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4대강의 인본주의 문명 발상지는 여기서 제외된다.

뷔름 빙하기의 마지막 간빙기인 홍수이전 알의 시대에 알 족이 거쳐간 알의 지역은 다음과 같다.

가 북쪽: 황궁씨

이들은 바이칼 알 집단의 지도자들로써 주된 임무는 길흉을 점치고

계절과 자연 칼 호수의 북쪽인 천산 쪽으로 갔으나 추워서 남쪽으

로 돌아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이 거쳐간 지역의 알이 남아있는 지역의 이름은 우랄산맥, 알타이산맥, 알 물(아무르 강: 중국인들은 흑룡강이라고 개칭하였음) 등이 있다. 우리에게는 아리랑 노래가 남아있다.

나. 동쪽: 청궁씨

이들은 해가 뜨는 동쪽으로 간 사람들로 에스키모와 인디언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육로나 해로를 따라 베링해협을 건너가면서 그땅을 알라스카(알에서 새가 날아간 곳) 또는 알류산 열도라는 이름을

지었다.

다. 서쪽: 백소씨

이들은 달이 지는 서쪽으로 간 사람들로 과거 네안데르탈인들의 지나온 길을 따라 시베리아의 북쪽 초원지대를 따라 서진하면서 발하슈호, 알알해, 알아랏, 알프스산 등 지명을 남겼다. 재미있는 말은 알프스라는 이름으로 한국어로 알을 벗어났다는 뜻으로 보이며 이





는 당시 거곳 사람들이 식인종이었음과 그 의미가 일치한다.

라. 흑소씨

이들은 남쪽 따뜻한 곳으로 간 사람들로 중국의 황하, 양자강을 거쳐 베트남, 인도네시아 쪽으로 갔는데 이들에게서는 알이라는 지명을 찾아 볼 수 없다. 자연신을 싫어하고 인본신을 선호하는 중국인들의 민족성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마. 해안으로의 이동

그리스 설화집인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따르면 인간이 신에게 바칠 제물에 대해서 신과 협정을 맺고 있을 때, 소의 뼈를 가지런히 정렬하여 이를 윤기가 흐르는 비계로 감싸고, 살코기와 내장을 가죽으로 감싸 제우스 신에게 어느 것을 가져갈 것인지 선택하게 하였다. 프로메테우스의 계락을 간파한 제우스는 분노하여 인류에게서 불을 빼앗는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속여 꺼지지 않는

불을 회향목 안에 넣어 인간에게 몰래 주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프

로메테우스(그리스어: ԰ՑՏՌՇՈՅ??)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포스의 신들보다 한 세대 앞서는 티탄족에 속하는 신이다. '먼저 생각하는 사람, 선지자(先知者)'이라는 뜻이다. 티탄 족인 이아페토스의 아들이며, 아틀라스, 에피메테우스, 메노이티오스, 헤스페로스 등의 형제였다. 프로메테우스는 제 1세대 티탄족인 이아페토스와 바다의 요정인 클리메네(혹은 아시아) 사이에서 탄생하였다. 그는 원래 티탄 신들의 심부름꾼 역할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프로메테우스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흥미를 끌게 되는 사건으로는 그와 제우스 사이에 벌어진 권력다툼이다. 이 사건이 인간의 운명과 간접적으로 얽힘으





로써 프로메테우스의 존재는 인류 문명사에서 신화적 해석을 하는 데 종종 언급된다. 더군다나 아래에 보게 될 권력다툼은 고대 그리스의 문학과 철학에서 즐겨 다루어진 소재로 손꼽히기도 한다.

이 기록에서 티탄족의 불의 신 이름이 그 발음으로 볼 때 한국어 "불을 맡았어"에서 온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로써 바이칼 창시자 언어는 해양 길은 통해 그리스까지 전달되었고 "알"이 그리스 12신 이전의 창조자 이름이었음을 시사한다. 이를 증거하듯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이집트, 히브리 모두 우주가 알이었다는 창조신화를 가지고 있다.

















3. 삼한 시대의 아리랑

가. 삼한의 정의

삼한은 일 한에서 갈라진 세 개의 한은 말한다. 기원전 7만 년 경 바이칼의 한국이 하나였다가 세 개로 분리된 것을 말한다. 분리된 시기는 기원전 1만4천년 경 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가 시작되어 홍수가 시작된 후에 약 6천여 년 간이다. 히말라야산맥 동쪽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다. 삼한은 홍수 기간 인 6천여 년 간 바이칼에서 따뜻한 남쪽 지역으로 이동한 세 부류의 한국인들의 집단을 말한다.진한, 마한(막한 莫韓 또는 모한 母韓), 그리고 변한(辯韓) 또는 번한 繁韓) 을 뜻한다. 중국이나 이조가 "3한이 한반도 내의 군장 국가다"라고 하는 말은 자신이 삼한 중 하나인 번한 출신임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다.





나. 삼한의 분리

1) 모한(모한母韓 막한漠韓, 또는 마한馬韓)

한문 글자로 만든 이 이름은 홍수이후 기원전 약 8천 년 경에 상형 문자를 통해 붙여진 이름으로 그 이전 기원 전 6-7만년 경에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워 졌는지 알 수 없지만 어머니한국, 모체가 되는 한국, 말이 많은 한국 또는 넓고 막막한 한국이라는 뜻으로 모두 북쪽 바이칼 호수와 천산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말 한다. 모한 인들은 기원전 1만4천년 경부터 기원전 8천년 경까지 계속된 홍수로 해수면이 140m이상 높아졌음에도 고향을 떠나지 안고 살아온 사람들로 지금의 몰골, 브리야트, 에벤키족 등을 말한다.

2) 변한(辯韓)

변한(辯韓) 또는 번한 繁韓)으로도 불리는 이 사람들은 홍수 이후 황하 지역으로 몰린 사람들을 말한다. 이곳은 비옥한 황하 지역의 집성 농사로 인구가 폭발하여 번성한 한국을 말하며 5만년 이상 내려온 자연이 창조주라는 사상을 버리고 인간이 창조주이며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 사상으로 물든 사람들이다. 이들이 농



경을 통해 문자의 세상 즉, 황하 문명을 만들었는데 나일강 문명, 메소포파미아 문명, 간지서 인다스강 문명과 함께 세계 4대 문명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알은 자연보다 인간, 인간관계 .사회. 국가, 인류에 치중되어 있고 비금도 앎(아리랑)이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이 발향으로 급속히 확장되고 있다. 자신의 키는 한 치도 늘일수 없으면서....

*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6)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 황하 인구 증가

즉 쌀을 주식으로 삼는 지역은 애초에 다른 지역보다 인구 밀도가 높다. 그것은 쌀이 가지는 특징으로 몇 가지 비타민만 제공해 주면 다른 작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면적 당 부양 인구가 높게 된다 마한과 진한에 비해 번한 사람들은 비옥한 황하 유역 농사를 통해 인구를 상대적으로 늘렸고 이 인구를 기반으로 많은 군사력을 빨리 확보할 수 있었다.

3) 진한(眞韓)

진한은 진짜 한이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바이칼에서 창시자 효과를 최초로 경험한 한국의 지도 집단으로 제사장 집단이었다. 이들의 주 임무는 종교를 이용하여 아리랑을 전파하는 일 즉, 호모 엘렉투스를 호모 사피엔스로 만드는 이이었다. 삼신사상, 홍익 인간 정신, 경천애인, 제세 이화 정신도 여기서 나왔다. 양심에 민감하였다. 이들은 죄에 민감해서 계속된 홍수가 창조주에게 인간이 집단을 만들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성경 창세기 노아의 홍수 원인과



동일) 그래서 이들은 많은 비가 내리고 홍수가 시작되자 산 위로 올라가 살았으며 남쪽으로의 이동도 산맥을 이용했고 과거 5만 년 간 바이칼 한국의 유산을 가장 잘 보존해 왔다.

조상들의 기록에 의하면 먹지 말라던 포도나무의 열매를 산채로 나무에 달린 것을 먹은 것과 이 때부터 정신이 혼미해져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경에서는 동산나무의 실과를 먹은 것)에 기인된 것으로 믿었다.

진한 인들은 수만 년 간 자연에 적응하며 계절별 현상과 천문 관찰로 일관한 사람들로 지금까지 알의 전통을 계승한 사람들이며 몽골인들이 솔롱고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로 천산, 알타이 산, 타림분지, 청해성, 운남성을 따라 양자강 상류, 양자강 중류(중경, 계림), 양자강 하구(상하이)로 남하한 부도지의 청소씨 사람들이었고 우리 조상들이었다.

다. 샤머니즘

1) 샤머니즘에 대한 서양식 정의

우리는 여기서 서양 사람들이 잘 모르고 말하는 삼한이즘, 즉 샤머니즘에 대해 좀더 상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샤머니즘의 정확한 의미는 바이칼 창시자 효과 때부터 호모사피엔스에게 계승되어온 삼한의 자연주의 창조주 인식에서 파생된 인식이나 행동에 불과하

다. 지역별 계층별, 식량 획득 방법애 따라 차이가 날 수 있으나 근본은 우주, 자연과 인간이 시공간을 넘어 하나의 생명체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살아있다는 것을 안다는 의



미에서 사람이라고 부른다.

* 샤머니즘[ shamanism ]

초자연적인 존재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주술이나 종교이다. 엑스터시[忘我·脫我·恍惚]와 같은 이상심리 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접촉·교섭하여, 이 과정 중에 점복(占卜)·예언·치병(治病)·제의(祭儀)·사령(死靈)의 인도(引導) 등을 행하는 주술·종교적 직능자인 샤먼을 중심

으로 하는 종교현상을 말한다. 북아시아의 샤머니즘이 가장 고전적·전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역에 따라 여러 샤머니즘의 형태가 있으며, 다른 종교현상과 복합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샤먼이란 말은 17세기 후반 트란스바이칼 지방과 예니세이강가에서 퉁구스인(人)을 접했던 한 러시아인에 의하여 알려졌는데, 이 말의 어원에 대하여 19세기의 동양학자들은 샤먼의 관념 내용과 병행하여 산스크리트의 승려를 뜻하는 시라마나(?ramaa), 팔리어(語)의 사마나(samaa)에서 샤먼의 어원을 찾는 수입어설을 주장하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 J.네메스와 B.라우퍼 등은 퉁구스계 제종족 사이에서 주술사의 일종을 지칭하는 ?aman, saman, s'aman 등에서 유래하였다는 퉁구스 토착어설을 주장하였다.

이같이 샤먼의 어원에 대한 해설은 구구하나, 대체로 퉁구스 토착어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실제로 샤먼이란 말은 퉁구스·부랴트·야쿠트족에서만 쓰이는 말이

며, 또한 샤먼의 역할이 북아시아 제 종족 사이에서는 매우 중요하고 유사하지만 샤먼을 지칭하는 명칭은 여러 가지이고, 그 의미도 다양하다.

* 분포와 역사

본래 샤머니즘이라는 말은 북아시아의 제종족, 즉 보굴 ·오스댜크 ·사모예드 ·퉁구스족(族) 등 우랄 알타이 제종족과, 유카기르 ·축치 코리야크족 등의 고아시아족의 종교체계와 현상을 지칭한 것이었지만, 점차 종교학 ·민족학 ·인류학 등에서 세계 각지의 유사종교 현상을 의미하는 용어로서 널리 사용되었다. 샤머니즘이 처음 관찰된 곳이 시베리아이기 때문에, 샤머니즘의 지방적 의미는 일단 북아시아 제민족에서 행하는 종교현상을 지칭하는 것이 되었고, 또한 베링




해협으로부터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북아시아 전역 자체 안의 ‘샤머니즘 문화파동(Schamanistsche Kulturwelle)’으로 인하여 북아시아 샤머니즘은 독자적 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샤머니즘은 가장 고전적 ·전형적 형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학문적 의미에서 볼 때 샤머니즘은 북아시아 이외에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와 남 ·북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지에 분포하는 하나의 원초적 종교형태이다.

독일의 일부 고고학자들은 라스코동굴벽화에서 남서 유럽 후기 구석기시대 샤머니즘의 존재를 상정(想定) 하기도 하지만 이는 단정적인 것은 못 된다. 시베리아 고고학의 성과에 의하면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야 희미하게나마 샤머니즘의 존재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한편 민족학의 측면에서는 샤먼의 보조령(補助靈) ·보호령이 대부분 동물 모습의 정령이고, 샤먼의 복식에 해골 ·새 ·동물무늬의 모티프가 그려진다. 그리고 샤먼이 된 동기 중에, 샤먼 후보자가 해골로 화하고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체험을 한 자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샤머니즘은 동물 층이라는 일련의 수렵민적 관념 ·습속에서 발생하였다고 한다. 또한 역사발전에 따른 사회 ·경제의 변천과 종교적 신앙의 변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샤머니즘의 기원을 토테미즘에서 찾는 종교사가들은, 샤먼은 원래 정령을 지배하는 일이 가능했던 토템 동물의 계승자로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발전하면서 토템 신앙에서 샤머니즘적 이데올로기와 의례로 진화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개는 샤머니즘이 계급발생 이전 시대와 식량의 수렵 ·채집 단계에서 생성 ·발달했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 입무 방법과 과정

M.엘리아데는 중앙 ·북동 아시아의 예로서 샤먼이 되는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다고 한다. ① 샤먼적 직능의 세습적 전달에 의한 샤먼, 즉 세습무(世襲巫) ② 신 ·정령의 소명(召命)에 의한 샤먼, 즉 강신무(降神巫) ③ 자유의지 또는 씨족의 의지에 의한 개인적 샤먼이 있다고 하는데, 이 중 세습무와 강신무가 전형적이다. 세습무이든 강신무이든, 장래의 샤먼 후보자는 어릴 때부터 그 소질을 보여 매우 경질적이고 우울하며, 민감하고 몽롱하여 환각과 황홀상태




에 빠지기 쉽다.

샤먼은 성별에 구애 없이 남자가 되기도 하고 또 여자가 되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입무과정에서는 무병(巫病)을 심하게 앓거나 환상 경험이라는 특수한 체험을 거치게 된다. 에스키모족(族)의 예를 보면 원인 모를 병을 앓거나 혼자 고행을 하다가 환상 속에서 신 ·정령을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순간 이것을 경험한 사람은 신 ·정령과 접한 것으로 여겨 샤먼을 찾아가 병을 고친 뒤, 그 샤먼에게

서 샤먼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배우고 나서 독자적인 샤먼이 된다. 그런데 샤먼이 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무병이나 환상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부족도 있다. 예를 들면 차리카우아 아파치족의 일부 샤먼은 환상을 경험하지 않고, 한 샤먼에게 학습하고 샤먼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 학습 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경우 무병이나 환상을 경험한 샤먼과 비교하여 그 기능 ·능력 면에서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환상 ·무병을 경험하는 일은 신 ·정령의 부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회피할 수는 없다. 길리야크족의 한 샤먼이 “내가 만약 샤먼이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그들이 이 러한 강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샤먼은 무격(巫覡)·주의(呪湢)·사제(司祭)·예언자, 신령(神靈)의 대변자, 사령(死靈)의 인도자 등으로 기능하며, 사람들은 샤먼이 엑스터시의 기술로 초인격적인 상태가 되어 초인적 능력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 한국의 샤머니즘

샤먼을 한자(漢字)로 무격이라고 쓰는데, 무(巫:여성), 격(覡:남성)을 차용한 말이다. 따라서 샤머니즘을 무격신앙 ·무속(巫俗)신앙이라 하며, 샤먼을 무(巫) ·무녀(巫女) ·무당(巫堂) ·무자(巫子) ·무복(巫卜) ·신자(神子) ·단골 ·만신 ·박수 ·심방 등으로 부르지만, 대개는 남녀의 성에 따라 박수(남성) ·무당(여성)의 호칭이 가장 많이 사용된다. 한국 무속의 샤머니즘 여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긍정 ·부정으로 학설이 나뉘며, 또한 북부의 강신무는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계통이고 남부의 세습무는 남방계의 주술사 계통이라는 설도 있으나, 무속은 그 전체가 샤머니즘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념이다. 한국 무속의 기




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아주 오랜 고대사회 때부터 한민족의 주요한 신앙형태였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국조 단군이 무당이라는 설도 있지만, 무속이 문헌상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로서, 신라 2대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왕호(王筃)이자 무칭(巫睨)을 의미하며, 이 외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무당의 기록

이 보인다. 이렇듯 오랜 역사를 가진 무속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대다수 민중 속에서 크게 변질됨이 없이 존속되어 왔다. 무당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를 보이는데, 남부지역은 혈통을 따라 대대로 무당의 사제권이 계승되는 세습무가 지배적인 데 비해, 중 ·북부지역은 신(神)의 영력(靈力)에

의해 무당이 되는 강신무가 지배적이다. 이 같은 무당의 성격차에 따라서 무속의 신관(神觀) ·신단(神壇) ·제의식(祭儀式) 등 전반에 걸쳐 대조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샤머니즘 [shamanism] (두산백과, 두산백과)

2) 현대의 샤머니즘

샤머니즘은 7만 년 이상 호모시피엔스에게 계승된 인간의 기본 심성이고 사고체계이며 가치관으로 알의 신앙이 그 기초이다.

17세기에 러시아 학자가 트랜스 바이칼 지역의 에벤키 족 한 무당에게서 받은 샤머니즘은 한국 말 삼한이라는 말을 발음되는 대로 기록한 것으로 과거 마한지역의 민간에서 계승되어온 토속신앙이름의 발음일 뿐이다. 샤머니즘은 자연이 창조주이고 인간도 자연에서 나왔으며 자연과 인간은 하나의 생명체로써 인간의 모든 문제는 자연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심리, 사고, 행동 체계이다. 따라서 샤머니즘을 주관하는 무당은 자연과 합일 할 수 있고 합일한 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접촉·교섭하여, 이 과정 중에 점복(占卜)·예언·치병(治病)·제의(祭儀)·사령(死靈)의 인도(引導) 등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양 학자들은 샤머니즘의 분포 범위가 북아시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 중앙아시아와 남 ·북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지에 분포한다고 하나 독일과 다른 유럽 지역과 아프리카에도 있는 전 세계적인 분포를 가지고 있다.

또 서양 학자들은 샤머니즘의 생성 시기를 신석기 시대인 기원 전 만 오천 년 전부터라고 하나 샤머니즘에는 돌을 깨는 것부터 금기 시 했으므로 이러한 시기 규정도 맞지 않아 독일의 일부 고고학자들의 생각이 맞다.

성경 창세기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금기 지시와 가인과 아벨, 홍수 설화 등 창세기의 대부분 주제는 알의 신앙 . 즉, 자연을 보호하라는 자연보호 신앙에서 나왔으므로 샤머니즘을 원시신앙이고 미신이라고 한다면 성경 자체가 샤머니즘이고 미신이다.

한국은 바이칼 한국 때부터 단군, 신라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유일신을 섬겨왔으며 자연을 나의 생명시 하며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고 자연을 지극히 사랑하고 자연을 섬기는 무당의 나라이다.

3) 현재까지 한국에 남아있는 고대의 하나님

가) 이름

알이라는 호칭은 홍수 이후 한알님에서 하늘님으로 변하였고 여기서 나온 하나님과 하느님이라는 호칭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데 현재 창조주의 이름으로 종교적 용어로 둘 다 쓰이고 있으며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으로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으로 쓰고 있다. 필자의 생각은 하나님이 맞다. 하느님은 홍수 이후 하늘을 경외하는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나) 언어

한국인의 삶과 환경에 대한 기억과 사고, 정서 등 모든 생각을 좌우하는 언어는 시공이 모두 알(자연, 우주, 인간 즉 천, 지, 인)에서

비롯되어 있고 이 알은 주로 자연이 인간의 길흉과 운명을 좌우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많이 가지고 있 다. 다른 민족에게서 볼 수 없는 가장큰 생각은 자연에 대한 적응의 기준에서 나온 양심이다. 선과 악의 기준이 되는 이 양심은 성경의 기준이나 민주주의의 가치를 능가하고 더 근원적이다. 그리고 체질과 먹는 것, 입는 것 죽음에 대한 언어는 오랜 기간을 산에서 살아와 그런지 산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운명은 사주 팔자로, 탄생은 삼신할미가 시간이 인간이므로 죽음 이후에도 내세가 있고 자연이나 숫자, 과거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점을 칠 수 있으

며 인체를 자연에 기준을 두고 손금이나 관상을 보고 방향을 중시하여 택일을 하고 자연이나 크고 강한 대상과 합일하여 길흉을 점치고 예방을 한다. 부적은 부도의 글로 자연에게 보내는 소원으로 삼아 방에 붙인다. 자연과 통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축지와 둔갑 등을 도술이라고 하면서 구사한다.

다) 삶의 터전

샴한의 원조면서 인위적인 방법으로 농경을 하여 자연을 해치는 방

법으로 살지 않고 자연을 해치지 않고 살수 있는 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왔다. 바이칼에서 산을 따라 이동하다가 고조선 시대에는 중국 동해안, 요동, 한반도를 포함하는 자연적 생존성이 강한 바닷가로 이동했고 마지막에 한반도 남한으로 이동(6.25 때 피난), 정



착한 것이 그것이다.

라) 왕조의 정책

우리 민족사 중 자연의 법칙을 가장 많이 어긴 왕조가 이씨 왕조이다. 이 이씨들은 당나라의 후예로 건국 시 태종 때부터 전통적인 동

예의지국을 버리고 명나라의 홍무 예제를 들여왔다. 이들은 양반과 선비제도를 들여와 혈통부터 계급적으로 바꾸고 나라를 계급화 했으며 세종을 중심으로 고려와 고조선, 삼한, 한국의 역사를 말살하고 중국의 것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이조 500년을 왕족끼리 죽고 죽이는 피의 역사로 바꾸고 당쟁과 지방싸움이 난무하는 나라로 바꾸었다. 반면에 고려는 노예제도(광종 때 신라가 당나라에서 받아드린 노비 안건법)를 없애고 특산물 장려, 무역 등을 장려하여 평화를 이루고 부유하게 살았으나 남의 나라는 침략하지 아니한 대조적인 나라였다.

마) 삼한시대의 이라랑을 현대에 남아있는 한국 샤머니즘의 특징을 통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자연의 모든 것이 살아있다(샤머니즘, 기)

2) 땅도 하나의 인간과 같이 인간의 생명과 연결된 하나의 생명이

다.(풍수지리,삼신할미)

3) 자연을 해치면 인간도 상한다.(나무와 흙으로만 집과 건물, 무덤, 비석을 만들고 돌은 쪼개지 않는다)



4) 인체와 자연은 같다(지명에 신의 이름, 인체의 부위 적용, 동의보감)

5) 세상 이치는 음양과 오행으로 이루어져 있다(음양 오행설, 점 )

6) 인간의 운명은 우주의 움직임과 상호 연결되어 있다(사주 팔자, 주역)

7) 자연이 인간을 낳았다.(신토불이)

8) 산 것은 먹지 말 것(금단의 과일, 살생 유택)



















4. 한웅시대의 아리랑

가. 개요

일반적으로 사가들은 한웅 시대가 18 세에 걸쳐 1.565년 지속된 것으로 본다. 고조선의 건국이 기원전 2.333년이니까 한웅의 건국은 기원전 3.898년이다. 이 시기는 뷔름 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가 온 이후 해수면의 높이를 약 150m 높인 대 홍수 시기 이후 안정된 시기로 보인다. 이 때에 바이칼에서 분산한 호모사피엔스 중 동방의 남쪽으로 이동한 소위 황궁씨들의 일부는 홍수의 종료를 기정사실로 하고 요하 지역 저지대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자연사랑과 함께 인간의 벼 농사를 포용하는 의미에서 국호를 볏알 = 배달(벼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고 하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글자로 표현하면 이 문명이 기원 전 4천 년 경 요하 문명이다.

* 요하문명

요하 문명 일명 홍산문화는 1908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으며 연대는 기원전 4700년 ~ 기원전 2900년 경으로 지금까지 츠펑(赤峰, 발견 당시엔 열하성), 링위안(凌源), 젠핑(建平), 차오양(朝陽) 등 500여곳의 유적을 찾아냈다. 발견 지역은 옌산 산맥의 북쪽 랴오허 지류의 서 랴오허 상류 부근에 널리 퍼져 있다. 중국에 의해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싱룽와 문화(중국어 간체: ?隆?文化, 정체: 흥륭와문화(興隆窪

文化), 병음: x?nglongw? wenhua Xinglongwa culture[*]), 훙산 문화(중국어 간체: ?山文化, 정체: 紅山文化, 병음: hongsh?n wenhua), 자오바오거우 문화(중국어 정체: 趙拱溝文化, 병음: Zhaob?og?u wenhua), 신러 문화(중국어 간체: 新??址, 정체: 新樂遺跡, 병음: X?nle Yizh? Xinle culture[*])등의 요하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문화의 단계를 넘어 세계의 새로운 문명으로 보아 '요하문




명'(遼河文明)으로 명명(命名)하여 부르고 있다.

이들의 주류는 모한(오가 또는 구리라고도 불렀음) 사람들이었다. 이들 황궁씨들의 일부는 홍수를 피하면서 고비 사막, 타림 분지, 청해,신강성,운남성을 거쳐 산맥을 이용하여 남쪽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들은 운남성(양자강 상류)와 양자강 하류에서 한인 시대의 전통을 이은 농경 문명을 이루었고 이것이 바로 기원 전4천 년 경 장강 문명이고 우리는 이들을 진한이라고 부른다.

* 장강 문명

장강 문명(長江文明)은 중국 장강(양자강) 유역에서 일어난 고대 문명의 총칭이

다. 황하 문명과 함께 중국의 대표 문명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장강 문명의 시기는 황하 문명보다 1000여b년 앞서고 요하문명과 같은 시기인 기원전 4000년 경으로 추측되며, 벼농사를 하였는데 이들은 홍수를 피해 산맥을 따라 양자강 상류로 내려온 고 삼한의 진한 인드로 보인다.

또 일부 황궁씨들은 중국의 황하로 내려갔는데 이들은 집단 농경에 성공하면서 기원전 3천 년 경 황하 문명을 이루면서 인구가 폭발하고 힘이 세어지자 한웅의 자연 공동체에 반기를 들고 6만 년 동안 내려온 신앙 즉, 자연이 인간을 창조했고 세상을 좌지우지한다는 아리랑 신앙을 버리고 자신들이 세상을 마음대로 한다는 인본주의 유일신 신앙을 숭상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곧 번한(지금의 중국)이다. 이 두 세력의 충돌이 기원 전 2.400년 경 치우(蚩尤)와 헌원(軒轅)이 싸운 탁록의 전투이다.





나. 탁록의 전쟁

기원 전 2.700년 경 자연신, 알을 섬기던 한웅시대의 제14대 자오지 한웅(치우)과 농경신을 섬기게 된 중국의 실질적인 시조라는 황제

헌원 간 황하유역 땅(중국인들은 희대(희대)지역이라고 부름)의 주도권을 두고 도합73회의 전쟁을 벌렸는데 마한과 진한은 치우가 승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중국 측 기록에는 저들의 조상인 헌원이 승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하튼 큰 전쟁이 있었고 이 전쟁이후 삼한은 중국과 단군조선으로 갈라졌다. 탁록의 전투 때 치우의 군사는 銅鐵器를, 헌원의 군사는 석기를 사용했다. 그 결과 현재까지도 치우는 전쟁의 神으로 중국인들로부터 숭상되고 있다. 치우기라고 하여 군신이자 전쟁신으로 숭배된다. 치우는 천하를 통일한 후, 동서남북 중앙으로 땅을 나누고 그 책임자를 帝라 명명하여 통치 시켰던 바, 청제, 백제, 적제, 흑제, 황제가 그들이다. 그래서 황제란 이들 중 중앙을 관활하는 총독을 말한다. 치우는 자기에게 패한 헌원을 중앙을 다스리는 黃帝로 임명했던 것인데, 이 때문에 황제 헌원이 탄생된 것이다. 헌원은 동서남북중의 중앙의 임금이라는 뜻에서 누를 황자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 전쟁 이후 화하 족의 힘은 날

로 강성해져 중국의 대 부분은 헌원을 시조로 하는 농경민족이 점령했고 그 후 한웅의 무리는 그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고 자연을 해치지 않고 살 수 있는 만주일대와 중국의 서해안, 한 반도로 모여들

었다. 치우는 중국의 관경을 개척하고서도 농토를 황제가 이끄는 농민들에게 빼앗긴 것이다. 남아있는 탁록 전투를 설명하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탁록 전투

탁록은 황제 헌원과 동이족 치우 환웅의 싸움터 였다. 황제 헌원은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이에 대항해 온다. 그리하여 동방 고대사에서 저 유명한 탁록 대전(배달국에 대한 서방 한족의 반란 사건)이 벌어져 10여 년 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 간다. 천왕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어 탁록을 에워싸 압박하여 쳐들어가 이를 멸하였다. 구리국 14대 “치우천자”시절 제후국 소전의 아들이었던 “헌원”이 반역도모하자 “탁록”에서 사로잡아 신하로 만들었다. 치우 환웅은 군사를 이끌고 몸소 전투에 참가해서 탁록의 유웅이라는 벌판에서 헌원을 격파하니 이 전투를 탁록 대전 이라고 한다. 한단고기에 따르면 탁록전쟁이후 중국 청구로 수도를 이전하였던 치우족과 동방족과 관련하여 "처음 신시 배달국 말기에 치우의 형제가 탁록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 왔다'는 기록이 있다. 탁록의 싸움에서 황제가 승리함으로써 중원을 차지했고 중화문명이 형성됐다고 보는 이도 있다. 중국 신화에 따르면 황제와 치우가 수십 번 전쟁을 했으나 결국 '탁록 전쟁'에서 황제가 승리했고, 치우가 죽은 자리에서 붉은 피가 하늘로 치솟았다고 한다. 그은 치우가 이나고 치우비라고 주장되고 있다.

그리고 이 탁록 전쟁 이후 중국 대륙의 삼한이 황해 연안 3 한(북부여, 중부여, 남부여)로 바뀌었으나 소도, 산천 유람, 정령숭배, 천문관측, 고인돌, 년, 월, 일 시간 개념, 주술 자연에서의 의식주 해결 등 삼한이즘은 없어지지 않았다.

헌원과 치우간의 전쟁을 현대적 관점에서 분석해보면 우선 치우는

먼저 개발한 철제 무기의 강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병사들이 산동 반도와 중국 해안 및 한반도 산악 출신으로 대부분 자연 상태에서 살아왔고 해전에 능한 사람들이었으나 헌원의 군대는 보잘 것 없는 무기와 장비를 가졌지만 황하의 만곡부 집산 농경지역의 인구 밀집


지역 농민들이어서 조련이 용이하였고 그 임무도 강으로 둘러싸인 황하 삼각형 지역(희대 지역)을 자연적 이점을 이용하여 방어할 수 있어서 치우와의 지구전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장기전을 치르는 동앙 헌원은 풍부한 농산물의 비축 능력과 내선의 이점을 이용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으나 치우는 식량이 분산되어 있었고 보급품 충당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요약하면 헌원은 황하 삼각지의 좁은 땅을 병력과 식량이 풍부한 상태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으나 치우는 그 근거지인 요동 해안과 양자강을 출발하여 황하 남쪽 돌출부까지 이동해야 했으므로 병참선이 너무 길고 병력 집중이 어려운 상태였던 약점이 있었다. 당시 치우와 헌원에 관한 고기에 기록을 보자.

* 삼성기 전(全)하(下) 원동중 지음

《밀기(密記)》에서 말한다.「한국의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强族)이 있어서 걱정거리였다. 한웅은 마침내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만들고 전계(佺戒)를 베풀어 무리를 모아 서약을 시켜 선악을 상주고 벌하는 법을 갖게 하였다. 이로




부터 슬그머니 토벌하여 벌할 뜻을 품었다.」

時族筃不一俗尙漸岐原住者爲虎新住者爲熊虎性嗜貪殘忍專事掠奪熊性愚 愎自恃不肯和調雖居同穴久益疎遠未嘗匘貸不通婚嫁事每多不服咸未有一 其途也

이때에 무리의 이름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고 풍속도 오히려 점점 달라졌다. 원래 살던 무리는 범 무리였으며 새로 살기 시작한 것은 곰 무리였다. 범 무리의 성질은 잔악한 짓을 즐기며 탐욕이 많아서 오로지

약탈을 일삼았고 곰 무리의 성질은 어리석으며 또 자만에 쌓여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비록 같은 굴에 산 지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날로 멀어지기만 해서 일찍이 서로 도울 줄도 몰랐고 혼인도 터놓고 한 적이 없었다. 일마다 서로 따르지 않았고 모두가 하나같이 그 길을 같이 한 적이 없었다.

* 여기서 범은 중국인들을 가리킨다

是熊女君聞桓雄有神德乃率衆往見曰願賜一穴廛一爲神戒之盟雄 乃許之使之奠接生子有産虎終不能悛放之四海桓族之興始此焉

이에 이르러 곰 무리의 여왕(熊女君)은 한웅이 신과 같은 덕이 있다함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찾아가 뵙고 말한다.「원컨대 한 굴에 함께 사는 저희들을 위하여 굴 하나를 내려주시고 신계(神戒)의 무리(神戒之盟)로 받아 주옵소서.」하니 한웅

이 이를 허락하시고 저들을 받아들여 아들을 낳고 산업을 갖게(有産)하였다. 그러나 범 무리(虎)는 끝내 그 성질을 고치지 못하므로 이를 사해(四海)로 내쫓았다. 한족(桓族)의 일어남이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後有葛古桓雄樳炎農之國劃定彊界又數炩而有慈烏支桓雄神勇冠絶以銅頭 鐵額能作大霧造九冶而採圠鑄鐵作兵天下大畏之世筃爲蚩尤天王蚩尤俗言 雷雨大作山河改換之義也




뒤에 갈고(曷古) 한웅이 나셔서 염제신농(炎帝神農)의 나라와 땅의 경계를 정했다.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慈烏智) 한웅이 나셨는데, 신(神)같은 용맹이 뛰어 났으니(神勇冠絶) 머리와 이마는 구리와 철의 모습(銅頭鐵額)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 불렀으니 치우(蚩尤)란 속된 말로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을 가진다.

* 염제 신농은 황제 헌원과 같이 농경 집단을 이끈 지도자이다. 후절은 치우의 중국 관경을 농토로 바꾼 역사의 시작을 말하는 것 같다.

蚩尤天王見炎農之衰遂抱雄宜屢起天兵於西又自索度進兵據有淮岱之間及 軒侯之立也直赴0鹿之野擒軒轅而臣之後遣吳將軍西擊高辛有功

치우천왕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 차례 천병(天兵)을 서쪽으로 일으켰다. 또 색도(索度)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淮岱)의 사이에 웅거하였다.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황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吳將軍)을 보내 서쪽으로 제곡고신(帝곡高辛)을 쳐 공을 세우게 하더라.

時天下鼎峙0之北有大撓東有倉?西有軒轅自相以兵欲專其勝而未也初軒 轅稍後起於蚩尤每戰不利欲依大撓而未

得又依倉0而不得二國皆蚩尤之徒 也大撓嘗學干支之術倉?受符宜之文嬾時諸侯罔不臣事者亦以此也

한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의 북쪽에 대효(大撓)가 있었고, 동쪽엔 창힐이 있었으며, 서쪽엔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차지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황제헌원은 치우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大撓)에 의존코자 했으나 이룰 수 없었고 또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었으니 이는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효는 일찍이 간지(干支)의 술(術)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符都)의 글을 배웠다. 당시의 제후들이 신하로서 섬기지 않는 자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

* 치우와 헌원을 서로 사촌 형제지간이다(전흥상 목사님 주장)

司馬遷史記曰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爲暴天下莫能伐軒轅攝政蚩尤有兄弟 八十一人拄獸身人語銅頭鐵額食沙造五丘杖刀戟太弩威振天下蚩尤古天子 之筃也

사마천의《사기》에 말하기를,「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지극히 횡포하였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을 때 헌원이 섭정했다. 치우의 형제가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五丘杖), 도극(刀戟), 태노

(太弩)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라고 했다.

치우는 한웅조선의 존재 및 우리나라의 전통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로 치우를 이해하면 한웅 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 후대에 영향을 미친 치우의 중요한 행적은 다음과 같다.

1) 한인 시대 천산 지역의 금속문명의 도입 및 이를 중국의 농토 개척 및 도로 개척 도구로 활용

2) 치우의 중원 관경 개척 기록은 한웅 시대 1.500여년의 대부분을 중국의 농토 개척에 치중한 것을 시사한다.

3) 한웅은 자연신 제사를 중심으로 신정 정치를 했으나 헌원과 신농



등 농경 민족들은 인본 신을 섬길 것을 주장(황제를 하늘의 아들로 부르고 이 전통은 후대. 당나라까지 이어짐)하고 농경 치국을 하였다.

4) 중국이 황하를 중심으로 농경문화를 융성시킨 기원 전 3천년 경 이후 한웅조선과 단군조선은 쇠퇴해 가고 있었고 신정을 선호하는 주민들은 중국의 동해안과, 만주, 한반도, 일본으로 피난했다

5) 이 때 단군조선으로 피난한 사람들 중 진한 제사장들이 신라의 최초 성씨들이고 이들이 치우 전통을 처음 한반도로 가져 왔다.

* 삼성기 전(全)하(下) 원동중 지음

蘇塗之立皆有戒忠孝信勇仁五常之道也

蘇塗之側必立0堂使未婚子弟講習事物蓋讀書習射馳馬巤節歌樂拳搏0術釗六芸之類也

소도(蘇塗)가 서면 언제나 계(戒)가 있나니 바로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오상(五常)의 길이니라. 소도의 곁에 반드시 경당을 세우고 결혼하지 않은 사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고, 노래를 배우며 격투기, 검술 등의 여섯 가지 기예를 말한다.

* 소도는 옛말로 솟대 즉 솟아 오른 대라는 뜻이고 하늘나라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성화의 표현이다

라. 번한(중국)의 분리

인구가 번성해진 번(繁)한(韓)은 처음에는 황제 헌원이 다스리는 한웅의 제후국이었으나 나중에 그 이름을 요(嶢), 순(舜), 하(夏), 은(殷), 주(周)라고 부르고 이 나라들이 중국의 고대 국가이다. 이들은 바이칼 시대부터 내려온 상형문자를 그들의 글자로 발전 시켰는데 이 것이 한(漢)문(文)이다. 자신들은 한(漢)나라 이름을 따 글자 에



명칭을 존경하는 뜻으로 붙였지만 우리는 이 한(漢)이라는 뜻을 천자문에서 놈 한이라고 부른다. 물가에서 살아온 근본 없고 막 되먹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번한이 분리된 경위를 한단고기와 중국의 역사 기록으로 상세히 살펴보면 한웅의 배달 국이 건국된 시기가 단군 조선 이전 1.565년이고 단군 조선의 건국이 기원전 2.333년이므로 한웅의 배달국 건국 시기는 기원 전 3.898년이다. 탁록의 전투에서 헌원과 싸운 치우 천왕이 18대 한웅 중 14대 한웅이므로 탁록의 전쟁이 기원 전 2.700년경에 있었던 사건임과 일치한다. 중국이 한웅조선에서 갈라져 나간 번한 임을 증거하는 중요한 사실은 중

국이 그들의 조상이라고 숭상하는 삼조(三朝)가 태호 복희씨, 신농씨, 치우씨 또는 황제 헌원인데 태호는 태우의 한웅으로 배달국 제5대 한웅이고 치우는 제14대 한웅인 치우이며 헌원은 치우와 사촌이다 신농씨만 농경신이므로 삼조를 고려하면 배달국까지 한국과 중국의 조상은 같다. 또 삼황오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삼황은 복희, 여와, 신농 또는 복희, 신농 헌원이고 오제는 황제(黃帝) 헌원과 그의 자손인 소고(少?), 제곡(帝?), 제지(帝摯), 제요(帝堯) 를 말한다. 그러므로 중국의 모든 신화를 고려하더라도 그들은 배달나라에서 갈라진 번한이다.

마. 아리랑(알)의 계승

1) 한단고기의 기록

* 삼성기 전(全)상하




(上) 立都神市 國 倍達 입도 신시하시고 국칭 배달이라 하시다.

도읍이름에 신(神)자가 붙어 있으므로 홍수 이전 알의 기본 신앙은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천신을 모시는 신시가 만들어지니 이 나라가 곧 배달국이다 여기서 신의 이름이 알에서 천신(天神)으로 바뀌었음을 볼 때 6천 년 간 홍수가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여 전지전능한 신이 우주인 알에서 하늘로 바뀌었음을 본다. 그러나 국호가 배달(벼농사와 함께하시는 알)이었음을 볼 때 홍수 이후 인간 집단의 집성 농사를 인정하면서도 과거 5만 년 이상 내려오던 알 신앙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擇三七日 祭天神 忌愼外物 閉門自修 택삼칠일하여 제천신 하시며 기신 외물하여 폐문 자수하시며~

삼칠이 되는 날(21일)을 잡아 천신께 제를 드리고 주위의 것들을 멀리하며 문을 걸고 스스로 수행을 쌓으며

여기서 수행은 욕심이 일어나 자연이 남용되는 것을 자제했다는 의미로 옛글에 조화(造化)의 과정이라고도 했다

呪願有功 服藥成仙 劃卦知來 주원유공 하시며 복약성선 하시며 획괘 지래하시며소원을 빌어 공을 이루시고 좋은 것들을 드시고 신선에 이르시니 괘을 짚어 앞일에 통하시게 되고~ 執象運神 집상 운신하시노라.

천신을 자유자재로 움직이시니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장악하시어 관장 하시노라.

命?靈諸哲爲輔 納熊氏女爲后 명군령제철하시어 위보하시고 납웅녀하시어 위후




하시니~

명석하고 뛰어난 인재를 찾아 보필케 하고 웅씨 집안의 여자를 맞아 비로 맞으시고는~

여기서 신선에 이르는 것은 홍수 기간 중 살았던 안전한 산중의 삶으로 돌아가서 홍수 이전 자연과의 완전한 조화의 상태로 되돌아가

기를 애쓰는 것이고 괘를 짚는 것, 자연을 다스리는 것도 홍수 이전 5만 년으로 돌아가려는 샤머니즘의 발현이다.

定婚嫁之  以獸皮爲幣 耕種有畜 정혼가지례하고 이수피로 위폐하고 경종유축하고~

혼사를 정하여 예를 지내는 것은 짐승의 가죽으로 예를 표하는 것으로 하고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가축을 키우게 하시고~

置市交易 九域 貢賦 鳥獸率舞. 치시교역하시고 구역이 공부하니 조수솔무라

물물교환을 할 수 있게 시장을 두고 아홉 부족들이 짐승과 농작물을 바치니 새와 짐승들까지도 춤을 추는 살기 좋은 나라이니라.

後人 奉之爲地上最高之神 世祀不絶 후인이 봉지위지상최고지신하여 제사부절하니라

후세에 이르러서고 천제님을 지상최고신으로 받들어 제가 끊이지가 않았다고 한다.

이 기록은 삼한이 하나인 시대 즉 중국이 분리되기 이전의 삶의 상태에서 번한이 떨어져 나간 이후 단군 시대에 변화된 내용을 극명하게 알려준다. 즉 혼사를 정하여 예를 지내고 짐승의 가죽으로 예를 표하며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가축을 키우고 물물교환을 할 수 있게 시장을 두고 마한을 중심으로 짐승과 농작물을 세금으로 바치



는 것이었다.

여기서 유의 할 것은 고조선이 마한 지역(요동성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는 것이다 웅녀의 이야기는 남성 우위의 가족 제도와 1부1처제를 구축한 것으로 보이고 이를 농경을 위한 집단의 기본 단위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 삼성기(全)하편

人類之祖曰那般初 阿曼相遇之處曰阿耳斯0夢得天神之敎而自成婚 則九桓之族皆其後也

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이라 한다. 처음 아만(阿曼)과 서로 만난 곳은 아이사타(阿耳斯0)라고 하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한(九桓)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時有盤固者好奇術欲分道而往請乃許之遂積財 率十干十二支之神將 共工有巢有苗有燧偕至三危山拉林洞窟而立爲君謂之諸?是謂盤固可汗也

때에 반고(盤固)라는 자가 있어 기이한 술법을 즐기며 길을 나누어 가기(分道)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재화와 보물을 꾸리고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의 신장(神將)들을 거느리고 공공(共工), 유소(有巢), 유묘(有苗), 유수(有燧) 등과 함께 삼위산(三危山)의 납림동굴(拉林洞窟)에 이르러 군주가 되었는데 이를 제견이라 이르니 그를 반고가한(盤固可汗)이라 했다.

* 삼성기 전 상 하권은 모두 구한이 나오므로 중국이 분리된 이후 모한의 역사를 옮긴 것으로 보이나. 고려의 학자인 안함로과 신라의 스님인 원동중의 글이 일치되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위의 내용은 주로 당시 분리된 중국인의 기원을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於是桓雄率衆三千降于太白山頂神壇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也將風伯雨師雲師而主穀主命主刑主病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余事在世理化弘益人間






이 떼에 한웅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아래에 풍사, 우사. 우사들로 하여금 360여 세상일을 주관하게 하시고 제세이화, 홍익인간을 국시로 나라를 세우니라

이 기록은 홍수 이전부터 황하지역에는 삼한에서 분리되어 알의 자연 신앙을 버리고 술법으로 인본주의 인간 신을 숭상하는 기이한

술법을 즐기며 길을 나누어 가기(分道)를 원하는 무리가 있었다는 뜻으로 보인다.

2) 치우 전통의 한반도 이전

탁록 전쟁 중이거나 또 그 전쟁 이후 많은 한웅 조선 백성들이 안전한 한반도로 배를 이용하여 한반도로 피난했을 것으로 보여지는

데 따라서 당시의 많은 풍습도 함께 왔으리라 판단된다. 현재 남아 있는 흔적은 치우 기념 행사와 함께 남아있고 치우의 능 이름에서 따온 강릉의 단오절과 관련이 깊다. 우리 나라에서 단오(端午)는 음력 5월 5일을 명절로 이르는 말이다. 1년 중 기가 가장 센 날로 치우의 생일이다. 이 날 한국 각 지방마다 단오와 관련된 전통적인 행사가 열린다. 대한민국의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는 강릉 단오제가2005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무형유산인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Masterpieces of the Oral and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에 선정되었다.

단오는 일명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午節)', '단양(端陽)', '오월절(五月節)'이라고도 한다. 특히 '술의 날','수릿날(戌衣日·水瀨日)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술의'와 '수리'는 모두 수레를 뜻하는 것으로, 한국의 옛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때 수레가 중요한 기구였음을 의미



한다고 한다. 또는, '수리'는 '신(神)'과 '높다

(高)'는 뜻이 있어서, '높은 신(선황인 4천왕 중 치우 천황)이 오시는 날'의 뜻으로도 해석된다. 단오는 각 지방마다 독특한 명칭이 있

다.

- 단양수리(아리와 비교되는 말로 아리가 하나님이면 수리는 최고의 인간 즉 치우를 의미한다) - 전라남도

- 며느리 날 - 경상북도. 며느리가 친정을 찾아 하루 종일 그네를 뛰며 놀 수 있는 날이라고 한다.

- 과부 시집가는 날 - 강릉

- 미나리 환갑날 - 경기도 동두천

- 소 군둘레 끼우는 날 - 강원도 삼척.

예로부터 한국에서는 월과 일이 모두 홀수이면서 같은 숫자가 되는 날은 생기가 넘치므로 좋은 날이라 생각하여 대개 명절로 정하고 이날을 즐겨 왔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 번 째를 뜻하는 글자이며, '오(午)'는 다섯을 뜻하므로 단오는 '초닷새(음력 5월 5일)'를 칭한다. 또 중오는 '오(五)'의 수가 겹치는 5월 5일으로써 양기가 왕성한 날인데 일설에는 치우 천자의 탄생일이라고도 한다. 아울러 이 시기는 파종이 끝나는 때와 맞물려, 새로 지은 한 해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날이기도 했다. 단오와 농사도 연관이 있다.

- 단오빔

한국에서는 설, 추석과 함께 단오에 연중 3회 신성 의상인 얇은 명

주로 만든 빔을 입는데, 단오에 입는 빔을 단오빔이라 한다.

- 단오제



조선시대에는 군. 현 단위로 단오제가 행하여졌는데, 그 중 '강릉 단오제'가 가장 유명하다.

- 머리감기

삶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잘 빠지지 않고, 윤기도

난다 하여, 단오날 창포물에 머리를 감던 풍속이다. 아울러 창포 뿌리를 잘라내어 그것으로 비녀를 만들어 머리에 꽂기도 하였다.

- 단오선 선물하기

단오가 되면 곧 더위가 시작하므로, 단오날 임금이 직접 각 재상, 시종들에게 부채를 하사했던 풍속이다. 그 부채의 종류는승두선,어

두선,사두선합죽선반죽선외 각선내각선등이 있다.

- 천중부적

단오 날에는 나쁜 귀신을 쫓기 위해 치우 부적을 만들어 붙였다. 이를 '단오부', '천중부적', '치우부적'이라고 한다.

- 익모초와 쑥 뜯기

익모초와 쑥을 말려두었다가 약으로 쓰기 위해 단오 날 익모초와 쑥을 뜯는 풍속이다. 본래 익모초와 쑥은 한약방에서 많이 쓰이는 약초인데, 단오 무렵에 뜯은 익모초와 쑥이 약효가 많다는 데서 비롯된 풍속이다.

- 그네뛰기

그네뛰기는 동아줄이나 밧줄을 큰 나뭇가지에 매고 그네를 뛰는 것이다. 단오날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고운 옷을 입고 그네를 뛰었다. 외출이 어려웠던 부녀자들이 단오날 만큼은 밖에 나와 그네 뛰는 것이 허용되었으므로, 여자들이 단오날 즐겨 하였다고 한다. 그



네뛰기는 남쪽보다 북쪽 지방으로 갈수록 성했다.

- 씨름

씨름은 상고시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남자들의 대표적인 놀이로서, 소년이나 장정들이 넓고 평평한 백사장이나 마당에서 모여 서로

힘과 슬기를 겨루는 것이다. 서로 마주 보고 허리를 굽혀서 샅바를 잡아 상대방을 먼저 쓰러뜨리는 놀이이다. 먼저 땅에 쓰러지거나 손, 무릎이 땅에 닿으면 지게 된다. 상으로는 보통 황소를 주었다.

- 제호탕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마시던 약이면서도 청량음료이기도 했다. 단오

부터 그 해 여름까지 내내 더위를 없애고 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시원한 물에 타 먹는다.

- 수리치떡

수리취나 쑥을 짓이겨 멥쌀가루에 넣어 반죽하고, 수레바퀴 모양의 떡살로 문양

을 낸 절편이다

- 앵두화채와 앵두편

앵두는 오디, 산딸기 등과 함께 단오 제철 과실이다. 앵두는 피를 맑게 하고 위를 보호하는 기능이 있고, 단오 무렵부터 더위에 시달려 떨어진 입맛을 다시 돋구는 역할을 한다.

- 기타 한반도로 이전된 풍습들, 천문 관측, 고인돌, 소도, 자연에서 의식주 해결, 농토보다 산천 사랑

3) 아리랑 전통의 단군 조선 이전

가) 평화를 사랑하여 국토를 양보



가장 큰 전통은 과거의 자연사랑 신앙에 인간을 포함시켜 홍익인간을 국시로 삼았는데 농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농민을 인정한 결과 중국대륙의 관경을 치우가 개척하고 농기구를 만들어 주면서 정작 한웅의 땅은 발해만(요동), 중국 동해안, 그리고 한반도로 한정하

여 땅을 파 해치지 않고 자연에서 의식주를 구하는 방법, 즉, 평화를 사랑하여 국토를 양보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후에 공자

의 7대 손 공부는 "조선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가졌으면서도 결코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나)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국경 설정

흔히 고조선의 경계가 단군 조선 건국 떼에 생긴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탁鶸 전투이후 수백 년 간 자연스럽게 생긴 것으로 본다. 그 근거로 진시왕 때 기록을 보면" 진나라 군대가 묘(뫼)족을 붸아 가면(집성 농사에 동원 하려고)그들 자꾸 바닷가로 도망하였다" 는 내용이 있다.

단군 조선의 땅은 요동을 포함하여 한반도, 일본, 중국 동해안이었는데 이 지역은 가축을 키우고 바다에서는 생선을 잡고, 산과 강이 많아 과일과 각종 열매 그리고 채소와 나물을 충분히 채취할 수 있어서 중국처럼 자연 훼손, 속세형성, 집단 농경, 인본주의 없이 자연스럽게 백성들이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 조선(朝鮮)이라는 이름

중국인들이 만든 한문으로 조선(朝鮮) 이라는 이름은 조(朝: 아침 조)해와 달이 있는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고 선(鮮: 고울 선)은 바다에서는 물고기를 잡고 땅에서는 양을 키운다는 뜻으로 가),




나) 항의 설명과 일치한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한인漢人)들은 하늘을 숭배하지 않고 인간을 숭상하여 제사장 왕(王)자를 위에 점을 찍어 주(主) 자로 바꾸어 하늘을 땅을 군대로 빼앗아 가진 주인보다 못하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제사장 왕(王) 자 위에 사람 얼굴을 그려놓고 황(皇)제(帝)라고까지 불렀다. 필자가 기독교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부르는 것이다.

* 이러한 진실을 통해 중국(주로 당唐나라, 명明나라)과 이조(李朝)가 우리 역

사를 얼마나 조작했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알에 대한 우리 민족의 신앙은 중국의 위협을 감수하고 영토를 줄이면서까지 고수하면서 지켜낸 우리 민족의 중심이다.

라) 당시의 알의 전통을 유적을 통해 과학적으로 살펴보자

1) 요하 문명지역과 유물

사진과 같이 요하 지역 유물에 수많은 옥기와 여신상은 있으나 무기류가 없는 점을 미루어 과거 5만 년 간 바이칼 호의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모계 사회가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장강 문명의 유물

장강 문명에서 발견된 기원 전 5천 년 경 볍씨

옥으로 만든 장식

황하 문명보다 약 천 년 정도 이전에 있었던 이 장강 문명은 다 같이 한웅 조선의 유물이다. 장강의 유물은 요하 문명과 그 시기가 비슷하고 옥으로 되어 있고 무기류가 없는 점은 요하 문명과 동일하나 요하지역이 여성 상위 문명이라면 장강의 경우는 농사를 지어야 했으므로 남성 우위의 문명으로 보인다. 둘 다 무기류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단군 조선은 한인시대의 알신앙과 삼한의 샤머니즘이 계승된 국가였다고 볼 수 있다.



5. 단군시대의 아리랑

가 개요

단군 조선 시대의 아리랑을 이해하는 것은 당시 동방에서의 자연주의 삶과 인본주의 삶 간의 투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선 중국의 고대의 우두머리들이 점령한 지역인 하, 은, 주 같은 나라들과 단군 조선의 공동체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선비족 일부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인구를 불리고 군대를 키워 농토를 더 넓히기 위해 필요한 지여 개념의 공동체가 하, 은, 주등 헌원을 조상으로 모시는 사람들의 것이고 자연이 주는 데로 흩어져 살면서 하늘에 대한 제사장의 제사에 의존해서 살아온 공동체가 한웅 조선이었다. 탁록의 전쟁이 끝난 후 동방은 이러한 식으로 번한과 나머지2한(마한과 진한으로 분리되었는데 헌원의 후예들의 나라는 중국이고 치우의 후예들의 나라는 단군 조선이다. 그래서 단군조선은 영토 개념이 아니고 삶의 방식, 현대 말로 종교의 개념이다. 그래서 자연 주의 생활 방식으로 살면서 제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터전이 되어준 곳이 바로 단군조선 영토이다. 그래서 단군조선은, 모한의 중심인 요동"(요하 문명)과 진한의 본거지인 상하이(장강문명), 치우의 본거지인 웅진(산동 반도)을 잇는 중국 동해안과 한반도가 된 것





이며 단군조선은 그 영토 자체가 알이랑(아리랑) 함께 한 지역이다.

나. 단군세기(한단고기) 저자 분석

* 이암(李?, 1297년 ~ 1364년)

이암(李?, 1297년 ~ 1364년)은 고려 말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호는 행촌(杏村),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원래 이름은 군해(君?), 자는 익지(翼之)이며 후에 이름을 암(?), 자를 고운(古雲)으로 고쳤다. 판밀직사사 감찰대부(判密直司事監察大夫)인 존비(尊庇)의 손자이며, 철원군(鐵原君) 우(瑀)의 아들이다. 도촌(桃村) 이교(李嶠)가 그의 동생이다. 이들의 가문은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누대공신재상지종(累代功臣宰相之種) 문벌가였으며, 조선건국에도 많은 공헌을 하면서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原)을 비롯하여 조선초기와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관과 무관을 배출하면서 조선의 명족이 되었다.(워키백과)

기록에서 보듯이 이암은 이성계와 같이 당나라 황실 출신 이씨(李氏)로 아버지 나라 조선의 존재를 가장 두려워하는 성씨이다. 이들은 북위를 세운 탁발부(졸본 출신 유목민, 한인 시대의 하층 계급)의 후예로써 희대지역에서 농사를 통해 중국에서 자손 만대 군대의

힘을 통해 왕권을 유지해온 종족이다. 이들은 황하 유역에 살면서 그들의 성을 묘(木 자의 기원임)판에서 낳았다고 해서 이(李)라고 했고 이암도 그들 중에 속한다.

그러나 이암이 쓴 단군 세기 서문에 보면 한웅 조선의 알의 유산을 거의 100% 이어받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취지는 고려의 역사를 말살하고 자신들 이씨가 고려의 적통 임을 나타내려는 의도도 있지만 한반도가 치우의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지역임을 고려한 기록으로 보인다. 그의;책 서문에 나타난 샤머니즘(알) 정신은





다음과 같다.

* 중국계 이암이 기록한 단군세게 서문의 알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에, 선비의 기세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성품을 깨닫게 됨은 천신과 그 뿌리를 같이 함이고,그 삶이 세상에 나는 것은 자연과 그 기운을 같이 함이며, 그 정신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모든 목숨 있는 것들과 그 업을 같이 하는 것이다. 하나를 알아 셋을 품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따라서 굳은 마음이 바뀌지 않을 때 (참 나)라고 하며, 신통하여 무었으로 든 바뀔 수 있을 때 신이라고 하나니 참된 나는 신이 머무르는 바른 곳이다."

"따라서 성품과 정신이 잘 어울려서 빈틈이 없으면 세 가지 신이 하나인 상제(上帝)와 같아서 우주만물과도 잘 어울리고, 마음과 기와 몸도 있는 듯 없는 듯 자취도 없이 오랬 동안 존재하게 된다. 감感.식息.촉瘗이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면 그것이 바로 한님 그데로 인 셈이니 이 세상 어디에나 두루 그 덕을 베풀어서 함께 줄거우며 ,하늘,땅, 사람과 더불어 끝없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런 까닦에 가르침을 세우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자기 스스로를 바르게 하고, 그 모습을 뒤집어 바꾸려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모습 없는 것에서부터 바꾸어 나가야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를 알아나가는 단 하나의 길인저! 오호라 슬프다! 부여夫余는 부여 스스로의 길을 잃었으니(부여는 고조선의 다른 이름이다) 그 뒤에는 한족漢族이 부여에 쳐들어와서 점령해 버렸고, 고려高麗는 고려대로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는 몽고蒙古가 고려에 쳐들어와서 차지해 버렸다. 만약 그때에 이보다 먼저 부여에 부여다움이 고스란히 있었다면 한인漢人은 자기 나라로 돌아갔을 것이고,고려에 고려다움이 있었다면 몽고사람들은 몽고로 돌아갔을 것이다."

다. 내용 분석

단군세기의 서문에 나타난 역대 단군의 행적을 통해 본 옛 알의 정



은 다음과 같다.

초대단군 왕검 재위93년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熊씨의 왕녀이며 신묘(b.c.2370)년 5월2일 인시에 밝달나무(檀木)밑에서 태어났다. 신인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겁내어 복종했다.14세 되던 갑진(b.c.2357)년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함을 듣고 그로써 비왕裨王으로 삼고 대읍大邑의 다스림을 대행 하도록 하였다. 무진년(b.c.2333) 제요도당帝堯陶唐때에 단국檀局으로부터 아사달의 檀木단목의 터에 이르르니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天帝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구한九桓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엇다. 이를 단군 왕검이라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제위帝位에 있기를 93년이었으

며 130세 까지 사셨다.

이 기록으로 단군이 웅씨의 왕의 사위이고 웅씨 부인이 드세어 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수련을 했음을 알 수 있고 곰이 사람이 되었고 한국인의 조상이 곰토템 민족이었다는 말도 맞지 않는다.

무진 원년(bc.2333) 바야흐러 신시의 다스림이 시작되었을 때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과 골짜기에 두루 퍼져 살며 풀잎으로 옷을 해입고 맨발로 다녔다. 개천 1565년 상월上月3일에 이르러 신인 왕검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잡았다.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님께 제사를 올렸는데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더라. 마침내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어 그 다스림이 높고 크고 또 맹렬하였으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신시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이름했다.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에 연유하였고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니 다만 너희 부모를 옳게 받들어 모시는 것이 바로 하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고,

앞의 서문 내용 중 한웅 시대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개념이 몇 개 보이는데 물론 중국의 문자로 쓰여진 것이지만 오가의 무리, 산신,신의 덕, 하늘의 뜻, 구한, 천제, 조선 등이 그것이다. 이 것은 이 때의 단군 조선의 모체가 마한이었고 알의 자연신이 홍수 이후에 변하여 천신, 산신으로 또 사람을 신으로 세분화되었으나 자연 사랑의 국토 관을 기본적으로 가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군왕검은 가르침을 내려 말했다. 하늘의 법칙은 하나일 뿐이니 그 문은 둘이 아니니라. 너희 들은 오로지 순수하게 참마음을 다 할 것이니 이로써 너희 마음이 곧 한님을 보게 되리라. 하늘의 뜻은 언제 어디서니 하나이고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한가지라. 이런 까닦에 스스로를 살펴보아 자기의 마음을 알면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도 살 필수 있으리라. 다른 이의 마음을 교화하여 하늘 뜻에 잘 맞출 수 있다면 이로써 세상 어느 곳에도 잘 쓰일 수 있는 것이리라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에 연유하였고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니 다만 너희 부모를 옳게 받들어 모시는 것이 바로 하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고, 또 나라에 까지도 그 힘이 미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충성되고 효도 함이니라.너희가 이 도를 잘 따라 몸에 지닌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먼저 화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 짐승에게도 짝이 있고 다 해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 사내와 계집은 서로 화목하여 원망함 없고 질투함도 없고 음란함도 삼갈 것이다. 너희들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면 크건 작건 가림 없이 모두 아프지 않던가? 서로 사랑할지언정 서로 헐뜯지 말고 서로 도울지언정 서로 다투는 일이 없다면 집안도 나라도 다 크게 일어

나리라. 너희들, 소나 말을 살펴보아도 다만 서로 먹이를 나누워 먹지 않더냐? 너희가 서로 양보하여 서로 어쩌지 않고 함께 일하여 서로 빼앗지 않는다면 나라가 다 융성하리라. 너희들 ,호랑이 무리를 보아라. 힘만 세고 난폭하여신령스럽지 못하더니 비천하게 되어 버렸도다. 너희가 사람다운 성품을 잃고 난폭하게 날뛰지 않는 다면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니라 항상 하늘의 뜻을 받들어 모든 것을 사랑 할지니라.너희는 위태로운 것을 만나면 도울지언정 모욕을 주지 말지니라. 너희 만일 이런 뜻을 어긴다면 영원히 하늘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어 네 한 몸은 물론 집안까지도 다 사라지리라.



앞에 단군의 가르침은 양심, 효도, 가족 시랑, 자연 사랑 네 가지로서 알 시대의 자연 사랑에 인간사랑 즉 홍익인간이 추가되었고 가족이라는 개념은 져 개인주의이고 살육을 일삼던 서양의 네안데르탈인의 특징인 사화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말로서 이 가족 애와 자연 애가 우리의 기본 민족성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너희 만일 논에 불을 일으켜 벼들이 다 타 버리게 된다면 하늘이 이를 벌 할 것이니라. 너희가 아무리 두덮게 싸서 감춘다 해도 그 냄새는 반드시 새어 나오

게 되어 있는 것이니라. 너희는 항상 바른 성품을 공경스럽게 지녀서 사악한 마음을 품지 말 것이며, 나뿐 것을 감추지 말 것이며 재앙을 감추지 말 것이다. 마음을 다스려 하늘을 공경하고 모

든 백성을 가까이하라. 너희는 이로서 끝없는 행복을 누릴 것이나니, 너희 오가의 무리들이여 ,이 뜻을 잘 따를 지어다.

이때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成造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高矢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臣智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奇省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那乙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희羲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尤에게는 군대를 관장케 하였다. 비서갑 비西岬의 하백녀河伯女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애 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淳?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정사 50년(b.c2284)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제帝께서 는 풍백風伯



인 팽우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 강을 평정 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으니 우수주牛首州에 그 비석이 있다.

여기서 단군의 가르침은 4대 강 농경민족들처럼 거짓말하지 말고 양심을 지킬 것과 당시 고조선의 주 백성이 북쪽 마한인들 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단군 왕검 당시 페르시아와 수메르(우수주 牛首州) 등 북쪽 초원지대가 모두 단군의 제사권의 영역 내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무오 51년(b.c2283)임금께서 운사雲師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을 짓고 제천祭天의 단檀을 마리산 摩璃山*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바로 그것이

다. 갑술 67년(b.c2267) 단군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우司共과 만나게 하엿다. 태자는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 하여 주었고 나라의 경계도 따져서 정했으니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두 곳 땅이 우리에게 속하였다. 또 회대淮垈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分朝*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희대 지방은 중국 황하 삼각주 지역이므로 단군 조선 초기까지 중국은 번한이었고 단군의 통제를 받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2세 단군 부루 재위 58년



신시 이래로 하늘에 제사 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다 모여 함께 노래 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於阿歌를 부르며 조상에 대해 고마워하였으며 신인神人이 사방을 다 화합하는 식을 올리니 이게 곧 參佺참전의 계戒가 되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아 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신 은혜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 마세. 어아어아, 착한 마음 큰 활이고 나뿐 마음 과녘이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니 활 줄처럼 똑같으며, 착한 마음 곧은 화살 한 맘으로 똑같아라. 어아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 되어 과녁마다 뚫고지고, 끓는 마음 착한 마음 눈과 같은 악한마음. 어아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만년 크신 은덕 , 한배검이시여, 한배검 이시여.

여기서 이스라엘인들이 죄를 빗나간 화살(하마르티아)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페르시아-에볼라를 거쳐 단군의 언어가 아브라함에게 흘

러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계묘(b.c2238)9월,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 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하도록 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했다.



경술10년(bc2231)4월 밭을 나누고 밭문서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하였다. 임자12년(bc2229)신지神誌인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宜를 만들어 바쳤다.

여기서 돈에 대한 아주 중요한 근거를 발견하게 된다. 경제 활동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속여 이익을 취하는 것을 거짓말을 하고 양심을 속이는 것이므로 죄악시 한 것이다. 성경은 이 교훈을 어겨 세상을 자본주의 지옥으로 만들었다.

3세 단군가륵 재위45년

을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손을 올려놓아 삼육 대례를

행한 다음에 나아가서 말씀드렸다.'신(神)은 능히 만물을 생겨나게 하여 각자 제 성품을 다하게 하심에 신의 깊은 뜻이 있어 백성들은 모두 의지하고 빕니다. 왕은 그 덕과 의로써 세상을 다스려 각각 그 삶을 편안하게 함에 왕의 바른 다스림이 있으니 백성들 모두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다스림은 나라가 선택하

는 것이며 완전함은 백성이 바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7일을 기한으로 삼신님께 나아가 세번을 빌어 온전하게 되기를 다짐하면 구한이 바로 다스려지게 됩니다.

경자 2년 아직 풍속이 하나 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이 있다해도 열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



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니 그글은 다음과 같았다

4세 단군 오사구 재위 38년

갑신 원년(BC 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으로 봉하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겨울 10월에는 북쪽을 순시하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삼신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얻으니 인삼이라고도 하고 선약이라고도 한다. 이 때 이후 신선 불사의 설은 삼을 채집하여 정기를 보호하는일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간혹 이를 얻은 이들이 하는 말이 있으니 '이상스럽고 영험스러워서 매우 기적 같은 경험이 많다'고 했다. 무자 5년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모양의 돈을 만들었다.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

임술 원년(BC 2099) 명을 내려 태백산에 단을 쌓고 사자를 보내 제를 올리게 하다. 계해 2년 5월 황충의 떼가 크게 일어나 온통 밭과 들에 가득 찼다. 단제께서 친히 황충이 휩쓸고 간 밭과 들

을 둘러보시고는 삼신에게 고하여 이를 없애주기를 비니, 며칠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11세 단군 도해 재위 57년

경인 원년(BC 1891) 단제께서는 오가에게 명을 내려 열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셨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 심은 후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의 상으로 모



시고 여기에 제사지내며 웅상이라 이름했다. 이 때 국자랑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가 계책을 올려 말하길,'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신시는 실로 환웅천왕께옵서 개천하시고 무리를 거두심에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세워서 백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이에 천경 신고는 위에 조술하신바요 의관대일은 기꺼이 밑으로 본을 보이는 것이니, 백성들은 범하는 일없고 함께 다스려져 들에는 도적 떼도 없이 스스로 평안하였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 병도 없이 장수하며 주리는 이 없이 풍요로우니, 산에 올라 노래 부르며 달을 맞아 춤추었습니다. 먼곳이라도 이르지 못하는 곳 없고 흥하지 않는 곳 없게 되었으니 덕이 넘치는 가르침은 만백성에게 주어지고,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뜨거운 정이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겨울 10월에 대시전을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니 매우 장려하였다. 돌아가신 천 제 환웅의 모습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번쩍하여 마치 큰 해와 같았다.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비추며 박달나무 밑 환화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원의 한 가운데 앉아 있는것 같았다. 천부의 인을 가지고 대원일의 그림을 누전에 걸어 놓으셨으니 이를 일러 커발한이라 하였다. 사흘동안 재계하시고 이레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위풍이 사해를 움직이는 듯 했다. 이를 간절한 마음으로 쓴 글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하늘은 깊고 고요함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온 누리에 막힘이 없이 가득하리리



모든 것은 다만 참된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땅은 가득 품고 있음에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나 막힘이 없이 드러나리니

모든 일은 다만 부지런히 힘쓰는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사람은 살펴 아는 것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서나 막힘이 없이 고르고 구별함이니

모든 일은 다만 조화를 이룸으로부터 비롯됨이라.

그렇기 때문에 신은 정성스러운 마음에 내려와

성품은 광명을 이루어 세상에 바른 가르침을 펴서

온 누리를 이롭게 하나니

이에 돌에 이글을 새겼다.

12세 단군 아한 재위 52년

정해 원년(BC 1834) 무자 2년 외 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나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였는데 요하

의 남쪽에 이르러자 순수관경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라, 뒤에 저 창해역사 여홍성은 이 비석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변한이라 이르는 곳에

홀로 뛰어난 돌 하나 있었네

받침은 깨지고 철쭉만 붉었는데

글자는 보이지 않고 이끼만 푸르구나



다듬어져 처음 생겼을 때 그대로

흥망의 황혼에 우뚝 서있으니

글에 보이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이 어찌 단군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이 글에 번한이 요하의 남쪽으로 지금의 중국이고 분명히 단군의

땅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인다.

13세 단군 홀달(혹은 대음달) 재위 61년

무술 20년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무진 50년 오성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기묘 61년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백성들은 모두 밥도 먹지 않았으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명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하고 산 것을 죽이지 않으며 널

리 놓아주도록 하였다. 해를 넘겨 장사지낸 후 우가인 고불이 즉

위하였다.

14세 단군 고불 재위 60년

경진 원년(BC 1721)을유 6년 이해에 큰 가뭄이 있었다. 단제께서 몸소 하늘에 기도하여 비오기를 빌며 말씀하시길,'하늘이 크





다 하나 백성이 없으면 무엇에게 베풀 것이며 비는 기름지다 하나 곡식이 없으면 어찌 귀하리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처럼 여기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은 일체일진 대 하늘은 어찌하여 백성을 버리시는가? 이제 비는 곡식을 기름지게 할지며 때 맞춰 구제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말을 마치자 큰 비가 수천리에 삼대처럼 내렸다. 신유 42년 9월 말라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닭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

을해 56년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게 하니 총계 1억 8천만인이었다. 기묘 60년 단제 붕어하시고 대음이 즉위하였다.

당시 1억 8천명의 인구는 이란, 이락(수메르), 러시아를 포함하는 인구이므로 조선의 강역에 중국(번한: 매구여국, 양운국)을 제외한 전

체 아시아가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16세 단군 위나 재위 58년

신미 원년(BC 1610)무술 28년 구한의 여러 한들을 영고탑에 모여 삼신과 상제에게 제사지냈으니 환인 환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모시었다. 닷새 동안 크게 백성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을 외우고 마당밟기를 하였다. 한쪽은 횃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 쪽은 둥글게 모여 서서 춤을 추며 애한의 노래를 불렀다. 애한이란 곧 옛날 신에게 올리는 노래의 종류를





말함이다. 선인들은 환화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다만 꽃이라고만 하였다. 애한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 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애한의 노래는 지금으로 치면 애국가이다. 우리 민족의 자연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5.26 이후 박대통령의 치산치수 정책도 바로 이 정신을 계승한 것이며 메소포타미아(우수국)의 홍수도 이렇게 대처한 것으로 보인다. 의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

갑진 원년(BC 1337) 은나라왕 소을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경인 47년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 영지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을미 52년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라안을 돌아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에 이르러 부로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이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의 자손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동해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 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아갔다.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

병신 원년(BC 1285) 단제 명하사 녹산을 개축시키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엔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시어 묘를 세우고 고등왕을 제사지냈다. 11월 몸소 9한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차례 싸워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번한의 백성들을 회대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앞의 기록을 통해 중국의 고대국가 중 은나라가 조선에 정복된 적이 있고 적어도 기원전 1.300-1.200년까지는 번한의 땅(희대의 땅)이 조선에 속했다 이탈했다 하는 유동적인 상황과 이에 따라 고죽 국?(번한 의 나라들 중 하나) 사람들이 해변가로 피난해 밭을 갈다가 다시 희대의 땅으로 돌아가는 유동적인 상황이 있었던 시기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에도 모여서 노래와 춤을 추고 하늘(알이 하늘로 용어가 변하였으나 하늘의 의미가 천, 지, 인, 삼신인 점은 변함 없었다)에 대한 제사는 계속되었다.

23세 단군 아흘 재위 76년

갑신 원년(BC 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





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 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30세 단군 내휴 재위 35년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는 엄독골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한들과 만난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나라 사람들과도 수교를 맺었다. 병진 5년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33세 단군 감물 재위 24년

임오 원년(BC 819) 계미 2년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 무자 7년 영고탑 서문밖 감물산 밑에 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렸다.

앞의 기록은 기원전 819년 이전에 중국은 없었고 치우 이후에도 중국은 조선의 관할 아래 있었으며 몽고, 흉노 등도 조선의 제사권 아래 있었음을 의미한다.

36세 단군 매륵 재위 58년

정축 원년(BC 704) 갑진 28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무신 32년 서촌의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신해 35년 용마가 천하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더




라. 갑인 38년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에는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무진 52년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갑술 5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마물이 즉위하다.

45세 단군 여루 재위 55년

을유 원년(BC 396)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다. 신축 17년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의 군을 침범하매 수비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부수었다.병진 32년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에 까지 육박해왔다. 이에 번조선이 대장군 우문헌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하고 진조선 막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을 숨겨두고 연나라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정사 33년 연나라 사람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에 주둔하며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였으므로 우문헌이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신미 47년 북막의 추장 액니거길이 조정에 찾아와서 말 200필을 바치고 함께 연나라를 칠 것을 청했다. 마침내 번조선의 젊은 장수 신불사로 하여금 병력 만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나라의 상곡을 공격하고 이를 도와 성읍을 쌓게 하였다. 무인 54년 상곡의 싸움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





해오더니 이 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또 조양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았다.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8년

병진 원년(BC 295)기묘 14년 단군왕검의 묘를 백악산에 세우고

유사에게 명을 내려 사철 이에 제 지내게 하고 단제께서는 1년에 한번 친히 제사를 지냈다. 기유 44년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인사를 올려왔다. 이해 북막의 추장 아리당부가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했으나 단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 때부터 원망하며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임술 57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사 람이었다. 계해 58년 단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하늘에 제사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들과 의논하여 가로 데'옛 우리 선조 열성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실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 없고 겁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 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컨대 그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고 하시니 크게 옥문을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들을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이튿 날 마침내 왕위를 버





리시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하였다. 이 보다 앞서 종실의 대 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

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

기원전 396년경 중국은 전국 시대에 들어온 때이고 전국 7웅의 하나인 연나라의 단군 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반항이 시작되자 기원

전 295년 마지막 단군 고열가는 제정 시대가 끝났음을 알고 스스로 임무를 포기한 흔적이 나타난다. 즉, 단군 조선은 침략으로 망한 것이 아니고 인본주의의 득세로 자연 사랑의 제정을 포기한 것이다.

라. 아리랑의 관점에서 단군 시대의 의미

바이칼에서 창시자 효과를 최초로 경험한 우리 한국인들은 기원전 67.000여 년(근거: 아래)전부터 홍수가 시작되기 전인 기원 전 14.000년까지 53.000년 간 장구한 기간을 전술한 알의 신앙을 유지하면서 살아왔다.

* 아래

한인 63.182년 + 한웅 1.565년+ 단군 2.333년+ 서기 2015년 = 69.095년




(임승국 번역, 주해, 2002년 서울, 정신세계사 p27)

* 우리가 우리역사의 근거로 알고 있는 소위 문자에 의한 역사 기록 가간의 10배이다

이 기간동안 시원 인류인 한국인을 비롯한 아리안(서양인), 인도인, 중국인 등 갈라져 나갔고 이 민족들을 포함한 지구 전체의 원 인류

들의 언어가 형성되었는데 홍수 이후에 동방에서는 중국(번한)의 인본주의 문명에 대항해 마한과 진한 인들은 이 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탁록의 전투처럼 투쟁이 계속되었고 결국 마한과 진한이 합쳐서 단군 조선이 되었다.

* 정확히 말하면 번한을 포기한 것

이 마한과 번한이 바로 단군 조선이다.

과거와 다른 점은 과거 홍수 이전 53.000 여 년 간은 우주의 창조주인 알(지금의 한알님, 또는 하나님)을 제사 대상으로 섬겨왔으나 홍수 이후에는 홍익인간 정신의 농사를 위해 하늘(하늘님, 하느님, 천신天神)을 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 홍수 이후의 시기를 정확하게 말하면 정학하게 말하면 환단고기 삼성기 전 하권 27p의 또 다른 기록인 한인 조선 3.301년 한웅 조선 1.565년 단군 조선 2.333년 도합 7.199년으로 도표 상 홍수기 끝과 거의 일치하는 시기를 뜻한다.





이러한 단군 조선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가 어떻게 나와 알의 신앙이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좀더 상세히 알아보자.

마. 삼국과 알의 계승

단군세기의 기록(전술한 환단고기 114p)sp 의하면 44세 단군 구을 때 기원전 425년까지 단군 조선의 이름은 삼한이었다가 그 때 3조선이라고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고 국호를 대부여(大夫余, 또는 大扶余: 뿌리라는 말의 옛말) 라고 했으므로 이 단군 조선은 삼한으로 2.333년-425년=1.483년 간은 삼한이었다가 조선으로 바뀌었으며 이 이름도 단군 조선이 47세 단군 고열가 때(기원전 238년) 망했으니 425년-238년= 187년 밖에 사용되지 못했다. 조선이 망한 후 대 제사장을 없어 졌으나 과거 삼한의 후예들은 북부여, 부여, 남부여라는 이름으로 황해를 중심으로 중국 동해안(상하이, 산동 반도, 보하이, 한반도 일대에서 알의 전통을 이어간 것 같다. 북부여는 모한의 무리들이었고 남부여는 진한인들 이었으며 부여는 중국에게 붸겨 온 과거 번한의 피난민들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정사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와 백제는 북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모한의 알의 전통을 어느정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고 신라는 중국에서 가장 먼 곳에 있어 비교적 번한의 영향을 덜 받았으므로 알의 전통을 많이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의 신라는 후에 고구려의의 땅에 신라(남부여) 왕실이 피난 온 것이므로 신라가 과거의

알의 전통을 가장 많이 계승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단군 조선이 망한 후(기원 전 238년) 북부여에서 고구려가





건국되기 까지 중국(번한)은 진시왕 이후 혼란기(서한, 신, 동한, 삼

국 등)을 거듭하고 있었고 마한지역과 진한 지역에는 기원전 238년-기원전 37년= 201년의 공백 기간이 있었다.

바 삼국의 유래

여기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삼한이 되었다

가 단군 조선 즉 대부여의 일부가 되었다가 한반도로 모이게 되었는지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이들 삼국의 근본을 알려면 홍수 시대부터 살펴봐야 한다. 기원전 14.000년부터 기원 전 8.000년까지 뷔름 빙하기 마지막 간빙기에 양극의 빙하가 녹고, 6천년간 비만 내려 해수면의 높이가 140-150 m 상승하였을 때 바이칼에서 창조자 하나님의 존재를 제일 먼저 깨달았던 우리 한국인 조상들은 당시, 강 유역이나 바닷가에 살던 모든 인간이 홍수로 죽는 것을 보고 이 홍수의 원인이 그동안 인간이 집단화하면서 자연의 섭리를 거스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성




경 창세기 6장-9장) 그래서 바이칼 한국인들은 농사를 위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세 갈래로 나눠지기 시작했다. 첫째 경우는 남쪽으로 이동하되 홍수를 피하고 하늘과 가까운 곳,즉 산맥을 따라 이동한 집단이고 또 하나는 홍수의 위험을 감수하고 비옥한 황하 저지대로 남하한 집단이며 마지막은 이동하지 않고 조상의 터전에 그대로 머문 집단이다. 첫째의 경우가 진짜 알이라고 해서 이름을 진한(辰韓)이라고 했고 나중에 정말 신이 나는 나라라는 뜻으로 신라라고 했다. 둘째의 경우는 비옥한 지역에서 자신들의 소원대로 집성 농사를 통해 황하의 인구 폭발을 성취했고(이들이 헌원의 자손들이다) 셋째는 모한(마한)으로 구이가 주축이 되어 나중에 고구려가 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삼한에서 삼 조선이 되어 한국인들이 중국의 동해안과 한반도로 피난 온 이후에 생겨난 국가들인데 그 경위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한웅 조선때는 삼한으로 중국, 한반도와, 일본 등 동방 전체를 영토로 했다가 탁록 전투 이후 두개의 한으로 줄어들었고 한국인들은 평야에서 살지 못하고 묘족이라고 해서 산과 해안으로 도망 가 살았으며 당시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을 묘(뫼)족이라고 불렀고 스스로는 한인(漢人)이라고 했으나 우리는 그들을 놈 한(漢 :물가에서 막 자란 놈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후 일어난 단군 조선은 번한(중국)을 제외한 지역(황해를 중심으로 하는 연안 영토)을 가지게 되었고 중국 동해안의 북, 중, 남을 갈라서 막한, 번한, 진한이라고 불렀다. 그 후 기원전 425년(44세 단군 구를 때)부터 이 삼한의 명


칭이 삼한에서 3 조선(막조선, 진조선, 번조선), 또는 대부여(북부여, 부여, 남부여)로 바뀌었다. 이중 가장 고초를 많이 겪은 사람들이 번한 지역 한국인들이었다. 이들은 번한 내륙에서 산동 반도로 붸겨와 살다가 기원전 341년 번조선 왕이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를 당했고

* 서기전341년 경진년(庚辰年) 12월 번조선왕(番朝鮮王) 해인(解仁)이 연(燕)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하니 오가(五加)가 다투어 일어났다. 해인은 번조선의 제68대 왕이며, 일명 산한(山韓)이라고도 한다.

그 다음에 한국인 온조가 중국 하남 위례성에서 백제라는 나라를 세웠으나(기원 후 57년) 중국의 위협을 계속 받아 많은 사람들이 황해를 건너서 한반도 서해안으로 피난을 왔다. 실례로 24대 동성왕(東城, ?~501) 때 비족인 북위가 하북지방을 평정하고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여 수도를 뤄양[洛陽]으로 옮기자(494년) 여기에 위협을 느낀 동성왕이 선비 족이 동족임을 빌미로 휘하장군(태수) 7명에게 선동반도 등 영토의 치리 권을 넘겨주고 실질적으로 나라를 북위에게 복속 시켰다. 이때부터 백제인의 백성들이 중국의 중심이 되었고





그 아들 무령왕이 일부 권솔들을 데리고 한반도로 피난하였다. 이렇게 번조선(번한: 부여, 백제)인들은 막조선(고구려)와 과 진조선(신라)에 비해 아리랑 전통을 유지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 중 우리들의 주류(김씨, 박씨, 경주 6성)인 진한 즉, 신라의 경험은 특이하다. 이들은 바이칼에서 가장 먼저 출발하여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이동한 사람들로 항상 산 위에 살면서 천신 제사를 가장 오랜 동안 바이칼의 원형대로 지냈다. 그 증거가 우리말과 우리 체질, 의식주 생활에 지금까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신라인들의 이동 경로와 기간을 추적하면서 현재의 우리 모습의l 근본을 살퍼 보는 것 또한 흥미 있는 일이다.

1) 우선 신라인들은 바이칼호 또는 그 인근에서 5만 3천 여 년 간 살았다. 그곳은 대부분 표고 2.500m-3.500m의 준령으로 이루어진 고 지대이다. 물은 강이나 시내에서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살던 꽃 피는 산골"이고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이며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고" 남자는 산애(사나이)이고 여자아이는 집에 있는 아이(계집애)이다. 죽으면 산으로 돌아가시고 묘(뫼)를 쓴다. 우리들이 가장 좋아하고 만이 먹은 음식은 쌀이 아니고 콩이다. 두부, 모든 장 류도 산 곡식으로 만들며 모든 산나물(산에서 나는 식물)과 산 곡식, 산 과일(매실)이 약이 된다. 메아리(뫼알: 산에 있는 신), 맷돌(산 돌), 메뚜기(산에서 뛰는 것) 등 수 없이 많다. 산에 사니 당연히 가족중심이다. 반면에 서양은 짝짓기, 사회 중심이다. " 그래서 달노래 가사가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 만년 살고 지고"이다.

2) 그 다음 신라인들은 남쪽으로 이동했는데 저지대를 이용하지 않고 산맥을 따라 이동하였다. 바이칼 인근에서 고비사막을 넘었다. 그래서 우리말에 어려운 시련을 "고비"라고 한다. 그 다음 신라인들은 "타림"(다리목)분지를 건넜다. 그리서 우리말에 잘못을 반복하면 "다리 목을 분질러버린다" 라고 한다. 그 다음 신라인들은 신강성, 청해성을 거쳐 지금의 운남성인 양자강 상류로 왔다. 그 인근

에 계림이 있다. 이들은 황하인들이 문명을 만들기 천년 전, 요하

문명과 같은 시기에 이미 양자강 농경 문명을 만들었다

* 장강문명

장강 문명(長江文明)은 중화인민공화국 장강 유역에서 일어난 고대 문명의 총칭이다. 황하 문명과 함께 중국의 대표 문명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장강 문명의 시기를 기원 전 14,000년경부터 기원 전 1,000년경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이후의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 등의 국가로 발전해 갔다고 하나 실제는 요하와 장강 문명(문명이라기 보다는 집단 농경 시대라고 하는 것이맞다)은 한웅 시대에 진한(장강)과 마한(요하)의 집단 농경 흔적이다. .









6. 신라의 아리랑

가. 단군 조선 멸망 시 한반도 상황

단군 조선은 제사장 국가였기 때문에 제사 기능만 있고 영토 개념은 없었다. 단군 조선이 없어졌다는 말은 군대의 힘으로 농경국가가 생기고 군주가 그 군대로 농토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하든가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천신(알)에 대한 제사와 기도(치성)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았다. 즉, 중국의 인본 집성 농경 사회를 싫어하던 백성들이 모인 지역이 중국의 동부 해안지역, 요하 지역, 한반도, 일본 등 바다를 낀 비 농경지역으로 자연에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한웅과 단군은 이 지역이 알과 닮아 이 지역 백성들을 중점적으로 계도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이 바로 우리가 단군 조선 영토라고 알고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기원 전 3세기 단군이 사라질 때 한반도에는 거의 사람이 살고 있지 않던 수 만 명의 원주민 네안데르탈 인이 살아왔던 상태에서 외부에서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첫째는 기원 전 2.600년 경 헌원과 치우의 탁록 전쟁이후 산동 반도와 중국 해안 일대에서 치우 의 전통을 가지고 한반도로 온 번한과 진한 인들을 기반으로 원래 이 지역의 주인이었던 마한인들 인 오가의 무리, 구이의 무리가 주를 이루었고 양자강에서 배를 타오 온 일부 진한 인(가야의 시조)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BC 341년 46세 단군 보물 때 번조선 왕 해인이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되고 수유 출신 읍차 기후가 자칭 번조선 왕이 되자 산동 반도 일대에서 일부 번한인들이 한반도로 들어왔다. 따라





서 당시 한반도에는 마한 인들이 중심이 되어 번한과 진한 인들이 살고 있다가 고구려에 이어졌다.

따라서 당시 한반도의 알의 전통은 삼한을 통해 한웅조선으로 한웅 조선에서 단군 조선으로 분명히 계승되었고 후에 고구려에 이어 신라로 분명히 계승되었다.

* 삼국 사기 고구려 편

2대 유리왕-19대 광개토대왕 때까지 숙신, 부여, 낙랑 등 마한 내 부족과의 전쟁에서 전통을 지켜 내었고 중국의 연, 후연, 동진, 한나라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나라를 유지하여 단군 조선의 전통을 지켜냄

9대 고국천왕 : 179년~197년 신대왕의 둘째 아들.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의 침입을 막고 대승함. 191년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현 정을 베품. 194년 진대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빈곤을 덜어줌 왕위계승 방법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꿈.

을파소 총리는 우리 민족 3대 경전(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중 하나인 참전계경(일년 366일 동안 매일의 교훈을 적은 책으로 한인 조선 7만 년 전부터 내려온 것) 하나인 참전계경을 정리 발표함

21대 문자왕 : 419년~519년 장수왕의 손자. 494년 물길족에게 멸망한 남부여(신라)의 왕(22대 지증왕)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



들임 497년에 신라 우산성, 512년에 백제 가불성·원산성을 점령함 광개토왕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강성해져 대국으로 발전함

24대 양원왕 : 545년~559년 안원왕의 맏아들. 동위·북제 등에 조공하여 친선을 도모함 547년 백암성·신성 등을 중수함 551년 돌궐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신라·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잃음. 이 백제는 산동 반도의 백제이다.

삼국 사기 백제 편

24대 동성왕(東城, ?~501) 이름은 모대(牟大). 삼근왕의 동생. 493년에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선비족인 북위가 하북지방을 평정하고 효문제(孝文帝)가 즉위 국도를 뤄양[洛陽]으로 옮기자(494) 여기에 위협을 느낀 동성왕이 선비족이 동족임을 빌미로 휘하장군(태수) 7명에게 선동반도 등 영토의 치리 권을 넘겨줌. 실질적으로 나라를 당나라에게 복속시킴. 이때부터 백제인의 백성들이 중국의 중심이 되었고 그 아들 무령왕이 일부 권솔들을 데리고 한반도로 피난. 대륙 백제 유민들이 한반도로 오기 시작 한 시기. 이때부터 북위의 선비족이 중국 황하인의 중심이 되고 그들의 주성인 이씨(李氏)가 번성하게 되었다.



25대 무령왕(武寧, ?~523) 휘는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 아들. 쌍현성(산동 반도?)을 쌓아 외침에 대비함. 나중에 한반도로 피난 와서 죽음. 여 동생(일본 만엽지의 신공 왕후?)이 일본에서 백제 계 왕실의 조상이 됨. 26대 성왕(聖王 ?~554) 휘는 명농. 무령왕의 아들. 황해를 건너가 산동 반도를 점령하고 538년 산동반도에 있는 사비성을 다시 탈환하고 국호를 부여라 함. 554년 남측의 대륙 신라를 공격, 대륙 신라의 유민들과 싸우다가 관상성(상해 인근)에서 전사함. 일명 성명왕 한반도에 백제왕의 무덤은 무령왕릉(공주) 외에는 없고 여타 31명중 30명의 왕 무덤은 모두 중국 동해안, 산동 반도 인근에 있다.

다. 신라 왕실의 한반도 이동

한반도는 홍수 이후 바이칼 한국이 일한에서 삼한으로 갈라진 후 마한, 진한은 변한 중 마한 땅이었다가 고구려 건국이후에는 고구려 땅이었다. 좀더 상세히 살펴보면

1) 단군 조선 이후 한반도의 선 주민은

가) 15만 년 전부터 원래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 수천 명과

나) 바이칼의 창시자 효과 5만 년 경 알의 언어를 가지고 따뜻한 곳으로 내려온 일부 호모사피엔스 수백 명이 원주민으로 살고 있는 가운데

다) 기원 전 2.600년 경 한웅 시대의 말기 탁록 전쟁을 피하여 한웅 조선 백성들 중 중국 동해안에 살던 사람들이 뱃길로 피난을 와서 강릉 지역에 터를 잡은 변한과 진한 인들로 구성됨,



라) BC 341년 46세 단군 보물 때 번조선 왕 해인이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되자 한반도로 피난 온 번조선(번한) 인들(북경과 천진과 중국 동해안 주민들)리 추가됨.

마) 그리고 백제의 시조 온조가 중국의 하남 위례성에서 건국한 이후 AD 500년 제24대 왕 동성왕(東城, ?~501)이 선비 족인 북위가 하북 지방을 평정하고 효문제(孝文帝)가 즉위 국도를 뤄양[洛陽]으로 옮기자(494) 여기에 위협을 느낀 동성왕이 선비족이 동족임을 빌미로 휘하장군(태수) 7명에게 산동반도(웅진) 등 영토의 치리 권을 넘겨주고 제사권 만 갖게되면서 산동반도(웅진)에서 한반도로 피난 온 일부 백제인(번한인)들이 추가됨.

바) 이러한 상태에서 AD 501년 신라(진한지역에서 탄생) 왕실이 한반도로 오게 된 것이다.

요약하면 신라(진한 인) 왕족(제사장)을 중심으로 번한인 일부, 원래 살고 있던 마한인들이 알을 공통점으로 한반도에서 만난 것이다.

2) 신라가 한반도로 오기까지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가) 계림으로 이동

바이칼에서 홍수를 피해 산맥을 통해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을 우리는 진짜 한국인인 진한 인들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바로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과거 바이칼 호모사피엔스 5만년 알의 전통을 언어와 체질 그리고 습관으로 이어받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진한이라는 이름은 홍수 이후에 한문이 일상화되면서 생겼고 스스로 부르는 이름은 그냥 알 사람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이들은 바이칼에서 알타이산맥과 고비사막을 지나 타림(다리 목)분지를 건너 신강성과 청해성 운남성을 지나 양자강 상류, 중경, 계림, 상해를 거쳐 한반도로 왔다. 본토인 몽고인과 브리야트 족은 지금도

유리를 솔롱고스(무지개를 찾아 남쪽으로 간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에게는 자연에서 농토 쟁탈전 없이 자연에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산을 넘어 이동했으므로 먼길과 이동의 악조건을 견디는 특징적 습성이 생겼다. 중국 농경에 속하지 않은 다른 알 민족(고비 사막을 넘어 만주, 요하. 백두산 쪽으로 온 사람들 포함)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우리 언어와 체질, 습관에는 이러한 부분이 많이 나타난다. 그 실례로 우선 언어에는

- 알이랑

- 고비를 넘어

- 다리 목(타림)

- 고개

- 뫼와 관련된 언어(뫼 뛰기: 메뚜기. 메아리, 묏돌(멧돌), 맷돼지, 뫼부리,

- 묘(뫼의 변형된 말), 묘족, 묘를 쓴다 등이 있고

체질에는 변한(중국)을 제외한 모든 한국인들이 그렇지만 수 만 년 동안 산에서 살아서 산중음식, 산 속 생활이 체징에 맞고 병을 치료한다. 산 속의 모든 곡식(주로 콩과 콩으로 만든 모든 장류, 조, 구리, 보리 등 잡곡)과 미네랄이 풍부한 물, 그리고 산에서 나는 모든 나물(약초라고 부름)은 지금도 우리에게 명약이다.

우리의 습관에는 신라가 가져온 습관이 아직도 시중에 많이 남아



있는데, 왕의 옹립, 핏줄 중시, 산과 물을 좋아하는 취향, 불교, 명절(한가위, 단오), 강릉, 풍수지리, 자연 숭배, 인신 숭배 신주단지, 칠성(치성), 삼신할미, 묘 등이 그것이다.

나) 계림-> 상해->한반도로 이동

신라는 한웅조선과 단군조선 당시 조선의 일부 제사장 집단으로 사로, 남부여 라고 불렀고 중국 계림과 충칭, 상해등 중국의 남부 지역에서 제사권과 번한의 군사권이 강해지자 후에 일부 치리권을 행사해 오다가 제22대 지증왕 때(AD500년) 백제 동성왕이 권력을 포기하자 그 이듬해에 당시 고구려 땅이었던 경주로 피난하였다.

3) 신라의 역사

존속 기간: 기원전 57년 ~ 935년(992년) 기원전 57년- 기원 후 500년까지는 중국의 서 신라 시대.

기원 후 500년 지증왕부터 - 935년 경순왕까지는 한반도

수도: 서 신라 금성(김씨의 성, 지금의 상해 인근))

동 신라(경주)

공용어: 신라어

정부 형태: 군주제

초대 군주: 박혁거세

최후 군주: 경순왕

신라 역대왕

1대 혁거세(赫居世) (B.C.57) : 성씨 박(朴), 이름 혁거세 또는 거서간(居西干 혹은 거세간)



홍수 이후 기원전 만 4천 년 경부터 바이칼 일대의 삼 조선(삼한)

인 막조선(莫朝鮮), 진조선(眞朝鮮), 번조선(繁朝鮮) 중 고비 사막 타림분지 신강성 청해성 운남성을 통해 따뜻한 곳으로 남하한 진 조선의 제사장 집단의 대표, 박혁거세, 알영 부인 모두 알의 신화를 가지고 있음

벼농사를 시작한 시대부터 벼(木)를 위해 점을 치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 박(朴)을 성씨로 한데 기인

2대 남해(南解, A.D.5) : 박, 차차웅

3대 유리(儒理, A.D.24) : 박, 이사금

4대 탈해(脫解, A.D.57) : 석, 이사금, 토해(吐解). 최초의 페르시아(또는 인도 계: 속칭 물길족=말갈족)계 왕으로 보임

5대 파사(婆娑, A.D.80) : 박, 이사금, 유리의 둘째 아들.

6대 지마(祇摩, A.D.112) : 박, 이사금, 기미(祇味).





7대 일성(逸聖 ?- A.D.134) : 박, 이사금, 유리의 아들 혹은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

8대 아달라(阿達羅, ?-A.D.154) : 박, 이사금.

페르시아 또는 인도 항해로를 따라 들어온 물길족에게 쫓겨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구려사 문자왕 편)일부는 한반도(가야)또는 일본으로 가고 아달랴 왕은 산맥을 따라 온 곳으로 되돌아 가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게르만 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훈족(고대 삼한 인)의 두목 앗틸라의 상징이 된 것으로 판단

* 아달랴왕과 앗틸라와의 연관성 판단의 근거

1) 아달랴라는 이름과 앗틸라라는 이름이 유사하다

2) 신라인이 훈(원래는 한)족으로 중국에서 흉노라고 불렀고 서양에서는 훈족이라고 불렀다..

3) 신라 아달랴 왕(AD 154)의 후대에 아틸라라는 이름의 훈족의 마

지막 왕이 기록에 나타난 점

4) 신라인들이 한반도에 가서도 화랑도를 만든 것처럼 수천-수만 년 간 산에서 살아온 진한 인들에게 양자강이나 히말라야 산은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다. 아달랴 왕도 마찬가지 경우다. 내륙에서는 수나라의 위협이 해안으로는 페르시아의 위협이 있는 상황에서 해양국가의 왕조가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다.

9대 벌휴(伐休, A.D.184) : 석, 이사금, 탈해의 2대손으로 아버지는 각간(角干) 구추(仇鄒)이다.




10대 내해(奈解, A.D.196) : 석, 이사금, 벌휴(伐休)의 손자.

11대 조분(助賁, A.D.230) : 석, 이사금, 제귀(諸貴). 벌휴의 2대 손으로 아버지는 골정(骨正) 갈문왕이다.

12대 첨해(沾解, A.D.247) : 석, 이사금, 조분의 동생이다.

13대 미추(味鄒, A.D.262) : 김, 이사금, 미조. 김알지(金閼智)의 5대손 구도(仇道)의 아들. 이 때부터 북방 찰기 기마 무사들이 신라의 권력에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알을 제일 많이 안다는 뜻의 한문 이름을 가지고 있다.

* 김씨들은 치우 천왕이후 금속을 다루던 집단들이 가지고 있던 성으로 무사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이 해안 또는 중국 황해 해안을 통해 남하하여(한 나라 또는 낙랑을 거쳐) 신라의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4대 유례(儒巤, A.D.283) : 석, 이사금, 조분의 장자.

15대 기림(基臨, A.D.298) : 석, 이사금, 기립(基立). 조분의 2대손. 父는 이찬 걸숙(乞淑)

16대 흘해(訖解, A.D.310) : 석, 이사금, 내해의 2대손. 父는 각간 우로(于老).

* 물길족(석씨) 왕들과 박씨 김씨 왕들이 혼재

17대 내물(奈勿, A.D.356) : 김, 이사금, 나밀(那密). 구도仇道)의 2대손. 父는 각간 말구(末仇).이 Ei부터 북쪽 출신 김씨들의 왕권



이 확립되었다.

18대 실성(實聖, A.D.402) : 김, 이사금, 김알지의 후손. 父는 대서지 이찬. 내물왕의 둘째 아들 복호는 고구려에, 셋째 아들 미사흔은 일본에 볼모로 보낸다.

19대 눌지(訥祗, A.D.417) : 김, 마립간, 내물왕의 장자. 실성왕을 죽이고 왕이 된다.

20대 자비(A.D.458) : 김, 마립간

21대 소지(炤知, A.D.479) : 김, 마립간, 비처(毗處).

22대 지증(智獞, A.D.500) : 김, 마립간, 휘(諱)는 지대로(智大路). 내물 3대손 갈문왕 습보(習拱)의 아들.

백제가 망한 다음해(AD501년)에 왕실을 한반도로 옮김.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구려사 기록에 의하면 21대 문자왕(419년~519년) 때 494년 물길 족들에게 멸망한 남부여(신라)의 왕(22대 지증왕)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시기에 페르시아 인 들로 같은 시대에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와의 전쟁이 있었고 인도는 굽타 왕조(AD 320-550) 시대이다.

23대 법흥(法興, A.D.514) : 김, 왕, 휘(諱)는 원종(原宗). 연호는 건원(建元)

24대 진흥(眞興, A.D.540) : 김, 왕, 휘(諱)는 삼맥종(삼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

법흥의 왕제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 연호는 개국(開國) 25대



진지(眞智,

A.D.576) : 김, 왕, 휘(諱)는 사륜(舍輪). 진흥의 2자.

6대 진평(眞平, A.D.579) : 김, 왕, 휘(諱)는 백정(白淨). 진흥의 태자 동륜의 아들

. 연호는 건복(建福)

27대 선덕(善德)여왕(A.D.632) : 김, 왕, 휘(諱)는 덕만(德曼). 진평의 장녀. 연호는 인평(仁平)

28대 진덕(眞德)여왕(A.D.647) : 김, 왕, 휘(諱)는 승만(勝曼). 진평의 모제 국반(國飯) 갈문왕의 . 연호는 태화(太和)

29대 태종무열(武烈, A.D.654) : 김, 왕, 휘(諱)는 춘추(春秋). 진지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의 아들

* 태종무열왕

본명 김춘추(金春秋) 재위 654년 ~ 661년

별명 태종공(太宗公), 태종 춘추공(太宗春秋公), 춘추지(春秋智)

출생일 진평왕(眞平王) 25년(604년) 사망일 661년 음력 6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4년 ~ 661년 음력 6월)은 신라(新羅)의 제29대 임금(재위 654년 ~ 661년)이다. 무열왕(武烈王)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은 김(金), 휘는 춘추(春秋)이다. 진골(眞骨) 출신으로 김용춘(金龍春)과 진평왕의 차녀 천명공주(天明公主)의 아들이다. 선덕(善德) · 진덕(眞德) 두 조정에 걸쳐 국정 전반, 특히 외교 문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자임하였다. 진덕여왕 사후 국인의 추대를 받은 알천의 사양으로 진골 출신 최초의 신라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대륙 백제와 한반도 백제 반군을 멸망시키고 한반도에서의 대륙에서 피난 온지 160년 만에 새로운 신라의 기틀을 다졌다.






신라의 역사에서 최초로 묘호(廟筃)를 받은 왕으로서, 한국의 역사에서 조종(祖宗) 법 묘호를 받은 첫 군주로 평가되기도 한다.

제30대 문무왕(文武王)

본명 김법민(金法敏) 재위 661년 7월 ~ 681년 7월 21일 종교 불교 왕후 자의왕후 부왕 태종무열왕 모후 문명왕후

* 문무왕(文武王, 626년 ~ 681년 7월 21일 (음력 7월 1일) )은 신라 제30대 왕(재위: 661년 음력 6월 ~ 681년 음력 7월 1일).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둘째 누이인 문명왕후의 맏아들로서 이름은 법민(法敏)이다.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고구려 땅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만주와 한반도 전 지역을 차지하려 했던 당나라의 군대를 나당 전쟁에서 격퇴함으로써 676년에 한반도와 고구려 땅인 중국 북부를 통일한 왕이다. 대신 옛 고조선의 대륙 백제와 대륙 신라를 당나라에 내어 주었다. 왕후는 파진찬 김선품의 딸 자의왕후이다.

31대 신문(神文, A.D.681) : 김, 왕, 휘(諱)는 정명(政明) 혹은 명지(明之). 문무의 장자.

32대 효소(孝昭, A.D.692) : 김, 왕, 휘(諱)는 이홍(理洪). 신문의 태자.

33대 성덕(聖德, A.D.702) : 김, 왕, 휘(諱)는 흥광(興光). 신문의 둘째 아들로 효소의 동복 아우.




34대 효성(孝成, A.D.737) : 김, 왕, 휘(諱)는 승경(承慶). 성덕의 둘째 아들.

35대 경덕(景德, A.D.742) : 김, 왕, 휘(諱)는 헌영(憲英). 효성의 이복 동생.

36대 혜공(惠恭, A.D.765) : 김, 왕, 휘(諱)는 건운(乾運). 경덕의 적자

37대 선덕(善德, A.D.780) : 김, 왕, 휘(諱)는 양상(良相). 내물의 10

대손으로 아버지는 사찬효방(孝芳).

38대 원성(元聖, A.D.785) : 김, 왕, 휘(諱)는 경신(敬信). 내물의 12대손.

39대 소성(昭聖, A.D.799) : 김, 왕, 휘(諱)는 준옹(俊邕). 원성의 태자 인겸(仁謙)의 아들.

40대 애장(哀莊, A.D.800) : 김, 왕, 휘(諱)는 청명(淸明). 소성의 태자.

41대 헌덕(憲德, A.D.809) : 김, 왕, 휘(諱)는 언승(彦昇). 소성의 동복아우.

42대 흥덕(興德, A.D.826) : 김, 왕, 휘(諱)는 수종(秀宗). 헌덕의 동복 아우.

43대 희강(僖康, A.D.836) : 김, 왕, 휘(諱)는 제륭(悌隆). 원성의 손자이고 이찬 헌정(憲貞)의 아들

44대 민애(閔哀, A.D.838) : 김, 왕, 휘(諱)는 명(明). 원성의 증손이며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



45대 신무(神武, A.D.839) : 김, 왕, 휘(諱)는 우징(祐徵). 원성의 손자이며 상대등 균정(均貞)의아들.

46대 문성(文聖, A.D.839) : 김, 왕, 휘(諱)는 경응(慶膺). 신무의 태자.

47대 헌안(憲安, A.D.857) : 김, 왕, 휘(諱)는 의정(誼靖). 신무의 이복 아우.

48대 경문(景文, A.D.861) : 김, 왕, 휘(諱)는 응렴(膺廉). 희강의 아들 아찬 계명(啓明)의 아들.

49대 헌강(憲康, A.D.875) : 김, 왕, 휘(諱)는 정(晸). 경문의 태자.

50대 정강(定康, A.D.886) : 김, 왕, 휘(諱)는 황(晃) 경문의 둘째 아들.

51대 진성(眞聖, A.D.887) : 김, 왕, 휘(諱)는 만(曼). 헌강의 여동생.

52대 효공(孝恭, A.D.897) : 김, 왕, 휘(諱)는 요(嶢). 헌강의 서자

53대 신덕(神德, A.D.912) : 박, 왕, 휘(諱)는 경휘(景暉). 아달라왕(阿達羅王)의 후손.

54대 경명(景明, A.D.917) : 박, 왕, 휘(諱)는 승영(昇英). 신덕의 태자.

55대 경애(景哀, A.D.924) : 박, 왕, 휘(諱)는 위응(魏膺). 경명의 동복아우. 견훤에게 죽음

56대 경순(敬順, A.D.927) : 김, 왕, 휘(諱)는 부(傅). 문성의 후



손으로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 왕건이 사면(도가)임을 빌미로 그에게 신라의 토지 문서를 갖다 바치고 귀순

3) 신라역사에서의 알의 전통

가) 부정적인 부분

신라는 이름 그대로 "신(神)"이 나는 나라로 옛 말로 표현하면 알이 나는 나라이다. 이러한 이름이 붙게된 근원은 신이 없는 중국과 구별하기 위해 나온 이름이며 신이라는 말을 순수 우리말로 바꾸면 알이다. 그래서 신라는 알이 나는 나라이고 나라 개념이 없을 때는 알과 함께 하는 존재이므로 아리랑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신라는 홍수 이전 기원전 만4천년 이전부터 바이칼에서 호우를 피해 산맥을 따라 남하하여 양자강 상류로 왔으므로 기원전 7만 년 전부터의 오랜 알의 유산을 전수 받았고 인본주의 중국의 영향을 덜 받았으며 양자강 남쪽, 상해, 중경 일대에서도 한웅 조선에 속하여 제사장 전통을 계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박혁거세, 알영 부인이 모두 알에서 나왔고 석탈해도 알에서 나왔으며 신라의 후 발 주자인 김알지는 한문 뜻으로 알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신라는 한 반도에 중국 남쪽에서 남부여로 행세했을 때, 왕실이 이동하기 전에도 아리랑이었고 24대 지증왕(지대로왕) 때 AD 501년 한반도로 피난했을 때(당시 한반도는 고구려 땅으로 22대 문자왕 494년이었음)도 아리랑이었다. 또 당시 한반도 백성들도 치우 이후부터 한웅 조선과 단군 조선 사람들이 많이 피난 와서 살고 있었으므로 한반도는 고구려, 신라, 본토인 모두 아리



이었다.

그럼에도 신라 왕조는 박씨는 김씨에게 쫓겨 일본으로 가고 페르시

아 계통인 석씨는 숫자에 밀려 사라지면서 김씨의 세상이 되었는데 이들은 과거 치우 천왕의 실패를 교훈 삼아 한반도에서 중국식 왕정을 시작함으로써 알과 함께 하지 않는 나라로 변모했으나 수만 년 내려온 백성들의 언어, 정서, 체질, 습관은 바꿀 수 없었다. 긴씨 왕조는 한반도를 중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 인들을 복속 시킨다는 명분으로 절대 왕정을 강화했는데 이것이 4세기 17대 내물 이사금 때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 권을 확립하였고 22대 지증왕 때 AD 501년 한반도로 이전 한 이후 정치 제도를 더욱 정비하여 국호를 남 부여에서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중국식 이름인 왕으로 고쳤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즉 신라는 알을 지키기 위하여 한반도로 피난했으나 한반도 통일을



위해 중국식 절대 왕정을 추구하면서 자연주의 유일신인 알을 선별적으로 버리고 골품제, 화랑도, 비단, 치우의 철기 문명, 군사 제 도등 자신들에게 유익한 것을 일부 승계했다.

나) 긍정적인 부분

그러나 한반도 조선인의 언어가 그대로 살아있어 양심, 측은지심, 예의, 염치, 등 사고 방식과 정서는 그대로 살아있었으며 법흥왕이 불교를 공식 종교로 받아드렸으나 소도, 칠성각, 선황당 등 민간 신앙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한문이 본격화되어 온통 한문 세상이 되었으나 신라에는 이두가 나왔고 향가도 나와 언어의 전통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중구 역대 왕조와 이씨조선은 4천년간 중국언어와 글을 강제로 한반도에 심으려고 노력했으나 현재 우리가 쓰는 어휘 44만개 중 22만개는 순수 우리 말이다. 가장 오래된 말은 "엄마", "덜 떨어진 놈", "메아리" 등이다.

이외에도 신라는 7만년 이상 내려온 그들의 전통은 무시할 수 없어서 시조전설, 소도, 고인돌, 풍수지리, 자연 숭배, 고향 사랑, 향토사랑, 가족사랑 등 일상에서의 수많은 삶의 방법을 후손에게 남겼다.

소도

소도(蘇塗)는 삼한 시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특수한 신성 지역,

곧 성지(聖地)이다. 제단을 만들고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워 산천에 제사를 올렸다. 삼한 사회에서는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매년 1~2차에 걸쳐 각 읍(邑)별로 소도에서 천군을 선발하여 제사를 지내었으며, 질병과 재앙이 없기를 빌었다. 이 소도는 매우




신성한 곳으로서 제사에 참석하는 자는 죄인이라도 처벌하지 않았다. 이 소도에는 큰 소나무를 세우고 신악기(神樂器)의 구실을 하는 방울과 북을 달아서 강신(降神)에 대한 안내 또는 신역(神域)의 표지로 삼았다. 무속신앙의 솟대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인돌

고인돌 (유네스코 세계유산)고인돌(지석묘; 支石墓, dolmen)은 크고 평평한 바위를 몇 개의 바위로 괴어 놓은 고대의 거석 구조물(Megalith)을 말한다. 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에 6만기 정도가 분포하며, 숫자상으로 한국에 남·북한을 합쳐 4만기 정도로 가장 많다. 고인돌의 윗 쪽은

평평하며, 내부에는 방이 마련되어 있다. 세워진 연대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유럽과 아프리카는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4,000년, 동아시아는 기원전 2,500년 ~ 기원전 수백 년 전후로 추정된다. 유럽의 고인돌들은 주변에 흙이나 작은 돌로 덮어 무덤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한반도에는 5세기 이후 갑자기 그 수가 늘어나 세




계 고인돌의 30% 이상이 분포해 있는데 박용숙 교수는 신라의 한반도 피난이 그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필자는 혼란기에 별을 관측하고 하늘에 대한 기도를 하는 일을 제사장이 하지 못하고 각자가 하게 된데 기인된다고 본다.























9. 고 려의 아리랑

가. 개요

고려의 알은 한국과 동방 모두의 역사에서 엄청난 의미를 가진다, 기원전 8천 년 전 삼한 시대부터 계속된 인본주의와 자연주의 민족 간 결전의 완결 판이다. 중국이라고 통칭되는 번한(황하 문명)과 신라와 북방 기마 민족으로 통칭되는 진한, 마한 간 주도권 싸움의 종결 판이다.

중국은 하, 은, 주 시대부터 한, 수, 당에 이르는 긴 기간 동안 황하 유역에서부터 인간(황제)을 우두머리로 충, 효, 예를 최고의 가치로 하여 농사를 통해 인간집단의 수를 늘여왔고 진한과 마한 즉 신라

와 북방민족은 기타 넓은 지역에서 제사장(왕)을 중심으로 자연 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자연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식량을 확보하며 살아왔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인본주의,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수탈이라는 농경민족의 삶이 9천 년 간 전통화 되었다. 이러한 중국에서 그것도 당시 농경국가 중 최강이라고 여겼던 선비 족 이씨들의 당나라의 에서 반 인본주의자 왕건이 나타난 것은 중국 역사 자체를 말살하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 후 이씨들의 후예(삼수 변과 나무 목 변이 있는 성씨들 주원장과 이성계)는 고려의 역사를 말살하기로 결정하고 고려의 국시, 강역, 문화를 조작했다.

나. 왕건과 아리랑 정신

고려의 알의 정신은 고려 태조인 왕건의 이름에 모두 반영되어 있다. 왕건이라는 이름에는 "왕을 세운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그것도 신라 초기 우두머리 이름처럼 우리 한국말이 아니고 중국의 문자로 표현되어 있다. 이 이름은 "하늘과 땅을 잇는 제사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왕건은 누구인가? 이조가 조작한 고려사에는 송악(개성) 뱃사람 작제건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진실은 이 작제건은 당나라 16대 황제 선종이 역적의 부인의 몸에서 낳은 서자이고 15대 황제 무종(840년 ~ 846년)을 피해 다닐 때 낳은 사생아이고 그의 출생지는 사천성 성도로 왕건은 작제건이 15세 때 역시 사천성 성도에서 낳았다

* 당 선종의 방랑 관련 일화

선종의 어머니는 진해절도사(鎭海節度使) 이기(李?)의 시첩(待妾)이었던 정씨(鄭氏)로, 이기가 모반죄로 처형된 뒤 궁에 들어왔다가 귀비(貴妃)로 책봉되었고 선종을 낳았다. 광왕(光王)에 봉작된 뒤 십육택(十六宅)에서 살면서 짐짓 어리석은 체 하며 살았는데, 때문에 당시 문종이나 다른 황족들은 그가 정말 어리석은 줄만 알고 자주 그를 업신여겼다고 한다. 즉위하기 전 출가해 중이 되어 하남(河南)의 절천(淅川)에 있던 향엄사(香嚴寺)라는 절에 피신해서 법명을 양준(?俊)이라 하였는데, 절에 있던 승려 제안(濟安)이 선종의 거동을 알아보고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송고승전》).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 등은 이러한 선종의 행동을 당시 선종의 존재를 황위에 대한 잠재적인 라이벌로 여겨 그를 제거하려 했던 조카 무종을 피해 출가한 것이라고 보았지만 근거는 없으며, 당시 수많은 서출(庶出) 황족의 한 사람이었던 선종이 과연 무종에게 얼



마나 위협적인 라이벌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학자도 있다.

회창(會昌) 6년(846년), 평소 도교를 신봉한 무종이 금단을 남용한 나머지 위독해진 상태에서 끝내 숨을 거두고, 환관(宦官) 마원찬(馬元贄)에 의해 이례적으로 황태숙(皇太叔)으로 옹립된 선종은 무종이 붕어하자 바로 즉위하였다. 즉위한 뒤 이름을 에서 침으로 바꾸었다.

선종을 옹립한 마원찬 등의 환관들은 어리석은 선종의 모습만 기억하고 그가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 판단해 황제로서 옹립했지만, 황제로 즉위한 뒤 감추고 있던 본연의 총명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 선종은 쇠퇴한 국세를 재건하고자 배휴(裴休)를 기용하고 내정에 힘을 쏟았다. 새로운 연호를 대중(大中)으로 선포하고, 무종조에 중용되었던 이덕유 일당을 배제하고 우승유(牛僧孺) 일파를 억제하는 등 중신들에 의한 파벌 싸움(우이당쟁牛李堂爭)이나 환관 세력의 소멸을 꾀하는 동시에,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관에 대해서도 온건한 견제정책을 운용하는 등 사회 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무종 시대에 발호되었던 폐불령을 거두고 불교를 보호하는 시책을 펴기도 했다. 또한 선종은 당시 티베트(吐蕃), 위구르(回?)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병사를 보내 하황(河湟) 땅을 차지하는 등의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만년에는 무종과 마찬가지로 도교(자연주의 종교)에 심취하여 불로장수를 추구하기에 이르렀고, 대중(大中) 13년(859년), 무종과 같은 단약(丹藥) 남용으로 인한 중독 증상으로 50세에 사망하였다.

고려 왕실의 혈연에 대한 문제[편집]918년에 한반도에 성립된 고려 왕조(高麗王朝)는 그 왕실이 숙종의 피가 섞여 있다고 자처했는데,



이와 관련해 다시 숙종이 아닌 선종이었다는 설이 김관의의 《편년통록》, 민지의 《편년강목》 등의 사서를 통해 유포되었다(이들 사서는 현재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고려사》 편찬 당시까지 현존했고 《고려사》 편찬의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 《고려사》 고려세계(高麗世系)에는 충선왕(忠宣王)이 원(元)의 대도(大都)에 있을 때, 충선왕이 만난 한림학사는 고려 왕실의 선대가 당 숙종의 후손이라는 주장에 대해, 태어나 단 한 번도 궁 밖을 나가본 적이 없는 데다 안록산의 난 당시에는 영무(寧武) 땅에서 즉위한 당 숙종이 언제 동쪽까지 건너가서 자식을 보았느냐며 의혹을 제기했고, 충선왕이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가운데 민지가 나서서 "그게 우리 역사에 잘못 쓰인 것인데 실은 숙종이 아니고 선종이었다"고 대답했고, 한림학사는 "선종은 외방에서 고생을 하셨으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며 넘어갔다는 일화를 싣고 있다.

《고려사》에는 당 선종이 고려 왕실의 선대라는 설과 관련해 한 가지 이야기를 전하는데, 선종이 13세 때 장난삼아 용상에 올라가 신하들에게 절을 받는 흉내를 냈고 그것을 보게 된 무종이 마음으로 그를 꺼려했으며, 무종이 즉위한 뒤 선종은 궁중에서 습격을 당해 기절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나 도망쳐서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던 와중에 마침 선종의 봉지이기도 했던 양주(楊州) 광군(光郡)에서 멀지 않은 항주(抗州) 염관(檩官)에서 안선사(安禪師)의 후대를 받으며 오래도록 머무르게 되었다. 마침 두 땅이 모두 바다에 접해 있고 무종이 언제 다시 자신을 쫓아올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산수를 유람한다는 명목으로 바다를 오가던 상선을 따라 바다를 건너 한반



도, 마가갑(摩訶岬) 양자동(養子洞)에 있던 보육(拱育)의 집에까지 오게 되었으며 그의 딸에게서 본 자식이 바로 작제건(作帝建)이었다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당시 선종과 작제건이 한반도 개성으로 와서 산 것이 아니고 것이 아니고 사천성에 달 황족의 식읍을 받고 그곳에서 살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지금도 왕건의 묘가 영릉이라 하여 그 곳에 있고 현지 들은 그 묘를 가우리(고려의 중국 발음) 황제의 묘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상기한 고려사 기록은 이조(주로 세종 이도)가 조작한 것으로 본다.

왕건이 원래 이씨이며 그것도 200여 년 간 내려온 당나라 황족의 성을 버리고 왜 왕(王)씨 성을 갖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분석해 본다.

* 이씨는 중국을 만든 주체인 당나라 이세민 이래 가졌던 선비족의 성씨로 황하 농경민족의 주성이다.

* 중국의 성씨 분포는 당시 권력에 따라 변한다. 해방 직후 중국에는 이씨가 3.5억, 왕씨가 1.8억이었으나 2015년 지금에는 그 분포가 공산당원의 성씨 분포처럼 변해 버렸다.





다. 왕건의 건국 과정

이조와 명나라가 조작했으리라 생각되는 후삼국 시대(892-936)의 왕건과 고려의 전쟁을 살펴보면 이들 선비 족의 고려사 조작의 증거가 완연히 드러난다.

당 왕조가 농경정책을 실패하자 이에 대한 반동으로 당 황실 내부

에서 자생적으로 등장한 자연주의자 왕건은 반 인본주의국가 신라(진한) 출신 궁예 아래에서 성장한 배경으로 황하 북쪽 민족과 구 당 황실과 호족들의 호응을 얻는 것은 명약 관하하고 이에 대응한 견훤도 호남 호족인 아자개(이자개)로 모두 당나라 실세들로 왕건이 이길 것이 분명했지만 이조는 후삼국이라는 역사로 조작해 버렸다.

이때 왕건이 점령한 영토도 거의 당나라 전체였고 북쪽으로부터의 위협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분석한 당나라, 송(남송)나라, 대륙고려의 영토는 다음과 같다.













1) 당나라 영토(황색 지역)











2) 송나라 영토











* 남송이 송이며 북송은 조작이다

3) 고려의 실제 영토









4) 이씨들( 선비족)이 조작한 고려의 영토












라) 고려사 말살의 내용

1) 고려의 영토를 한반도 이남으로 국한하였다.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개경 중심 북송을 중국대륙 고려를 없애기 위해 새로 만들었고 당나라 말기 남송 지역의 5대 10국 혼란기를 중원 전체의 혼란기라고 조작하였다.

2) 중원대륙에 들어온 적이 없고 만주 북방에서 징기스칸과 20만 대군끼리 싸워 망한 금나라(황제는 징기스칸의 삼촌*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참조)가 중원에 들어온 것처럼 조작했다.

3) 농사를 위해 폐해를 인정하면서 자연주의 평화, 평등, 자유주의 산업국가로 이룩한 고도의 샤먼 문명국가 고려의 치적을 모두 남송의 것으로 만들었다.

4) 우리가 아는 고려는 당시 서구 사람들에게 알랴진 코리아(Korea)라는 이름과 고려자기, 고려장, 나전칠기, 무역로(보하이-상하이-하노이-사이공-문바이-두바이 로마에 이르는 해로, 등과 태조의 29명의 여성들과의 중혼을 통한 평화 유지, 광종의 중국식 노예제도 폐지 정종의 과거제 실시, 과거 이씨들이 독점한 농토를 농민에게 재분배 등으로 알고 있으나 더욱 중요시되는 치적으로 남송이 가져간 부분은 다음과 같다.

- 지폐의 발명. 유통

- 학문과 법으로 나라를 다스림

- 기원 전 수세기부터 발전해온 선박 운용기술을 군사에 적용하여 동방 최초로 해군을 만들었다.

- 모든 관리들이 자연주의(우주와 인간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랑, 평화, 평등, 인간 존중) 봉사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 왕건은 자신의 성을 성을 제사장의 한문 표기인 왕(王)으로 바

꾸면서까지 중국의 인본계급사뢰를 아라랑 사회로 버꾸려 했다.

마. 고려 아리랑의 내용

1) 개요

고려의 알의 정신(자연주의 정신)은 틱발부를 선두로 홍수 이후 황하 농경문명의 주도권을 잡고 후에 이씨의 성을 갖게된 농경 인본주의 주도권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것이다.

* 탁발-부(拓跋部)

중국 한(漢)나라 때에 있었던, 선비족(鮮卑族)의 한 갈래. 386년에 남북조 시대의 북위를 세웠다. 이들은 탁발을 하고 있었고 몽고 졸본이 근거지였으며 22대 단군의 후손들이었다

원래 선비 족 내부에서도 이러한 하, 은, 주, 한, 수, 당 때의 전제적 인간 신에 대한 반대 의식이 존재하고 있었다. 춘추시대에는 충, 효, 예를 주장하는 공자에 반대해서 노장의 자연주의 도덕 사상이 있었다. 즉 변한 내부에서도 문명에 대한 반 문명주의가 있었고 홍수 이후에는 인간을 인정하면서도 자연과 함께 인간이 있어야 한다는 홍익 사상이 있었다. 중국에서 자연의 하나님 사상은 도교에 주로 나타났고 당나라의 강제 집단 농경이 관료계급에 의한 착취로 실패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대두된 것이 왕건의 천지인 사상 곧 인간은



자연에서 나왔고 우주만물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인간의 양심과 도덕, 평화와 자연의 섭리를 중시하고 농경과 계급사회처럼 자연을 무시하는 일을 배척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당나라가 멸망하게 된 원인이 귀족들이 농토를 강제로 점유하고 농민들을 착취해 오던 것이 한계가 들어 난 것이다. 즉 힘과 인본적으로 하던 정치가

당 황실에서부터 문제가 된 것이다. 자연주의자이며 삼신사상을 가진 왕건이 당나라를 어떻게 변화 시켰을 른 지는 그의 훈요십조와 후에 그들의 정통이라고 우기는 송나라의 발전상에서 유추해보면 명확해 진다.

2) 훈요십조와 평가

① 훈요1조: 국가의 대업은 여러 부처의 호위를 받아야 하므로 선(禪)·교(敎) 사원을 개창한 것이니, 후세의 간신(姦臣)이 정권을 잡고 승려들의 간청에 따라 각기 사원을 경영, 쟁탈치 못하게 하라.

② 훈요2조: 신설한 사원은 (신라 말의) 도선(道詵)이 산수의 순(順)과 역(逆)을 점쳐놓은 데 따라 세운 것이다(즉『도선비기(道詵秘記)』에 점쳐놓은 산수순역에 의하여 세운 것이라는 뜻). 그의 말에, “정해놓은 이외의 땅에 함부로 절을 세우면 지덕(지력)을 손상하고 왕업이 깊지 못하리라” 하였다. 후세의 국왕·공후(公侯)·후비(后妃)·조신 들이 각기 원당(願堂)을 세운다면 큰 걱정이다. 신라 말에 사탑을 다투어 세워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아니하랴.

③ 훈요3조: 왕위계승은 맏아들로 함이 상례이지만, 만일 맏아들이 불초할 때에는 둘째 아들에게, 둘째 아들이 그러할 때에는 그 형제



중에서 중망을 받는 자에게 대통을 잇게 하라.

④ 훈요4조: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당(唐)의 풍속을 숭상해 예악문물(禮樂文物)을 모두 거기에 좇고 있으나, 풍토와 인성(人性)이 다르므로 반드시 같이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거란(契丹)은 금수의 나라이므로 풍속과 말이 다르니 의관제도를 본받지 말라.

⑤ 훈요5조: 나는 우리나라 산천의 신비력에 의해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였다. 서경(西京: 평양)의 수덕(水德)은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을 이루고 있어 길이 대업을 누릴 만한 곳이니, 사중(四仲: 子·午·卯·酉가 있는 해)마다 순수(巡狩)하여 100일을 머물러 안녕(태평)을 이루게 하라.

⑥ 훈요6조: 나의 소원은 연등〔燃燈會〕과 팔관〔八關會〕에 있는 바, 연등은 부처를 제사하고, 팔관은 하늘과 5악(岳)·명산·대천·용신(龍神) 등을 봉사하는 것이니, 후세의 간신이 신위(神位)와 의식절차의 가감(加減)을 건의하지 못하게 하라. 나도 마음속에 행여 회일(會日)이 국기(國忌: 황실의 祭日)와 서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군신이 동락하면서 제사를 경건히 행하라.

⑦ 훈요7조: 임금이 신민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나,

그 요체는 간언(諫言)을 받아들이고 참소를 멀리하는 데 있으니, 간언을 좇으면 어진 임금이 되고, 참소가 비록 꿀과 같이 달지라도 이를 믿지 아니하면 참소는 그칠 것이다. 또, 백성을 부리되 때를 가려 하고 용역과 부세를 가벼이 하며 농사의 어려움을 안다면, 자연히 민심을 얻고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할 것이다. 옛말에 “향긋한 미끼에는 반드시 고기가 매달리고, 후한 포상에는 좋은 장



수가 생기며, 활을 벌리는 곳에는 새가 피하고, 인애를 베푸는 곳에는 양민이 있다”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상벌이 공평하면 음양도 고를 것이다.

⑧ 훈요8조: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외(外)의 산형지세가 모두 본주(本主)를 배역(背逆)해 인심도 또한 그러하니, 저 아

랫녘의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王侯)·국척(國戚)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혹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통합(후백제의 합병)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감행할 것이다. 또 일찍이 관노비(官奴婢)나 진·역(津驛)의 잡역(雜役)에 속했던 자가 혹 세력가에 투신하여 요역(?役)을 면하거나, 혹 왕후·궁원(宮院)에 붙어서 간교한 말을 하며 권세를 잡고 정사를 문란하게 해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도 벼슬자리에 있어 용사하지 못하게 하라.

⑨ 훈요9조: 무릇 신료들의 녹봉은 나라의 대소에 따라 정할 것이고 함부로 증감해서는 안 된다. 또 고전에 말하기를 “녹은 성적으

로써 하고 임관은 사정으로써 하지 말라”고 하였다. 만일 공적이 없는 사람이거나 친척과 가까운 자에게 까닭 없이 녹을 받게 하면 백성들의 원성뿐만 아니라 그 사람 역시 복록을 오래 누리지 못할 것이니 극히 경계해야 한다. 또 이웃에 강폭한 나라가 있으면 편안한 때에도 위급을 잊어서는 안 되며, 항상 병졸을 사랑하고 애달피 여겨 요역을 면하게 하고, 매년 추기(秋期) 사열(査閱) 때에는 용맹한 자에게 마땅히 (계급을) 승진시킬지어다.

⑩ 훈요10조: 국가를 가진 자는 항상 무사한 때를 경계할 것이며, 널리 경사(經史)를 섭렵해 과거의 예를 거울로 삼아 현실을 경계하



라. 주공(周公)과 같은 대성도「무일(無逸)」(안일, 방심하지 말라는 글) 1편을 지어 성왕(成王)에게 바쳤으니, 이를 써서 붙이고 출입할 때마다 보고 살피라.

위 훈요 십조를 요약하면 왕건은 과거 신라와 중국을 통일하면서

맨 먼저 선과 교의 사원 즉 불교의 주도권은 나라에서 쥐고 있도록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서 유의 할 것은 선과 교 그리고 불교를 동일시 한 점인데 불교가 선교에서 나온 것으로 교의 사원 즉 청년교육의 주체임을 표현한 점이다. 고려가 불교를 숭상한 것은 불교 사원인 절을 기반으로 세속(속세)의 중생을 구제하려고 한 것이다. 2천 년대인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절은 수만 년 전부터 우

리에게 이어온 자연주의의 실천 공동체였다.(석가 인간을 숭배하는 인간 하나님 숭배는 제외)

절을 짓고 왕위 계승은 철저히 풍수지리와 혈통중시의 자연주의 전통을 따르도록 했고

그 다음 당나라의 예법을 따르고 거란의 풍습을 멀리하도록 했으며

제 5조에서는 수도를 인본주의 당나라가 선정한 희대지역 농산물 물류 중심지인 개경보다 과거 고조선 시대에 결정된 풍수지리적 중심이었던 서쪽에 위치한 서경으로 점차 도읍을 옮기라고 했고

제 6조에서는 사실상 삼신교 속에서 나온 불교를 인정하고 이 불교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을 것을 주문했으며 제7조는 세금과 상별의 공평으로 민심을 얻도록 하는 홍익인간의 정신을 강조했다.

제9조의 차현(車峴) 이남지역은 동정호 남쪽 지역 즉 중국의 호남성



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상해와 영자강 이남지역이다. 이 지역은 옛 부터 해양에서 식량을 구하던 지역으로 산을 따라 남하한 한국인들과 성정과 달라 중앙정권에 대한 신뢰가 없고 남송이 그곳에서 건립되었음을 경계하는 말이다.

3) 고려 아리랑의 실체

지금까지 나타난 증거로 고려의 알의 실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가) 태조의 탄생과 성장

당시 당나라에는 도교에 심취했던 현종, 무종, 선종 등 황제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 선종이 어릴 적 방랑 때(16세 추정) 사천성에서 낳은 아들 작제건이 14세 때 낳은 아들로 어려서부터 북방 신앙인 삼신교(도교, 노장사상)가 몸에 배어있던 인물로 보인다. 따라서 궁예와는 뜻이 통해 함께 군 생활을 했고 그 아래에서 북방 식 군사기술을 익혔을 것이다. 신라를 사랑하고 보호한 것도 진한이 마한ㄱ하 함계 삼신교의 전통을 이어온 국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즉. 당 황실의 인물이면서 자연을 숭상하고 전제군주제와 농사를 반대했던 인물이다,

나) 견훤과의 주도권 전쟁

견훤 역시 당 황실의 호족으로 호남성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아자게(원래 이름은 이자게)의 아들로 왕건과는 대륙의 주도권 전쟁을 하다가 같은 편인 신라를

침략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호남성이 근거지였으므로 왕건ㄱ허k 경훤의 전투는 대부분 지금 상해 인근이나. 호남에서 신라에



이르는 통로에서의 육전 또는 한반도 서남해에서의 해전이었다.

다) 고려의 영토와 고려성

고려의 영토는 처음에는 고려 삼경(개경, 서경, 남경)을 아우르고 있었으나 후에 북경과 중경이 추가되었다. 소위 소려 오경이다. 그래서 북경의 북쪽에 지금도 고려성이 있다. 이 고려성은 중국 각지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필자의 생각에는 태국과 버마 국경의 카렌 족. 바이칼 인근의 코레핫 족, 만주의 쿠리도 이 고려성 출신의 후예들로 보인다. 정학한 고려의 영토는 양자강 북쪽지역으로 해안은 상해까지 뻗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전 지역에 고려군을 고려성을 중심으로 파견하여 침략 없이 전 지역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라) 고려의 수도 개경

당나라의 수도는 선비족이 수나라에 이어 추진해 왔던 황하 만곡부(중국인들이 말하는 희대지역)에서의 농사대국을 성취할 황하 만곡부 남쪽 농산물 집성지인 개경이었다. 고려가 당나라를 계승한 후 묘청이 서천을 주장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도 농사를 위한 인위적인 위치인 개경에서 풍수지리에 맞는 서경으로 옮기자는 것이었고 서경은 한반도와 황해 그리고 중국을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과거 고조선의 지역을 중점



관할 지역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마) 고려의 국방, 조직, 산업

고려의 알의 정신은 변한 제국의 힘과 권력을 지향한 목표와는 반대되는 자연사랑 인간사랑(홍익인간)의 고조선 정신이 부활한다는

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 은, 주 한, 위, 수, 당에 이르는 주로 선비족(이씨)에 의한 중국 황하 지역의 전제군주, 인본주의 강제 집단농경국가와는 반대되는 자연주의 신본주의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인본주의가 한문과 농경을 발전시키고 난 후 한계가 오고 자연이 주는 것을 이용하고 개인의 재능과 지역의 특산물을 장려하며 신본주의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전술한 지폐의 제조 및 운용, 학문과 법을 숭상하고 법에 의한 통치, 선박 운용기술을 군사에 적용, 모든 관리들의 사명감 등 나타난 것만 고려하더라도 고려의 실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1) 우선 고려는 당나라처럼 강제 농사로 인구와 군사력을 키우고 남의 땅을 힘으로 빼앗아 국토를 넓히고 인구를 키우는 국가목표를 가진 나라가 아니고 국가간에는 평화를 유지하며

* 이 아리랑 자연주의 정신 때문에 왕건이 29명의 호족의 여인들과 결혼을 했다.이씨들의 유교와는 극명하게 반하는 조치였다.

사람들은 각 그들의 거주지에서 자유롭게 어업도 하고 특산물을 생

산하여 국내산업을 농업 위주에서 전체 산업으로 다양하게 확장 시

켰고 상호간 교환을 위해 지폐를 운용했으며 고려라는 나라를 넘어



외국에까지 교역을 하는 아주 부유한 산업 국가였다는 것이다. 고려인삼, 고려자기, 나전칠기를 비롯하여 지역의 이름을 붙인 특산물들이 여기서 유래한다.(기장 미역, 여수 돌산 김, 완도 전복, 명천의 명태 등)

2) 따라서 해산무역을 보호하기 위해서 해군이 있었을 것이며 다원화된 생산과 분배를 돕기 위하여 학문과 법치에 의한 정치를 했을 것이고 이러한 개혁의 기초에는 과거 당나라 때처럼 귀족들이 농사와 농토를 강점하고 국민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아니고 귀족들이 붕괴된 후 사명감 있는 관료들의 노력이 기반이 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4대 황제 광종의 노비 안건법과 쌍기의 과거제가 이를 반증한다. 이조의 고려사 깔아뭉개기는 고려 왕조기의 곳곳에서 나타나지만 전술한 광종의 치적과 8대 현종(顯宗, 992~1031)의 국내가 안정되고 문화가 발전했다는 기록은 지우지 못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외에도 고려장, 팔만대장경, 코리아라는 이름 등 이조에 의한 500년 간의 조작에도 없앨 수 없었던 유산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려의 국방도 안정을 위한 군대였지 외국과의 전쟁을 위한 군대였던 것이다.

바) 고려 수도의 동진과 이조의 건국

이 부분은 선비 (이씨: 당, 의 왕조)들의 샤먼국가(고려) 역사 말살 및 조작의 백미이다. 자신들과 반대되는 아리랑 문명을 말살하고 황제 중심의 인본주의 귀족 중심 농경 문화사를 중국에서는 정통화하고 대신 수 만년간 내려온 한반도의 샤먼 문명의 주도권을 이씨



가 쥘 수 있는 이씨 왕조를 따로 분리해서 만들었던 것이다. 먼저 있지도 않았던 북송과 수도 개경의 유적 및 송나라 관련 여러 유적들은 명나라가 조작해서 먼저 만들고 고려를 한반도 이내로 축소시

키는 작업인 왕건의 고향, 혈통 등 당 황실과 관련된 모든 기록, 특

히 호남의 작은 호족을 전라도 호족 견훤으로 만들어 그가 한반도에서 신라를 공격하고 왕건과 싸운 것 등... 그래서 관산성, 조물성, 사비성 모두 한반도에 있다고 조작을 한 것 등 등 수없이 많다,

* 특히 4대 세종 이도는 이 조작의 주역이었는데 37년 간 너무 몰두한 나머지 말년에 과로로 당뇨에 걸려 죽었다

따라서 개경은 당연히 황하 만곡부이고 희대지역 의 남쪽 곡창지대의 교통의 요충지이며 원래 당나라의 수도이다. 포청천, 어쩌고 하는 것도 중국인들의 소설이다. 그래서 묘청(19대 명종(明宗, 1131~1202)은 수도를 풍수지리에 의해 서경으로 천도하자고 난을 일으켜 1135년 서경을 수도로 대위국을 세웠던 것이더, 서경(지금의 낙양)으로 고조선 지역의 중심지점이었다. 개경을 수도로 했던 고려는 결국 몽고의 침략에 의해서여 비로소 수도를 옮기기 시작했는데 고려 23대 고종(高宗, 1192~1259)은 1259년 개경에서 황하를 따라 피난하여 발해만을 거쳐 강화도로 피난했고 최씨 일가의 대몽 저항군 삼별초도 발 해만에서 황해를 따라 진도, 장흥 등 전라도 해안과 제주도로 후퇴하였다.




* 삼별초가 지금 개성에서 몽고 군에 밀려 장흥과 진도 제주도로 후퇴한 것은 해안으로의 피난이 아니면 믿기 어렵다. 조금이라도 군대를 알고 전술을 아는 사람이면 소백산과 태백산, 지리산 등 산으로 피난했을 것이라는 점은 명약 관화하다. 어설픈 이조의 고려사 조작이다.

사 고려의 아리랑 평가

1) 조상들의 아리랑

환국 이후 홍수 전까지 조상들의 아리랑은 순수한 자여의 유일신, 즉 창조주의 섭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홍수 이후 배달국부터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제세이화(濟世理化), 광명개천(光明開天)으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집단생활을 자연의 질서로 포용하는 정신이었다, 그러다 한웅 말기 탁록의 전투(기원 전26세기) 이후 농경을 위한 인간집단이 황하지역(변한)에 나타나 인간이 창조주이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부자연스러운 정신이 생기고 이것이 하(夏), 은(殷), 주(周), 한(漢), 수(隨), 당(唐)으로 3천 여 년 간 이어졌다.

2) 당나라(번한)의 아리랑

이러는 가운데서도 자연주의와 인본주의의 갈등은 중국 내에서도 계속되어왔으니 즉 춘추 전국 시대의 제자백가 시절에 노장 사상(老莊思想 :도덕, 예의 중심 자연주의)과 공자의 유교(충,효,예 인본주의)와의 갈등이 그것이고 당나라 시절에 현종(玄宗), 무종(武宗), 선종(宣宗)등 많은 황제가 도교에 심취한 것이 그것이었다.

3) 신라의 당나라 아리랑

신라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는 건국설화, 골품제, 화백제도,



솟대, 화랑도 등에서 조상들의 자연의 창조주 아리랑 사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불교를 받아드린 이후에는 백성들이 가뭄이 들면 "당나라 황제가 화가 나 그렇다"고 할 정도로 인신을 숭배하였다가 (무함마드 깐수 저 "서역과 신라의 교류사" 참조) 중국에 고려가 들어선 후 이러한 현상이 사라졌다.

* 무함마드 깐수

본명 정수일 출생 1934년 2월 30일(1934-03-02) (80세) 만주국 간도 용정 명천촌 국적 만주국 (전) 중화인민공화국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 학력 베이징 대학교 동방학부 (수석) 이집트 카이로대학 인문학부 연구생 1988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 역사학자, 이슬람학자

단국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동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고, 대한민국의 문명교류학을 최초로 개척한 역사학자, 이슬람학자이며, 동시에 전(前)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이다.

이력

만주국 간도의 용정 명천촌에서 태어난 조선족 출신으로 베이징 대학교 동방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중국 국비유학생 1호로 선발되어 이집트의 카이로대학에서 인문학부 연구생으로 유학하였다. 중국 외교부 및 모로코주재 중국대사관 등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들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후 평양국제관계대학 동방학부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평양외국어대학 동방학부 교수직으로 재임중 1974년 소위, 대남 통일사업요원으로 발탁되었다. 아랍어, 중국어, 일어, 프랑스어, 러시아, 스페인어 등 10여개 언어를 구사한다고 한다.




북한에서 출국하여 튀니지대학의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 말레이대학 이슬람아카데미 교수등을 거치면서 10년에 걸쳐 해외에서 활동하였고, 마지막은 필리핀에 거주하고 ‘무하마드 깐수’라는 이름의 아랍인 신분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하였다. 1988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에 입학을 하였고, 1990년 〈신라와 아랍·이슬람제국 관계사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학위 취득후 단국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임용되어 강의하였고, 많은 저술 활동 및 대외 활동을 하여 저명 인사가 되었다. 그러다 1996년 7월 3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되었으며, 1996년 7월 21일, 법정에서의 자백으로 본명과 신원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단국대학교에서는 그의 교수직 및 박사학위를 박탈했다. 이

후, 12년형을 선고 받고 약 5년간 복역하다가 2000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로 출소하였다. 2003년 4월 30일 특별사면 및 복권되었고, 5월 14일에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2008년 11월, 한국문명교류연구소를 창립하였다

4) 왕건이 등장은 이씨들의 중국식 인본주의가 한문, 유교와 함께 말살해온 조상들의 국시, 즉 오만년 이상 간직해온 우리 민족의 언어요 생각이었으며 정서요 가치관의 표본이었던 홍익인간, 제세이화, 광명개천으로 대변되는 아리랑을 복원하고 인본주의를 배척한 사건이었다.

2015년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한국인의 언어, 양심, 정서, 심성, 가

치관, 습속 중 많은 부분이 고려 가 있어서 유지되오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500년 간 중국화 하려고 애쓴 이조의 강제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13. 이조의 아리랑

가. 개요

이조의 아리랑을 알려면 건국 당시의 고려 황실의 상황과 이성계의 위치, 그리고 한반도 상황을 살펴봐야 하고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서 본래적인 민족의 전통과 정신을 파악해 봐야 왜 이조가 그토록 심한 반 아리랑 정책을 구사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1) 고려 고종의 강화도 피난에 대한 상세한 분석

1.239년 몽고의 침입이 계속되자 고려 22대 고종의 황실은 부모의 형제, 자매들과 따른 식솔들을 거느리고 황하 포구에서 황하 뱃길을 타고 천진과 발해만을 거쳐 강화도 화도면 황청리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29년을 살면서 농사를 짓고 식솔들을 먹여 살리고 옛 조상들의 신앙인 솟대를 세웠다. 황청리라는 이름은 지금 "黃淸"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원래는 황제는 영원하다라는 의미인 皇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도 황청리 저수지 인근 포구에 황제가 논에 물 대는 기구를 가져왔다는 뜻을 가진 용두레 마을이 있고 고종의 계모와 이모의 묘는 모두 능이라는 이름으로 황청리 저수지를 둘러싼 산 속 계곡에 있다. 그때에 담배가 강화도에 들어 왔는지 담바고 노래가 그 지역 민요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필자는 지난 1992년부터 2.000년까지 강화도의 황청리 인근에 담바

고 노래가 유행하는 것을 보고 그리로 가서 고종의 서해안 기착 포구가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임을 알아내었다. 황청리에는 고종이 전파한 논에 물 퍼 올리는 도구 용두레가 있고 저수지 뒷산에 고종의 이모와 아버지 둘째 부인의 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황청리에서 고개를 넘으면 고려지(내가 저수지)이고 고려지 앞산이 고종이 묻혀 있는 고려산이다. 그곳에서 내륙으로 조금 더 가면 강화행성이 있다.

* 고종의 강화도 저항

고종은 몽고의 침입을 받아 1229년 개경에서 천진--> 황해를 거쳐 강화도로 천도한 뒤 28년 동안 항쟁하였으나 결국 굴복하였다. 황실을 한반도 개성에 존속시키기 위해 그의 손자 충렬을 노국 공주에게 장가를 보낸 것을 비롯하여 조공녀를 보내었고 그래서 이후 280년 간 고려 황실이 한반도 개성에 있게되었다. 이성계와 주원장(朱元璋: 모두 木씨 변을 가진 선비족)이 짜고 고려를 한반도로 국한시키고 역사를 말살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2) 이성계와 주원장의 족보



이성계의 고향은 한반도 함경도의 영흥이 아니고 중국 산서성 관산현(일명 영흥) 쌍성으로 황하의 지류이다 쌍성은 북경에서 가까운 만리장성 관문으로 이안사는 그곳을 수비를 하던 선비족 출신 당나라 수문장이었다. 따라서 이성계는 당나라 때부터 무관 집안으로 조부 이안사가 당나라를 배반하고 몽고 군 휘하에 들어가 만주지역 무관을 하였고 그의 아들 이자춘과 손자 이성계가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이성계의 유교국가 복귀에 대한 열망은 대단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성계는 중국 당나라의 이씨이다. 이들 농경민족은 이성계 이씨처럼 벼의 묘판을 상징하는 목(木)변을 가지고 있거나 물을 의미하는 삼수 변을 가지고 있다. 주원장(朱元璋)도 마찬가지이다. 주원장은 남경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탁발승을 하다가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들을 당시 중국에서는 홍건적이라고 하였다. 야사에 의하면 둘 다 연경으로 가다가 의기가 투합했다고 하며 이성계는 주원장의 홍건적을 합법으로 인정했을 뿐 아니라 그의 홍무예제(洪武巤制)를 조선의 유교 예법(현재의 6법에 해당)으로 받아드렸고 조선이라는 이름도 그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성계는 고려 황실이 개경에서 한반도 개성으로 피난을 온 시기를 이용해 고려의 후계자로 자처하면서 영역을 한반도로 한정했던 것이다.

3) 당시 한반도의 상황

당시 중국은 홍건적에 의해 공자의 유교가 지배하는 황제와 귀족 체제의 농경국가로 되돌아갔는데 이성계의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산서성 관산현에 많이 거주하던 여진족과 일족 선비 족



을 합하여 약 20만 명을 데리고 원나라에 대한 출전을 빌미로 요하의 위화도에서 7만 군대를 돌려 고려의 왕위를 찬탈하였다. 신라(진

한)의 전통을 이어받은 한반도는 고려에 이어 조상들의 아리랑 전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 이조 이전 한반도의 아리랑 전통

1) 한인조선의 유산

창조주(하나님), 인간은 자연에서 나왔고 천지인과 한 생명 사람은 만물의 영장 마음 먹은대로 소원대로 된(자연,,음식, 이인관계, 보호등), 지극한 기, 적은 인구가 은 자연에서 수렵 체취를 했으므로 부족함이 없었다. 기도(주술) 수명 천년, 평화, 전쟁이 없었다. 천부경, 삼일신고

2) 한웅조선의 유산

홍수 이후이므로 하나님 신앙은 하늘 신앙(하느님)으로 변화하였고 벼농사와 함께 하는 하느님으로 배달(볏알)나라라고 했다.

* 반면에 중국은 벼농사를 위해 인본주의 왕권과, 군대에 의한 강압 농사를 지은 반면 한웅 조선은 이와 구별되었다

치우 세력의 중국 동해안과 한반도로의 이전에 따라, 천신 제사, 남성 우위, 동방 예의지국, 백의 민족, 단오명절의 습속 및 음식(씨름, 그네뛰기, 익모초, 머리 감기, 앵두편, 수리취 떡 등) , 강릉의 지명, 철제 장구, 구리 전통, 등이 전해져다.

3) 단군 조선



제사장이 다스림, 강한 군대(침략 배제), 가림토, 산신, 천신, 지신, 용신, 인신에 대한 제사(지역별, 환경별 제사). 8조 금법, 자연의 특징을 이용한 생산, 이러한 생산을 하는 직업, 각 생산물간 교환을 위한 돈(침수도), 물류 직업, 청동기 기구

(기타 고려말 이암: 선비족 저 단군세기 참조)

4) 신라, 고구려, 백제

화백제도, 솟대, 화랑도(산천을 애호하는 정신), 세속오계, 신토불이 관념, 고 고조선과 진한의 언어, 부도지, 참전개경,

5) 당나라

군주제도, 계급제도, 한문, 농경을 위한 인구 확보, 수로 개척, 군사력,

6) 고려

지폐, 지역별 자연 특산물 생산 및 교환 국내 교역, 항구의 설치를 통한 개방, 해군(수군)의 창설, 사명감이 있는 정부 관리

다. 이조의 아리랑 말살

1) 고려 왕씨의 학살

이조의 건국 당시 고려(중국)의 인구는 약 8천만이었는데 이중 이씨들은 약 2천만으로 대부분 황하인근과 양자강 북쪽 중국 지역에 살

고 있었고 신라 때부터 선비족이라고 해서 거의 받아주지 않고 있었다. 고려 전국에 왕씨들은 약 천만이었는데 한반도에는 고려 고종을 따라와 100여 년 간 증가된 인원 약 20만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한반도 인구는 약 80만으로 앞서 말한 왕씨 20만을 비롯하여



박씨 20만 김씨 20만 여명, 전라도 해안 지역에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 약 20여만, 도합 80여 만(5만 호)이 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성계는 선비족과 그를 따르는 여진족 군인 7만명, 가족 포함 약 20만 명을 데리고 들어와 한반도를 통 체로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려고 하였다. 제일 먼저 한 것이 왕씨들을 이씨들로 대체하는 일이었고 공양왕이 몰락한 후 도서지역에 농토를 준다는 구실로 남은 왕씨들을 배에 태워 수장시킨 인원만도 2만여 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남은 왕씨들은 중국과 일본으로 도망을 가거나 왕씨 변이 붙은 성인 옥(玉), 신(申), 태조 부인의 성인 버들 유(柳), 전(全), 차(車) 씨로 변성(択姓)해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이들 성의 총합계는 약 12-15%로 이씨들의 수를 능가한다.

* 필자의 가정사

필자가 육사 2학년 여름 휴가 때 친조부이며 일제 때 보통고시에 합격하여 완도 부 군수를 지내고 해방 후 경남 양산 면장을 지낸 차호준(車鎬俊) 장로님께서 유언으로 남긴 말씀도 위의 사실과 일치한다

- "너 육사 다닌다고 출세만 좋아하지 말고, 때 되면 기독교 복음 사역을 해라"

- "전주 이씨는 우리 왕씨들을 몰살시킨 원수다, 그런데 네 어미는 성산 이씨고...

네 할미도 전주 이씨고 네 외할머니도 전주 이씨니 원 참...."

2) 언어의 중국화 시도 와 실패 후 한글 창제

이성계 일당이 조선 건국 당시 사용하고 있던 언어는 신라어, 중국어, 몽고어였으며 조부 때부터 한문을 익혔으리라 보이나 그의 군인



들과 가족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왔으므로 한반도에서 말이 통하지 않았고 각 지역과 농토를 접수하면서 자연스럽게 한문을 주고받고 토착언어를 배웠으리라 판단된다. 따라서 이조 건국 51년(1392년)이 지나도(1443년) 한반도 중국화에 별 효과가 없고 "나랏 말쌈이 듕국과 다른 것"을 알게된 이도(宸:세종)은 한국어 표기에 어떤 한자말을 쓰는지 살펴 중국 한문을 한반도에 전파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원래 쓰던 한글을 발굴했는데 그것도 창제가 아니고 3세 단군인 가륵 재위 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이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든 것을 발굴한 것이었다.(정인지 훈민정음 서문 참조)

* 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는 『훈민정음(해례본)』은 국보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국정운』권1, 6과 함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촌의 이한걸(李漢杰)씨 댁에 전래되던 것이다. 1940년에 발견될 당시 원 표지와 첫 두 장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그 후 보충하여 끼워 넣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 세종 서문의 마지막 글자 ‘이(耳)’가 ‘의(矣)’로 잘못 씌어지고, 구두점과 권성이 잘못되었거나 빠진 것도 있다. 이 책에는 구점(句点; 右圈点)과, 두점(讀点; 中圈点) 및 파음자(破音字)의 성조를 표시하는 권성(圈聲)도 정확하게 표시한 책이다. 구두점과 권성을 다 표시한 것은 『성리대전(性理大全』(1415년)의 체재와도 일치한다. 최근에 이 책 외에 또, 다른 『훈민정음(해례본)』 한 책이 경북 상주에서 발견된 바 있다. 『훈민정음(해례본)』은 목판본으로 1책이다. 전체




장수는 33장이다. 그 가운데 예의 부분이 4장이고, 해례 부분은 29장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이 책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예의 부분과 해례 부분의 장차 표시가 각각 제1장부터 4장까지 그리고 해례는 다시 제1장부터 29장까지 장차를 따로 매기고, 판심제(版心題)도 달리 새겨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예의 부분의 판심제는 ‘正音’이고, 해례 부분의 판심제는 ‘正音解例’이다. 예의가 4장 앞면에서 끝나고 4장의 뒷면이 공백으로 되어 있는 이유와, 해례가 시작할 때 제1장 앞면 맨 앞에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라는 내제명(內題名)을 다시 갖추고 있는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이 책은 체재상 예의 부분과 해례가 독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글자도 크기를 달리 하여, 임금이 작성한 부분은 큰 글자로, 신하들이 작성한 부분은 작은 글자로 판을 새겼다. 예의는 1면이 7행에 매 행(每行) 11자로 되어 있고, 해례 부분은 1면 8행에 매 행 13자이다. 정인지의 서문은 다시 한 글자를 낮추어 적고 있다. 이러한 『훈민정음(해례본)』의 체재는 본문과 해설을 짝지어 놓은 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세종이 쓴 예의를 큰 글씨의 본문으로 하고, 신하들이 쓴 해례 부분을 작은 글씨로 하여 그에 대한 해설로 짝지어 놓은 체재로 되어 있는 것이다. 책의 체재나 내용상으로 볼 때, 정인지의 서문은 해례에 대한 서문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정인지의 서문은 해례의 용자례(用字例) 다음에 한 행의 공백도 없이 계속될 뿐 아니라, 장차도 이어서 매겨져 있고 판심제도 동일하게 ‘정음해례(正音解例)’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목판본의 밑바탕이 되는 판하본(板下本) 원고의 글씨를 쓴 사람은 세종의 셋째아들인 당대의 명필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이다. 따라서 이 책은 서예학의 측면에서도 아주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훈민정음』(해례본)의 체재

╃ 예의(例義)

· 세종의 훈민정음 서문

· 새 문자 훈민정음의 음가 및 그 운용법 등

╃ 해례(解例)



· 제자해(制字解),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

· 용자례(用字例)

· 정인지 서문

예의(法義)는 세종의 훈민정음 서문과, 새로 만든 문자 훈민정음의 음가 및 그 운용법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의’라는 말은 정인지의 해례 서문에 나온다. “계해년(세종 25년, 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 간략히 예와 뜻(例義)을 들어 보이시고서 이름하시기를, ‘훈민정음’이라고 하셨다.(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하는 데에 들어 있다. 세종의 서문에서는 새 문자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과 취지를 밝혔다. 이 서문은 54자로 되어 있다. 그 뒤를 이어, 초성자와 중성자의 음가를 밝혔다. 초성자는 아(牙)·설(舌)·순(脣)·치(齒)·후(喉) 음의 순서로, 그 각각은 원칙적으로 전청(全淸)· 차청(次淸)· 불청불탁(不淸不濁) 자의 순서로 17자를 배열하되, 병서(拄書)를 할 수 있는 글자 뒤에 전탁자 6자(ㄲ ㄸ ㅃ ㅉ ㅆ )의 내용을 추가하여 배열해 놓았다.

* 훈민정음 연구소장 반재원의 글

훈민정음의 창제 이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목요연하게 기술되어 있음을 볼 때 연구를 거듭할수록 한 개인이 일관성 있게 추진한 단독 작품임을 느끼게 한다. 세종 때 만든 해시계를 비롯한 30여종의 발명품에는 하나같이 그것을 제작한 실무자의 이름과 연유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훈민정음만 유일하게 실무자의 이름이 없이 세종 혼자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이 눈병이 나서 청주의 냉천으로 요양을 떠나면서도 훈민정음 자료를 한보따리 챙겨 떠난 사실을 보더라도 얼마나 한글 창제에 몰두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연구물이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애착이다. 책이나




논문을 써본 사람이라면 그 심정을 공감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 훈민정음 창제가 세종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바로 <세종실록> 103권과 <훈민정음 해례본> 61쪽의 정인지 서문에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했다(자방고전字倣古篆)’라는 문구 때문이다. 그동안 ‘고전’을 한자의 옛 서체나 범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으나 필자는 여기에 나오는 ‘전문(篆文)’이나 ‘고전(古篆)’이나 최만리가 말한 ‘전자(篆字)’가 모두 단군 때의 ‘가림토’를 일컫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토착(吐着)’이라는 문구 때문이다.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 유사에 “세종이 방언이 문자와 서로 통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변음(択音)과 토착(吐着)을 여러 대군에게 풀어보게 하였으나 아무도 풀지 못하였다. 그래서 출가한 정의공주에게 보냈는데 곧 풀어 바쳤다. 이에 세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칭찬하고 큰 상을 내렸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변음’과 ‘토착’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변음은 정음과 반대되는 말로 사투리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토착은 무엇일까? 그 당시 대군들은 아무도 ‘토착’을 풀지 못

하였는데 오직 공주만 홀로 풀어 바쳤다는 내용으로 보아 ‘단군 때의 가림토’가 그때까지 여인네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토착(吐着)의 ‘토(吐)’는 분명 가림토(加臨吐)의 ‘토(吐)’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의공주로부터 가림토의 이치를 응용하였기 때문에 토착 즉 ‘가림토’를 ‘전자(篆字)’로 보아 해례본에도 옛 전자를 모방했다 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3) 전제군주 계급제도의 부활

이성계가 왕이 외었다는 것은 그를 중심으로 한 지역 내 선비 족들이 중심이 되어 고려의 호족 중심 정치 체제가 옛 당나라의 절대 왕권 전제 군주체제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성농사를 위한 전 국민의 농민 화 및 억압과 착취 체제로 복귀했다는 것을 의



미한다. 이들 선비족 위주로 귀족계급이 생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전주 이씨였고 일반 국민들 즉. 박, 김씨 등은 노예에 불과했다. 한문을 아는 사람은 양반이고 나머지는 모두 쌍놈이라는 계급제도는

본에게 망할 때까지 500여 년 간 계속되었다. 일반 국민들은 과거를 보면 출세를 할 수 있었는데 과거 시험을 위해 서당에서 공부를 하

면 선비라는 호칭을 주었다. 한반도 주민을 선비 화(중국화)하는 것이 이조 계급제도의 목적이었다.

4) 농경 위주 산업의 부활

고려시대까지 자연조건에 맞는 자유로운 생업에 종사하던 한반도 국민이 이조가 들어서자 무조건 농사를 짓도록 강요되었다. 오래 살던 한반도 사람들의 수명이 30세 리하로 주어졌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금도 신선이라는 오래 산 산위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 이조의 강제 농경 정책은 지금한반도 해안 가람들과 특히 전라도 도서 사람들에게 가혹한 것이었다. 어업을 하되 세금은 농사를 지어 쌀로 나라에 바치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소위 대동법(大同法 )이다.

* 대동법

대동법(大同法)은 조선 중기인 광해군-숙종 시기에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 제도이다. 토지의 결수에 따라 1결당 12두씩을 통일하여 부과하게 되었다. 양반과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혀 본격적으로 실시하는 데 100여 년의 시일이 소요되었다.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 지주들은 부담이 급증하게 되어 이들은 대동법의 시행을 반대하였다.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을 공(貢)이라 하는데, 대동법은 이것을 일률적으로 미곡으로 환산하




여 바치게 하는 제도이며, 이때 걷은 쌀을 대동미라 한다. 대동법의 실시를 놓고 논란이 확산되었으며 김육, 김좌명, 김홍욱, 이원익 등의 찬성파 외에 안방준, 김집, 송시열 등의 반대파가 팽팽히 맞서게 된다. 김육 생전에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부분 시행되었고, 그 뒤 조선 숙종 때 가서야 제주도,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5) 억불 숭유 정책

이조는 고려에서 권장한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따르도록 강요했는데 불교는 선비, 즉 양반들을 속세의 속인으로 취급하고 그들의 인본주의, 지배계급, 농경 위주 수탈 정치를 버려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며 유교를 신봉한것은 공자의 유교가 군주중심 지배계급의 농경 정치를 옹호했기 때문인데 그 실례로 태종이 주원장의 홍무예제(洪武巤制: 오늘날의 거의 모든 법규)를 그대로 받아드린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승려들은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지침으로 불교도 국가를위한 종교임이 입증되었다. 이조의 숭유정책은 과거제도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났는데 시험 내용이 주로 성리학에 관한 것이었고 이 성리학은 유교의 분파로 유학자들이 가르치는 지방의 서당, 서원, 향교 교육을 통하지 않고는 배울 수 없는 학문이었다.

* 성리학

성리학(性理學, 영어: Neo-Confucianism)은 12세기에 남송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유교의 주류 학파이다. 성리학의 어원은 주희가 주창한 성즉리(性卽理)를 축약한 명칭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주희)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하고, 송나라 시대의 유학이라는 뜻에서 송학(宋學)이라고도 하며, 송나라 시대 이전의 유학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새로운 기풍의 유학이라는 뜻에




신유학(新儒學)이라고도 한다. 정호(程顥)와 정이(程?)에서 주희(朱熹)로 이어지는 학통이라는 뜻에서 정주학(程朱學), 정주 성리학(程朱性理學), 또는 정주 이학(程朱理學)으로도 불린다. 이학(理學) 또는 도학(道學)이라고도 한다.

6) 도관의 폐지, 무속의 폐지

도교는 비록 중국식이지만 우리조상들의 삼신교와 가장 많이 닮은 종교로서 삼국시대부터 고려 때까지 호국 종교로 명맥을 어어 왔으나 이조 중종 때 북두칠성, 옥황상제 등을 모신 도관인 소격서를 유신(儒臣)들이 폐지하려고 했다. "제후국인 조선이 하늘에 제사지낼 수 없다’이유였다. 이 말은 ‘도관의 폐지’주장으로 유생들이 스스로 중국에 예속되어 있음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다. 또한 무속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는 음사라고 해서 금지시켰으나 국민들 사이에 없어지지 않자 이조는 궁궐밖에 성수청(聖水聽)을 두고 전국 무속인들을 통제하였다. 당시 무속인들에게서 받은 세금이 너무 많아 정부 재정을 좌지우지 한 것으로 보아 전국적으로 무속 전통이 얼마나 왕성했는지 알 수 있다. 전제군주도 우리 조상들의 혼을 건드리지 못한 증거이다. 이렇게 도관과 무속을 금하였으나 정작 왕은 어려울

때마다 하늘에 기도를 하는 행사를 계속 거행해온 점이 아이러니하다. 이조의 마지막 순종의 손자 이구(李玖)씨에 따르면 이조의 왕실에서는 원구단과 국궁 제배가 500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다고 했다. 현재도 원구단은 서울 조선호텔 옆에 있다.

이조의 이러한 반 무속 태도는 결국 청태종(홍타지)의 침략(병자호란)을 초래했는데 홍타지가 인조를 삼전도에 불러놓고 국궁제배를





시키면서 꾸짖은 일성이 "네놈이 조상들의 천신(天神)을 버렸다"는 것이었다.(청사疓史 참조)

* 북방구리족들의 남쪽 침입의 명분은 대부분 천신을 버렸다는 것이었는데 몽고의 고려 침입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려가 불교를 숭상한다는 것이었다.

* 국궁 제배

존경의 뜻으로 꿇어 엎드려 세번 이상 절을 하되 이동시에도 무릎을 꿇은 채 이동하는 절의 방법으로 천신과 군주에게만 하였다

* 원구단 일명 환구단

종목 사적 제157호 (1967년 7월 15일 지정) 면적 3필지/4,278㎡

시대 대한제국(1897년) 소유 국유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112

정보 문화재청 문화유산

환구단(?丘壇)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壇)이다. 원구단(圓丘壇)이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사적 157호로 지정된 환구단은 고종 대에 있었던 환구단 터로, 서울시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조선호텔 자리이다.

이러한 샤먼전통(예: 천신 제사)에 대한 이조의 억압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조 중기 이후에 접어들자 김만중의 구운몽, 전우치전, 등 민간 소설을 통해 민속에서 무속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7) 쇄국 정책과 외침

이성계 일당은 건국 이후 계속 자신들이 경험한 황하 농경을 통한 전제 군주 체제 이상의 국가 체제는 없다고 생각해왔으며 또 자신



들이 혐오하는 고려가 지역의 물산을 장려하고 항구를 만들어 외국과의 교역을 강화하는 등 개방 정책을 추진했다는데 반발하여 반대로 500년 내내 쇄국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외교는 결국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초래했는데 일본의 경우 그들의 여러번 통상 요구에도 불구하고 양반 입 네 거드럼을 피우고 겨우 통신사를 보내는 정도였다. 이조의 이러한 유아독존 식의 쇄국 정책은 이조 후기(대원군)까지 계속되었다.



















라. 이순신과 아리랑의 부활

이순신 장군은 전주이씨가 아니고 신라계인 덕수이씨이다. 특이한 것은 그의 좌우명이 그의 장검에 세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誓海魚龍動 서해어룡동

盟山草木知 맹산초목지" 이다. 풀어 쓰면

"내가 바다에 맹서하면 물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내가 산에 맹서하면 초목은 안다"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왜 충(忠), 효(孝), 예(巤)나 임금에 대한 충성이나 나라 사랑에 대함 말을 쓰지 않고 자연에 대한 맹서 즉, 샤머니즘을 좌우명으로 기록했을까? 그는 이 좌우명으로 남해안의 천문지리(도교, 주역)와 백성들의 신앙과 성향(천지신명, 신토불이 등) 통달하고 삼신(당시는 천신)에게 운명을 맡겨 절대 우위의 군사력을 가진 일본군을 무찔렀던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승리한 16세기 이후 성주풀이, 한 오백년 등 무속의 옛 노래가 시중에 일반화되기 시작했는데 모두 알이 큰 신이고, 우리는 오래(오백년 이상) 사는 사람들이니 성화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이순신 李舜臣

덕수 이씨 1545년 4월 28일 ~ 1598년 12월 16일 (53세) 조선, 한성부, 건천동(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출생 자 여해(汝諧) 시호

충무공(忠武公), 선무1등공신, 덕풍부원군, 증(贈) 좌의정, 가증(加贈) 영의정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관직 정2품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종2품급), 명 수군도독 부모 아버지: 이정(李貞, 덕연부원군德淵府院君) 어머니: 변수림의 딸 초계 변씨(草溪卞氏) 배우자 방진(方震)의 딸 상주 방씨 형: 희신, 요신 동생: 우신

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2] (음력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한성 출신이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3]하여 그 관직이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본인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고 깊은 효심을 지닌 선비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장수로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 성주 풀이

(받는소리) 에라만수 에라-대신이야 대한량으로 설설이 나리소서

1. 낙양성 십리허예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 저기 저모양이 될터인데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거들거리며 놀아보자

2. 성주여 성주로다 성주근본이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의 솔씨받아

소평대평 던졌더니 그 솔씨 점점 자라나서 황장목(큰나무)이 되었구나

도리지둥(둥근기둥)이 되었구나 낙락장송이 떡 벌어졌구나

3. 망망한 북소리는 태평연월을 자랑하고 둘이 부는 피리소리 봉황이 춤을

추고 소상반죽(瀟湘班竹) 젓대소리 어깨춤이 절로난다

4. 저 건너 잔솔밭에 설설기는 저 포수야 저 산비둘기 잡지마라 저 산비둘기

나와 같이 잃고 밤새도록 님을 찾아 헤메이누나( 출처 : 가사집 http://gasazip.com/42213 )

* 해설

여기에서 받는 소리 에라 만수는 알아 만수이다 그래서 "엘아! 만수! 엘아! 대신이여!" 는 "하나님 만년 동안 사신다 ! 하나님은 제일 큰 신이다 "라는 말이다

* 한 오백년

※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 한 오백년을 살자는데 웬 성화요

①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② 백사장 세(細)모래 밭에 칠성단(七星壇)을 모으고 님 생겨 달라고 비나이다.

③ 청춘에 짓밟힌 애끓는 사랑 눈물을 흘리며 어디로 가리.

④ 한 많은 이 세상 냉정한 세상 동정심 없어서 나는 못살겠네.

⑤ 꽃답던 내 청춘 절로 늙어 남은 반생을 어느 곳에다 뜻 붙일꼬.

⑥ 살살 바람에 달빛은 밝아도 그리는 마음은 어제가 오늘

⑦ 내리는 눈이 산천을 뒤덮듯 정든 임 사랑으로 이 몸을 덮으소.

⑧ 지척에 둔 임을 그려 살지 말고 차라리 내가 죽어 잊어나 볼까.




⑨ 으스름 달밤에 홀로 일어 안오는 님 기다리다 새벽달이 지샜네.

⑩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런가 왜 이다지도 앞날이 암담한가.

⑪ 십오야 뜬 달이 왜 이다지도 밝아 산란한 이내 가슴 산란케 하네.

⑫ 청천에 뜬 저 기러기 어디로 가나 우리 님 계신 곳에 소식이나 전하렴.

(후략) [네이버 지식백과] 한오백년 (국악정보, 2010.7, 국립국악원)

해설

이 가사에 수명 오백 년과 남녀의 자연스러운 정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지 가사 어디에도 중국이나 선비족들 처럼 농경 강조나 충, 효, 예에 관한 내용은 없다

또 여성들의 권리가 회복되기 시작하였으며 17세기부터 언문 소설 구운몽(九雲夢)과 사씨 남정기(謝氏南征記)등 언문이 일반화되자 아리랑 노래가 이조 순조 때 1624년 어머니들로부터 부엌에서 시중에 나와 퍼지게 되었다. 이 때 나온 아리랑도 알과 함께 가지 않으면

탈이 나고 알이 수리보다 낫다는 내용이었다.

즉, 이 때부터 5만년 지속된 우리 언어가 5천년 지속된 문명(한문 문명)을 이기고 세상에 다시 나와 우리 정신"(천지인天地人 사상, 천신天神 사상)과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역사 그 이상의 선물을 우리 민족에게 주었다.






9. 현대의 아리랑

가. 시원 민족으로써의 아리랑 유산

1) 한국인은 인류의 시원 민족

기원 전 5만 년부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아리랑에 대해 설명한다면 현대에 우리가 소위 말하는 샤머니즘이 바로 아리랑이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이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에 가깝고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인식과 반대되는 자연이 하나님이다. 이 아리랑은 문명시대에서 온 것이 아니고 저 멀리 언어시대부터 최초로 창시자 효과를 겪은 우리 한국인들의 조상에게서 내려온 것이다. 문명시대를 수메르 문명을 따지면 기원 전 4천 년이니까 지금부터 6천 년 전이고, 우리에게 영향을 많이 미친 황하문명도 기원전 3천 년이니 지금부터 5천 년 전부터 전해진 것이다. 그러면 창시자 효과가 일어났다고 생각되는 한단고기 상 한국의 건국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언어시대는 언제부터일까? 우리가 창조주를 인식하고 인구와 언어가 폭발한 때는 언제쯤일까? 물금 63.193년+ 2.333년+2015년= 67.541년 전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6만7천년 간 언어로 형성된 생각

이 강할까? 아니면 아무리 편익이 좋아도 겨우 5-6천년간 문자가 준 정보시대가 준 생각이 강할까? 그 동안 우리들은 문명이 주는 편익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언어와 언어로 만들어진 생각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어 이 아리랑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기간으로 볼 때 중국의 한문 문명이나 서구의 과학 문명도 우리의 언어와 사고에 비하면 쨉이 안 된다. 아리랑은 바이칼 창시자 효과 이후 홍수가 그치고 집단 농경 생활을 시작하여 인류 문명이 생기



기전까지 6만여 년 간 우리 호모사피엔스 원조인 한국인의 영, 혼, 육 모두의 구성 요소인 것이다. 이 아리랑은 문명이 나타나자 인본주의와 인간 종교에 의해 그 내용과 본질에 있어서 많은 방해를 받아왔으나 한반도의 지리적 특징과 아리랑을 보호하려는 민족주류의 주체적인 일관성의 특징으로 연연히 이어왔다.

2) 시원 민족의 증거

한국인이 인류의 시원 민족임을 나타내는 증거는 카터 코벨 박사의 논문과 김기용씨의 고비사막 흑피옥 유물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카터 코벨박사 부부는 일본 미술사를 연구하면서 이의 근원이 한민족이라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와 함께 일본이 요동성 인근 유물 발굴에서 나타난 인골의 수명이 천년이라는 것과 한국인이 시원 인류임을 밝혀내고 유네스코에서도 이를 발표한 바 있다.

또 전남 광주의 고대 유물 수집가 김희용씨는 중국의 고비 사막일대에서 기원전 1.3만 년 전 흑피옥 발견하였고 이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중국 당국은 이를 뺏으려고 김씨를 국가 공훈자로 선정하고

흑피옥을 자신들의 유물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시원 민족으로써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유산은 언어에서 나왔다. 이것도 문명시대에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유산으로 6-7만년 동안 전해 내려온 것이다.

첫째로 그 중 가장 중요한 언어는 창조주의 이름인데 바로 "알" 이다. 이 알이라는 단어는 지금도 알프스, 알아랏, 알아비아(아라비아), 알알해(아랄해), 알제르 바이잔, 알마하타, 알타이, 바이칼, 울알, 알



물(아무르 강) 알아스카, 등, 동서양에 걸친 지명을 비롯하여 회교 국가에서는 지금도 창조주 하나님 이름을 "알라"라고 부른다. 우리에게는 아리랑이다.

둘째로 중요한 언어 유산은 시원 언어가 가지는 뿌리 적 가치이다. 우리는 가지 언어를 배우기 쉽지만 저들은 배우기 어려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어와 인도 유로 어(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가 그것들이다.

러시아 언어학자 세르게이 스타로스틴 교수는 중국어가 한국어와 일본어를 차용해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일본어가 경상도 방언이니 결국 우리말에서 빌려간 것이다 또 구한 말 한국의 선교사로 와 있던 호머 할버트는 인도 유로어의 어근 중 1/2인 22만개가 한국어와 같다는 연구 보고서를 내 논 바 있다.

셋째로 시원 민족의 시원 언어가 가진 중요한 유산은 인본 문명이 아무리 시원 언어를 박멸하려 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조가 500년 간 우리말을 한문화 하려 했으나 50% 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인간이 자연을 통해 얻은 느낌과 사고와 느낌은 한문으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현재 한국어의 어휘는 총 44만개인데 이 중 순수 우리말로 된 단어는 지금도 22만개나 된다.

나 국가 상징이 전해주는 아리랑의 유산

1) 국호: 대한민국(大韓民國)

우리나라의 이름은 정식으로는 한문 표기가 가능함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줄여서 한국(韓國)이라고 부르며 외국인들은 영어로는 코리아(Korea), 불어는 코레(Coree)라고 한다 여기서 대한민국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는 "큰 한민족의 민주주의 나라"라는 의미로 한(韓)이라는 한문의 뜻이 이 국호의 핵심이다.

한문으로 한(韓)은 한문에서 草, 早, 偉大 등에서 비슷한 상형을 찾을 수 있

는데 중국에서는 전국 7웅 때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그 의미는 우물 주위라는 중국 식 풀이가 있으나 필자가 수만 년 동방 역사를 연구한 결과 얻은 결론은 한(韓)은 "위대하다, 크다., 유일하다"라는 의미로 숫자의 하나(한, 둘의 한으로 영어로 원)의 의미이며 삼한(韓)의 한(韓)도 같은 글자를 쓴다, 그런데 이조와 중국이 우물가라

는 뜻으로 풀이한 것은 황해를 우물로 비하한 데서 온 것 같다. 저들은 우리가 놈이라고 부르는 한(漢: 물가에서 자란 막 되 먹은 놈: 뙤 놈)자를 쓴다.

* 한(韓)의 한문 풀이

뜻을 나타내는 가죽위(韋▆가죽)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간)으로 이루어짐. 에운다는 뜻을 가진 韋(위)와 음(音)을 나타내며 동시(同時)에 우물 구덩이의 뜻을 나타내는 부수(部首)를 제외(除外)한 글자 (간)으로 이루어짐. 우물가를

에워싸는 우물난간의 뜻

* 대한민국

1897년 10월 12일 조선 말기 고종임금은 나라의 체제를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키고자 나라이름을 ‘大韓’으로 선포하고, 서울시청 앞 소공동에 ‘환구단’을 지은 후 천지에 제사를 올린 다음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마침내 중국과 완전히 동등한 지위를 갖는 ‘大韓帝國’을 내외에 선포한 것이다. 이 때 국호를 결정한 이유를 황제 반조문(頒詔文)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大韓은 朝鮮




의 부정이나 혁명이 아니라 도리어 檀君(단군)과 箕子(기자) 이래의 분립, 자웅을 다투던 여러 나라를 통합하고, 나아가 馬韓(마한), 辰韓(진한), 弁韓(변한)까지 呑倂(탐병)한 高麗를 이은 朝鮮이 유업을 계승, ‘독립의 기초를 창건하여 자주의 권리’를 행하는 뜻에서 국호를 정했다.」

* Korea

우리나라의 영어 이름이 ‘Korea’가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우리나라가 서양 세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고려 때부터였다. 고려의 무역항인 상해에는 많은 아라비아 상인들이 출입하였고, 이들에 의해 서양에 ‘Corea’로 소개되었다. 그 후 유럽 지도에 간혹 우리나라가 표시되었는데, 1568년에 두라도가 만든 지도에 ’Conray'로 1601년에 헤레라가 만든 지도에는 ‘Cory’로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나라 이름은 스페인어로 ‘Corea’, 프랑스 어로는 ‘Coree’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경에 영어권에서 ‘C’가 ‘K’로 바뀌어 ‘Korea’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역사돋보기)

* 전국시대

전국시대라 하면 보통 진(晋)의 경(卿)이던 한(韓)·위(魏)·조(趙)가 진을 3분하여 독립한 기원전 403년부터 진(秦)이 중국 통일을 달성한 기원전 221년까지

의 기간을 가리키고 그 시기의 이야기가 주로 『전국책(戰國策)』에서 보여지므로 전국시대라 불린다.

2) 태극기

태극기는 가운데 태극 문양과 사각의 4궤로 구성되어 있다. 태극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75년 개항을 요구하며 인천 앞 바다에 접근한 일본군함-당시 거기에는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있는 것에 자극을 받아 1882년 8월(음)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인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갈 때 태극도형(太極宜形)과 4괘(卦)를 담은 태극기를 우리나라의 국기로 사용한 것이 시초이다. 그 이듬해인 고종 20년, 1883년 음력 1월 27일 왕명으로 태극도형과 4괘가 그려진 국기를 공식으로 제정· 반포하였다. 이 태극기를 구성하고 있는 태극 문양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궁극적 실체로 7만 여 년 전 바이칼에서 창시자 효과를 경험한 최초의 호모사피엔스인 한국인들이 우주와, 자연과 인간을 보고, 느끼고 관찰한 결과로 얻어진 궁극적인 조화로운 궁극적인 실체이다. 즉 홍익인간, 제세이화, 과명개천이고 인관과 환경은 하나의 생명이고 사랑으로 연결된 영원한 생명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문양 어디에도 세계 다른 나라 국기처럼 자연 속의 피조물은 없다는 것이다.

* 태극문양

'태극'은 역경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을 이름하여 태극이라고 하였다. 그 후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 주돈이(周敦?)가 한 폭의 태극도(太極宜)를 그려 태극에 포함된 뜻과 그 발전 변화를 설명했다. 우리가 ‘태극도형’이라 부르게 된 것은 중국 주렴계(이름 돈이)가 태극도설을 발표한 뒤 정수학이 우리나라로 유입된(서기 1314년)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본다. 이 역경의 시작이 태호 복희씨이고 그는 태우의 한웅이므로 우리 조상이다.





한단고기에서는

제3대 가륵단군(BC 2181)이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가림토 문자가 발견된 곳에는 함께 태극문양의 유물이 발견되며 미국 대륙의 인디언족 출토품과 유럽의 여러 각지에서 출토된 고대유물, 지중해 연안과 이집트를 거쳐 인도에 이르기까지 세계 문화 전역에서 이 태극 문양이 발견되었다. 우리의 태극도형은 옛날부터 원형 그대로 지금까지 쓰여져 왔다.

한국의 태극문양은 유사 이전의 암각화와 고인돌에도, 고구려 벽화 사신도와 액막이의 부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때의 태극은 하늘이고 우주이며 해와 달(日月)이고, 음양의 화합을 통해 풍년과 다산을 염원한 표상이다.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태극을 신성과 신비의 부호로 사용해 왔으나, 차츰 쓰이는 범위가 넓어져 신성보다도 길상(吉祥)과 축

복의 뜻으로 쓰게된 듯 하다.

태극문양은 음과 양으로 이루어진 우주를 상징하며 현재까지의 유적과 학설을 종합해보면 태극 문양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

을 위한 궁극적 실체로 7만 여 년 전 바이칼에서 창시자 효과를 경험한 최초의 호모사피엔스인 한국인들이 우주와, 자연과 인간을 보고, 느끼고 관찰한 결과로 얻어진 궁극적인 조화로운 궁극적인 실체이다. 즉 홍익인간, 제세이화, 과명개천이고 인관과 환

경은 하나의 생명이고 사랑으로 연결된 생명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태우의 한웅

태우의(太虞義)는 배달국 5세 한웅이였다.

388년(기축년): B.C 3512, 태우의 한웅께서 천황 위에 즉위하셨다. 천황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사람의 마음을 마음을 맑게(淸心)하고 숨은 고르게(調息), 그리고 정기를 보정(保精)하여 오래 살 수 있게 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서기전 3512년, 거발한 한웅으로부터 제5세 태우의(太虞儀) 한웅은 백성들을 잘 가르쳐 나라의 질서가 잡혀 갔다. 기원전 3431년 맏 태자 다의발이 신시에서 태어났다. 복희( BC3528년 ~ BC3413년)는 태우의 한웅의 열두 자녀 중 막내이다. 태우의 한웅 시대에는 발귀리 선인도 있었다 한다.

기원전 3419년 태우의 재위 93년에 115세까지 사셨다, 제위를 다의발에게 물려주고 붕어하였다

* 태극기 유래

국기란 국가의 권위와 존엄을 표상하는 상징으로서 그 국가의 전통과 이상을 특정의 모양과 색깔로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국기

는 국가와 민족을 상징하는 신성한 표지이며 국민과 더불어 영고성쇠를 같이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라를 상징하는 체제로서 국기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875년 개항을 요구하며 인천 앞 바다에 접근한 일본군함-당시 거기에는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음-에 발포한 『운요오호(雲揚筃)』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조정에서는 우리나라를 표상하는 국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검토를 진행하던 중 1882년 8월(음)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인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갈 때 태극도형(太極宜形)과 4괘(卦)를 담은 태극기를 우리나라의 국기로 사용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대외적으로 국기를 최초로 사용한 예라고 하겠으



며, 태극도형은 우리 민족이 옛 부터 일상 생활에서 즐겨 사용하여 오던 전통문양인 태극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듬해인 고종 20년, 1883년 음력 1월 27일 고종은 왕명으로 태극도형과 4괘가 그려진 국기를 공식으로 제정· 반포하였으나 구체적인 작도법 등이 정해지지 않아 개인이나 단체에 따라 다소 다른 문양의 태극과 4괘 도안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후 태극기는 애국선열들이 독립운동에 바친 고귀한 희생의 현장에서, 조국 광복

을 맞는 기쁨의 현장에서 언제나 우리를 지키고 늘 우리와 함께 하여 왔다

3) 애국가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절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3절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4절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우리나라 애국가 가사도 태극기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는다는 것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를 의미한

다. 즉 태극기의 태극 문양의 영원성과 같으며 이것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로 미루어 아리랑과 일치한다.

자연의 영원성과 우리의 태극기, 애국가와 영원성이 아리랑과 서로 일치한다.

다 언어가 전해 준 아리랑의 유산

1) 개요

우리는 한인의 한국 개국이후 한인시대 6.3182년 한웅시대 1.565년 단군 시대 2.333년, 기원 후 2015년 도합 69.095년 간 우리말 한국어를 사용해 왔는데 이조 500년 간 중국 이씨들의 한반도 중국화 정책 강요로 현재 51만개 한국어 어휘 중 약 50%가 한문으로 표기되고 있으며, 6.25 사변 이후에는 서양 문물(주로 미국의 영어)의 범람으로 서양 외래어 사용비율이 10% 내외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어에는 한글로는 표기될 수 있어도 한문이나 영어로 표기될 수 없는 원조 언어가 너무 많아(* 주로 자연에 대한, 자연을 인용한 느낌, 감정, 정의, 사고 방법 등) 현재(2015년)까지 우리가 사용 중인



언어 중 반 이상을 한국어로 표기하고 있다. 민족의 전통 유지 중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큰데 그 이유는 이 언어로 사람들이 기억을 하고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문자로 표현되는 한 시대 한 민족의 모든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에서 한국인이 시원 민족이고 한국어가 시원 언어이며 아리랑을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남아있는 이 시원 언어는 한국인의 특징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 시원 민족으로써의 우리의 민족적 특징인 양심, 자연 사랑, 가족 사랑은 지구상 모든 인류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 인류기원은 한국....유네스코

세계 초로 유네스코에서 인류의 기원은 이집트인들이 아니고 한국인들이라고 발표했다. 이 사실은 2008년 10월 15일 명상신문의 역사란에 기고한 황문권 님에 의해서 밝혀졌다. 제목은 <유네스코에서 인류의 기원은 한국인이다라고 발표> 이다.

이 기사에서 “인류의 기원이 한국인들이라는 증거로 요동성 근방 만주지역에서 대량의 탄미(불에 탄 쌀)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탄미의 DNA 검사결과 자연산이 아니고 교배종이란 것이 판명됨으로서 농사기술이 상당한 수준을 이룩했던 것으로 판명되었고, 탄미는 군량미로 생각되며 불에 탄 흔적으로 보아 대단한 전쟁이 있었던 듯 하다는 의견이다.

또한 이 쌀은 1만 7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사람의 DNA를 검사한 결과 평균 수명이 1,000년 정도로 고조선 이전의 왕국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한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유네스코에서 인정한 것은 우리나라가 1만년 세계의 종주국이라는 사실과 위서취급받는 [환단고기]의 역사가 진실이라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 대한민국이다. “ 라고 했다.




* 한글 단어 51만개,

국립국어원(원장: 권재일)에서는 우리말의 여러 가지 모습을 객관적이고 알기 쉽게 소개하기 위해 <2010, 숫자로 살펴보는 우리말>(이하 <숫자 우리말>)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고 그 내용을 누리집을 통해 공개하였다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전 세계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구 수: 7,700만여 명

2. 전 세계 언어 중 모어 사용자 수에 따른 한국어의 순위: 13위

3. 1920년부터 2010년까지 국내에서 발간된 국어사전의 종류: 125종

4.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수록된 단어: 약 51만 개

5. 해외에서 운영 중인 한국어 보급 기관의 수: 2천여 개

6. 해외 한국어 보급 기관의 수강생 수: 25만여 명

7. 외국인 학습자를 위해 국내외에서 발간된 한국어 교재: 약 3,400권

8. 작년 아시아권 한국어 능력 시험 응시자/합격자 수: 12만 명 응시, 9만 명 합

9. 국제학업성취도 평가에 따른 15세 이하 학생의 읽기 능력: 대한민국 세계 1위

10. 2008년 대한민국 국민의 문해율: 98.3%

11. 2005년부터 2009년까지 국어 능력 검정 시험 응시자 수: 15만여 명

12. 2009년 국립국어원 ‘가나다 전화’ 상담 건수: 3만여 건

13. 1991년부터 2009년까지 외래어 표기 심의 건수: 1만여 건

14. 국어 발전 및 보전을 위해 ‘국어책임관’을 지정한 공공기관의 수: 445개

15.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국어 분야 예산: 약 192억 원

* 한국어의 한자어에 관한 주장들

국한문혼용을 주장하는 측 : 한국어 어휘의 대다수(70% 가량)은 한자어로 되어 있고, 한자어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한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한글전용으로 인해, 어려운 한자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도 생길 수 있게 되며, 동음이의어 구분을 뚜렷히 할 수 없게 되는데, 국한문혼용으로 이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




한글전용을 주장하는 측 : 한국어 어휘의 70% 가량이 한자어라는 통설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국립국어연구원이 2002년 발표한 '현대 국어 사용 빈도 조사'를 보면 한국어의 낱말 사용 비율은 고유어가 54%, 한자어가 35%, 외래어가 2%였다. 한글단체들은 1920년 조선 총독부가 만든 '조선어사전'에서 '한자어 70%' 뿌리가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2) 가장 큰 언어 유산: 양심

일반적으로 한 민족에게 언어가 남겨주는 유산은 생각, 사고 방식, 정서, 가치관, 취향, 등 인간성에 관한 모든 것임이 일반적이나. 한국 민족에게 가장 두드러지는 유산은 소위 양심이라는 유산이다. 이 양심이라는 유산은 창시자 효과를 겪은 후 69.000여 년 간 자연과 인

간을 대하는 최선의 기준으로 시원 민족에게 만 주어진 심성이다. 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마음의 최선으로 문명이 이루어지고 인본주의가 커질 수록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약화된다. 쉽게 말하면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가 양심에 우선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돈과 권력, 명예가 사람보다 우선 시 되는 경우이다. 서로 싸우고 자연을 파괴하고 경쟁을 하며 지구를 파괴해가고 과학과 자원과 인구의 힘으로 우선권을 누리고 살아가는 지금의 세상을 말한다. 문명

이 발달할 수록 양심은 약화된다. 4대강 문명이 시발점이었다. 중국인, 미국인, 일본인 러시아인들에게는 한국인에 비해 양심이 약하거나 없다. 그들에게는 홍익인간이라는 국시는 없다.

3) 아리랑의 유산 자연 사랑

한국인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자연에 대한 사랑의 심성은 문명이 있기 전 6만4천년 간 형성된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나왔고 자연과



인간은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 조상들의 기록에서 말하는 삼신, 즉, 천지인이 하나이므로 자연을 내 생명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성경 창세기에서 "에덴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는다"라고 하셨고 우리는 대신에 지유(地乳: 떨어진 과일)만 먹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자연과 조화 및 자연 보존이었고 문명인류의 목표는 자연 극복이었다. 알의 자연 사랑 유산은 현재도 우리 한국 사회에 그대로 유전되고 있는데

첫째는 자연 숭배이다. 산과 들, 강과 바다에 기도를 하고 제사를 지낸다. 큰 것일수록 더하다. 이를 천지신명이라고 부른다.

둘째는 이들이 살아있고 이들이 왕성하면 기가 센 것이고 이 기는 나의 생명과 연결되어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죽고 사는 곳을 정할 때 집터와 지신을 보고, 풍수지리를 따지며 수맥을 따지고 큰 나무가 있는 곳에서 제사와 기도를 올린다.

째는 이들 자연이 상하면 인간 생명이 상한다고 믿는 것이다

떨어지지 않는 과일은 먹지 않는 것은 물론 나물도 매년 자라는 것이 아니면 먹지 않고 무덤과 집은 나무로 만든다. 한국인들은 흙과 나무로 건물과 구조물을 만들지 돌을 깨지 않는다. 농사는 땅을 파헤치고 인간들이 속세를 만들어야 가능한 것이므로 죄악시한다. 즉 문명을 죄악시하는 것이다.

4) 아리랑의 유산 가족 사랑

우리나라의 가족(가계)위주 삶의 단위는 서양의 핵가족과 사회 위주 삶의 단위와 서로 비교해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가계 위주 삶의 단위는 여자가 아이를 낳는 자연스러운데서 비롯된 것으로 홍



수 이전의의 여신 숭배, 모계사회와 일맥 상통한다. 태어나고 낳은 사람들끼리 모인 것이며 자연과 함께 공존한 점이 특징이다. 반면에 서양의 삶의 단위는 지중해의 높은 위도(한반도보다 20도 이상 북쪽에 위치)와 어두움으로 인한 척박한 생존 환경으로 우선 살아야 했으므로 짝을 찾아 후손을 낳는 일이 급선무였고 이러한 상태가 수만 년 지나다 보니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집단화되었고 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스의 폴리스가 좋은 예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전래노래는 자연과 가족 사랑의 가사로 되어 있고 서양은 도시와 짝 찾는 것이 다음의 예처럼 주류를 이룬다.

* 한국의 대표적인 동요

1.개구리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며느리 다 모여서

밤새도록 하여도 듣는 이 없네 듣는 사람 없어도 날이 밝도록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개굴개굴 개구리 목청도 좋다

2.반달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푸른 나라로 푸른 나라 지나서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빛이 있는 건 샛별의 눈에 앉아 길을 찾아라

3.오빠생각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던 날

서울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무 잎은 우수수 떨어집니다

4.과수원 길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폈네

아카시아꽃 잎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 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보며 쌩긋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길

5.고향의 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는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6. 나비야

나비야 나비야 이리날아 오너라 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봄바람에 꽃잎도 방긋방긋 웃으며 참새도 짹짹짹 노래하며 춤춘다

7. 햇볕은 쨍쨍

햇볕은 쨍볗 모래알은 반짝

모래알로 떡 해놓고

조약돌로 소반지어

언니 누나 모셔다가 맛있게도 냠냠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호미 들고 괭이 메고 뻗어가는 메를 캐어

엄마 아빠 모셔다가 맛있게도 냠냠

* 서양의 대표적인 민요

1. 아 목동들의 피리소리들은

산골짝마다 울려 나오고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지니

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지




저 목장에는 여름철이 오고

산골짝마다 눈이 덮여도

나 항상 오래 여기 살리라

아 목동아 아 목동아 내 사랑아

2. 돌아 오라 소렌토로

아름다운 저 바다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고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

멀리 떠나버린 벗을 나는 홀로 사모하여

잊지 못할 이 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돌아 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돌아 오라 소렌토로 돌아 오라

3. 배를 타고 하바나를 떠나올 때

배를- 타고 하바나를 떠날 때

나의- 마음 슬퍼 눈~물이 흘렀네

사랑-하는 친구 어디를 갔-느냐

바다- 너머 저편 멀~고 먼 나라로

천사와 같은 비들기 오는 편~에

전하여 주게 그리운 나의 마~음

외로울 때면 너^의 창에 서~서

어여뿐 너^의 노래를 불러 주~게

아-기니타여-- 사랑스러운 너

함-~께 가리니 내게로 오-라

꿈꾸는 나-라로

아-기니타여-- 사랑스러운 너

함-~께 가리니 내게로 오-라

꿈꾸는 나-라로



라 아리랑의 유산 종교

1) 불교

불교는 힌두교와 같이 브라만교의 반동으로 나온 종교로 아리랑의

아류이다. 브라만교는 아리안들이 아리랑을 인도에서 적용한 종교이다. 따라서 불교와 브라만교, 힌두교 모두 아리랑이 그 뿌리이다. 불교를 알기 위해 아리안족의 행적을 살펴보자. 아리안 족은 원어로 알 족이다. 아리랑 족이다. 이름을 알이란(아리안)이라고 할 만큼 아리랑과 같다. 그러나 후에 그들이 인도에서 한 짓으로 미루어 알 신앙을 어두운 세계(월식 주)에 퍼트리기 위해 간 사람들로 당시 (69.000년전~ 4만년 전) 여성상위 모계사회였던 바이칼 한국인과는 다르게 남성 우선 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아리안은 바이칼에서 창시자 효과를 경험한 한국인들과 함께 살았던 민족으로 한국인의 현재 51만개 어휘 중 26만개의 어휘가 그 어근에서 같다(호머 할버트 저서 참조). 환단고기 삼성기 전 하권에 의하면 이들은 69.000년 전 바이칼에서 창시자 효과를 경험한 후 2-3만 년 간 그곳에 살다가 4만 여 년 전 이탈하여 서쪽으로 향한 일단의 무리들로 부도지에서는 이들을 백소씨(白蘇氏)라고 하여 흩어진 이유를 무리가 많아졌고 식량이 부족해져서 포도를 먹기 시작하였고 정신이 혼미해져 서로 싸우기 시작한데 그 원인이 있다고 했다.

* 불교

불교(揤敎, 영어: buddhism)는 기원전 6세기경 인도의 고타마 붓다(석가모니)에 의해 시작된 종교이다. 불교는 고타마 붓다가 펼친 가르침이자 또한 진리를 깨달아 부처(붓다 · 깨우친 사람)가 될 것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불교라는 말은




부처(석가모니)가 설한 교법이라는 뜻과(이런 의미에서 釋敎라고도 한다) 부처가 되기 위한 교법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불(佛:불타)이란 각성(覺性)한 사람, 즉 각자(覺者)라는 산스크리트 ·팔리어(語)의 보통명사로, 고대 인도에서 널리 쓰이던 말인데 뒤에는 특히 석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불교는 석가 생전에 이미 교단(敎團)이 조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이것이 발전하게 된 것은 그가 죽은 후이 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교권(敎圈)이 확대되어 세계적 종교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14세기 이후로는 이슬람교에 밀려 점차 교권을 잠식당하고 오늘날에는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아직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티베트에서 몽골에 걸친 지역,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에 많은 신자가 있으며,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다른 여러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불타가 후에 이상화(理想化)되고 확대되어 절대(絶對) ·무한(無限) 및 그 밖의 성격이 부여되고, 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창조자 ·정복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②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된다. ③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無償)의 애정이라 할 수 있어, 증오(憎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狂信)을 배척하고 관용(寬容)인 동시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한다. ④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空)'으로 표현된다. ⑤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⑥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이 강조되고 있다.

⑦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解脫)을 이상의 경지(境地)로 삼아 이를 '열반(涅槃)'이라 한다. 그 교의(敎義)는 석가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8만 4000의 법문(法門)이라 일컫듯이 오랜 역사 동안에 교의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불(佛)도 본래는 석가 자체를 가리켰으나 그의 입적(入寂) 후 불신(佛身)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 2신(身) ·3신 등의 논, 또는 과거불 ·미래불, 또는 타방세계(他方世界)의 불, 보




살(菩薩) 등의 설이 나와 다신교적(多神敎的)으로 되었다.

* 브라만교

브라만교는 《리그베다》·《야주르베다》·《사마베다》·《아타르바베다》의 4종의 베다의 종교적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우주의 근본적 최고 원리로서의 브라만(범 · 梵)에 대한 신앙을 중심 신앙으로 하여 전개된 종교로, 훗날 힌두교로 발전되었다.[1] 그러나, 브라만교가 그 포괄 범위를 명확히 그을 수 있는 종교 체계는 아니어서, 흔히 브라만교라고 칭할 때는 명확히 규정할 수 있는 특정한 범위를 가진 한 종교 체계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인도의 전통적인 민족 생활과 사회 구조에 기반하는 전통적 철학 · 사상 · 신학 · 제사 의례 등의 종교 현상 전반을 총칭하는 경우가 많다. 브라만은 우리 말 불알 만에서 온 것 같다.고대 인도에서 불교보다 먼저 브라만 계급을 위주로 《베다》를 근거로 하여 생성된 종교이다. 특정 교조(敎祖)를 갖지 않는다. 바라문[婆羅門]교라고 한자로 음사(音寫)한다. 리그베다, 야주르베다, 사마베다, 아타르바 베다의 4베다와, 베다의 주석 및 제사에 관한 규칙을 기록한 《브라마나[梵書]》 《아란야카[森林書]》, 그리고 철학서 《우파니샤드[奧義書]》 등을 계시성전(啓示聖典:佈ruti)이라고 한다. 그 외에 6종의 보조학(Ved嚆nga:音聲 ·祭式 ·文法 ·語源 ·韻律 ·天文), 《마하바라타:Mah嚆bh嚆rata》와 《라마야나:R嚆m嚆yan》의 2대 서사시, 그리고 《마누법전(法典)》 등의 성전문학(聖炩文學)이 전해지고 있다. 브라만교는 인도 아리아인(人)이 BC 1500년경에 인도에 침입한 이후 신봉하였던 민속종교로, 넓게는 힌두교(인도교)에 속한다.

최고의 베다 시대에는 자연현상의 배후에 어떤 지배력이 있는 것으로 상정(想定)하고 그것을 인격적 주체로 구체화하여 천신(天神) ·태양신 ·새벽의 신 ·뇌신(雷神), 폭풍의 신 등의 신격뿐만 아니라, 추상적 관념을 신격화한 무한신(無限神) ·공간의 신 등, 그리고 제사의 구성 부분을 신격화한 화신(火神) ·주신(酒神) ·언어신(言語神) 등 많은 신격들이 상정되고 이들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였다. 이 시대의 신관(神觀)은 맥스 뮐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다신교(多神




敎)에서 교체신교(交替神敎)를 거쳐 단일신교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후기에는 인도철학의 근본사상이라 할 일원론(一元論)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고 있다.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이는 《리그베다》 제10장에는 브라스파티(Brhaspati:기도의 힘을 신격화한 것으로 冶工과 같은 역할) ·황금태(黃金胎:부모의 생산능력에 비유) ·조일체자(造一切者:木工의 건조에 비유) ·원인(原人:그 신체의 각 부분으로부터 세계가 유래) 등의 유일신적 창조신이 나타나는데, 특히 ‘비유비무가(非有非無歌)’에서는 창조가 최고신의 2분(二分)에 의한 자기생식(自己生殖)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것은 창조자와 피조물(被造物) 간의 동질성(同質性)을 말하는 것으로 일원론적 사유의 원형이다. 브라마나 시대(BC 1000∼BC

800)에 이르러 브라마나[婆羅門:司祭族] ·크샤트리야[刹帝利:王 ·武士族] ·바이샤[毘舍:농공상의 평민족] ·수드라[首陀羅:노예족]의 바르나, 즉 4성제도(四姓制度:Caste)가 확립됨에 따라 브라만족에 의한 제사 ·학문 등의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브라만족은 다른 계급에 대한 자기들의 우월성을 강조하였고, 그것은 베다 천계주의(天啓主義), 브라만 지상주의(至上主義), 제식만능주의(祭式万能主義)로 나아가는 역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형식적이고 획일적인 브라만 계급의 횡포에 반감을 품고 자각 반성한 브라만 또는 크샤트리야들이 나타나 모은 사물의 근원적 힘으로서 브라만[梵]을 상정하였는데, 그것은 또한 인간에게 내재하는 불가설(不可說) ·불가촉(不可瘗)의 형이상학적 실체인 아트만[我]과 하나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우파니샤드 철학에 일관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이다. 브라만교에는 민중적인 기도 ·제사의 면과 고도의 철학적 면이 있다. 제사와 사회제도 등의 실천적인 면은, 후에 《가정경(家庭啬)》 《대계경(大啓啬)》 《법경(法啬)》 등의 경서를 낳았고, 철학적 면은 이른바 6파철학(六派哲學)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모두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정통파로서, 이것을 부정하는 불교와 자이나교 등과는 대립관계에 있다. 브라만교에서는 바




르나 아슈라마라는 특이한 제도가 있는데, 바르나 구성원이 한평생에 반드시 거치는 단계(생활기:asrama)가 설정되어 있다. 즉 학생기 ·가장기(家長期) ·임서기(林棲期) ·유행기(遊行期)의 4단계로 되어 있다. 브라만교는 후에 민간신앙을 받아들여 인도 국민 일반에 널리 교세를 떨치려 하였는데, 이것을 힌두교라고 한다.

* 부도지 제8장 (第八章) 출성(出城)과 분거(分居)

已矣 出城諸人中悔悟前非者 還到城外 直求挈本 此未知有挈本之時所故也

이의 출성제인중회오전비자 환도성외 직구복본 차미지유복본지시소고야

乃欲得乳泉 掘鑿城廓 城址破損 泉源 流出四方 然 卽化固土 不能飮?

내욕득유천 굴착성곽 성지파손 천원 유출사방 연 즉화고토 불능음철

以故 城內 遂乳渴 諸人 動搖 爭取草果 混濁至極 難保淸淨

이고 성내 수유갈 제인 동요 쟁취초과 혼탁지극 난보청정

以故 城內 遂乳渴 諸人 動搖 爭取草果 混濁至極 難保淸淨

이고 성내 수유갈 제인 동요 쟁취초과 혼탁지극 난보청정

黃穹氏爲諸人之長故 乃束身白茅 謝於麻故之前自負五味之責立誓挈本之約

황궁씨위제인지장고 내속신백모 사어마고지전자부오미지책입서복본지약

退而告諸族曰五味之禍反潮逆來 此出城諸人不知理道徒增惑量故也

퇴이고제족왈오미지화반조역래 차출성제인부지리도도증혹량고야

淸淨已破 大城將危 此將奈何 是時 諸天人 意決分居 欲保大城於完全

청정이파 대성장위 차장내하 시시 제천인 의결분거 욕보대성어완전

黃穹氏乃分給天符爲信 敎授採葛爲量命分居四方

황궁씨 내분급천부위신 교수채갈위량 명분거사방

於時 靑穹氏 率眷出東間之門 去雲海洲 白巢氏 率眷出西間之門 去月息洲

어시 청궁씨 율권출동간지문 거운해주 백소씨 솔권출서간지문 거월식주

黑巢氏 率眷出南間之門 去星生洲 黃穹氏 率眷出北間之門 去天山洲

흑소씨 율권출남간지문 거성생주 황궁씨 율권출북간지문 거천산주

天山洲大寒大險之地 此黃穹氏 自進就難 忍苦挈本之盟誓




천산주대한대험지지 차황궁씨 자진취난 인고복본지맹서

解譯 :

이미 성을 떠난 여러 사람들 가운데 이 전의 잘못을 회오하는 자들이 성 바깥에 돌아와 복본(挈本)을 구하기를 굽히지 않으니 이는 복본의 때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었느니라. 이에 유천(乳泉)을 얻고자 하여 성곽의 밑을 파헤쳐 성터(城址)가 파손되고 샘의 근원이 사방으로 흘러 나갔으나 곧 단단한 흙으로 변하여 먹고 마실 수가 없었느니라. 이러한 까닭으로 성 안에 마침내 지유가 고갈되니 모든 사람들이 동요하여 초과(草果)를 얻기 위해 다투니 혼탁함이 극한에 이르고 청정(淸淨)을 보존하기 어렵게 되었느니라. 황궁(黃穹)씨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어른이었으므로 마침내 백모(白茅)로 몸을 묶어 마고(麻姑)의 앞에 오미(五味)의 책임을 짊어짐으로서 복본의 약속을 세워 사죄하고, 물러나와 여러 족속(諸族)에게 고하기를 ‘오미의 재앙이 반대로 흘러 들어와 밀려오나니 이는 성을 나간 여러 사람들이 이치와 법도를(理道)를 알지 못하고, 다만 의혹((혹량 惑量:미혹/의혹)이 늘어났기 때문이니라. 청정(淸淨)은 이미 깨지고 대성(大城)이 장차 위험하매 앞으로 이를 어쩔 것이리오‘라고 하였느니라.

이 때에 천인(天人)들이 분거(分居)하기로 뜻을 정하고 대성을 완전하게 보전하고자 하였으니, 이에 황궁씨가 천부(天符)를 믿음의 증표(信)로 나누어 주고, 칡(葛)을 캐서 식량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사방에 분거할 것을 명령하였느니라. 이에 청궁(靑穹)씨는 권속(眷屬)



을 이끌고 동문을 나가 운해주(雲海洲)로 가고, 백소(白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서문을 나가 월식주(月息洲)로 가고, 흑소(黑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남문을 나가 성생주(星生洲))로 가고, 황궁씨는 권속을 이끌고 북문을 나가 천산주(天山洲)로 가니, 천산주는 매우 춥고, 매우 위험한 땅이었느니라. 이는 황궁씨가 고난을 취하여 나아감으로써 복본(挈本)의 맹서를 인고함이었느니라. (부도지는 신라사람 박재상이 쓴 민족 최고(最古)의 역사기록이다.)

이들 아리안은 기원 전 2~3만 년 전에는 인도 북쪽 스텝지역에 살다가 1만 년 ~ 1.3만 년 전에 인다스강 갠지스강 유역으로 진출해서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원주민들에게 강요했으니 이것이 바로 브라만교고 카스트 제도이며 이 때부터 인도에서는 크샤트리아를 중심으로 브라만 지배 계급에 대한 반항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석가도 네팔 샤카족의 크샤트리아 출신이다.

* 아리안 족

아리안 족은 인도유럽어족의 조상이다. 유럽과 인도에 아리안족이 살았다는 것이며, 원래 같은 족속이라는 것이 된다. 이란이라는 나라의 족속이 아리안족이라고 한다. 아리안족이 문명을 이뤘던 지역이 정확히 중앙아시아 어느 지역이며 언제쯤 어떤 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문명을 이룰 수 있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아리안족은 백인종들의 선조로 스키타이족, 게르만족, 슬라브인, 노르만인 등 모든 백인종은 모두 아리안의 후손들이다.

대략 3,500년 전, 페르시아 북부를 중심으로 모여살던 아리아족(族)이 인도땅을 점령, 인도역사의 주인이 되었다. 기원전 1500년경 아리아족의 왕조를 이은 후




르리족은 북(北)메소포타미아 각지에 미탄니 왕국을 비롯한 여러 왕국을 건설했다. 아리안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유럽 계통의 종족으로 철제 무기를 사용하고 기마전술이 뛰어난 민족이었다. 아리안은 기원전 1700∼1800년경에 민족 대이동을 시작하여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펀잡 지방으로 내려와 인도의 새로운 통치 계급이 된 아리아족은 원주민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신과 차별을 두어 엄격한 계급 제도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달하여 인도의 '계급 제도', 즉 카스트 제도가 되었다. 힌두교와 힌두 문화는 고대에 인도로 유입된 아리안족의 신들과 드라비다족의 토착신들이 뒤섞이면서 형성된 문화이다.

그러면 아리랑에서 나온 불교가 아리랑을 어떻게 소화시켰는지 살펴보자 우선 불교는 모든 인간의 집단 사회를 속세라고 해서 부정한다. 그러나 자신들은 고대의 알 세계에 절을 지어 살았다. 인간사회의 모든 죄악(108번뇌)의 원인이 욕심(오욕7정)에서 왔다고 생각하고 이를 끊기 위해 독신으로 살면서 수련 방식을 석가모니를 따르도록 정했는데 이 점만 아리랑과 다르다. 대표적인 아리랑 신국인 신라 불교의 예를 들면 지배계급이 백성들을 포용하려는 목적으로 불교를 받아드렸으나 아리랑의 유산을 버리지 못했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절을 세우고 (풍수지리)선황당(先皇堂: 성황당)이 있던 웅상(雄像)에는 대웅전을 신도들을 위해 절 뒤에 칠성각을 세웠으며 절에 와서 절을 하라고 이름도 "절"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불교대로 모두 중이 되고 비구니가 되면 인류는 없다는 것이 한계이다. 불교는 남성우위 아리랑교인 브라만(불알만)에서 나온 반동이고 그래서 아리랑의 유전을 지금까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2) 이슬람교

이슬람교는 동서양 사이에 낀 사람들이 살려고 만든 종교이다. 이들은 동서 교역로 에 살면서 자신들이 가지기보다는 운반해주거나 중계해 주는 역활을 하면서 살아왔다. 이들은 원래 인도 유로어족의 원조인 인 아리아인들의 시조로 지리적 특징으로큰 시련 없이 살아 왔고 인본적인 발전을 이룰 커다란 계기나 동기도 없었다. 동과 서양 중 한쪽이 강대해지면 항상 침략을 당해 왔다. 그 시작은 성경

여호수아서가 말해준다. 여호수아에 의한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복은 팔레스타인 인들을 하나님과 성경의 이름으로 몰살하고 그들의 터전을 빼앗은 사건으로 지금도 그 비극이 계속되고 있다. 중동에 대한 외세의 침략은 7세기 경 당나라 고선지의 히말라야 산을 넘은 서진과 11세기 이후 동로마제국의 동으로의 침략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역사상 서방의 가장 큰 중동 침략은 산업혁명 이후 1,2차 대전까지 계속된 서방의 식민지 쟁탈로 인한 것이며 영국이 수위를 차지한다. 영국은 지리상 발견이후 바다를 이용하여 중동을 포함하여 지구상 거의 자연 인구 지역을 점령하고 그들의 자원을 약탈하였다. 여기에 대항하여 중동에 나타난 것이 이슬람이다. 따라서 이슬람의 근본은 한 손에는 코란이고 한 손에는 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성전이라고 부른다. 또 이슬람은 기독교보다 700여 년 정도 뒤에 생겼고 아라비아 반도는 히브리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구약도 예수도 마호메드처럼 선지자로 인정하고 알라라는 이름만 다를 뿐 창조주 하나님도 개념적으로 기독교와 같다. 다만 중동 아리안의 언어적 특징과 기독교와의 연관성을



통해 무슬림과 아리랑의 같은 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같은 점

아리안이란 이름 자체가 아리랑(알이랑)과 같으므로 부도지의 기록으로 미루어 이들이 백소씨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

자연주의로 인간세계의 목표를 자연과 일치시키는데 둔다.

- 차이점

남성 우위(아리랑은 모계사회)로 여성하위 사회이다.

마호메드를 가장 우선하는 선지자 위치에 둔다.

중동 민족의 생존 위한 전쟁이 종교의 목표이다. (코란의 내용 참조)

* 무함마드

(570년경~632년 6월 8일}는 이슬람의 예언자이며 성사(聖使)이다. 흔히 마호메트 또는 모하메드(Mohammed, Muhammad, Mahomet)라고도 하는데, 이는 무함마드를 영어로 쓴 것을 번역한 표현이다.

* 태통

동아시아에서 중국 민족이 후삼국을 정립해갈 무렵, 서아시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배화교)를 믿는 이란 민족이 파르티아 왕국을 대신해 새로운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를 세웠다. 그 사산조가 멸망한 후 서아시아의 역사 무대는 아라비아로 옮겨진다. 그것은 6세기 말부터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가 만성적인 전쟁상태에 빠져 그때까지 이란으로부터 시리아를 경유하던 동서 무역의 간선(幹線)이 아라비아 반도의 서해안을 통과하게 되어 그 중심에 위치한 메카가 주요 국제무역의 이익을 독점했기 때문이었다. 이슬람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태동




되었다.

* 오스만 제국(1299-1922)

오스만 제국은 후세의 역사 전승에 대해 시조 오스만 1세가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서북부에 세력을 확립해 신정권의 왕위에 올랐다고 여겨지는 1299년을 건국 연도로 하는 것이 통례이며, 술탄제가 폐지되어 메흐메트 6세가 폐위된 1922년이 해체 연도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오스만 왕조 초기에 대해서는 동시대의 사료가 부족하고, 사실과 전설이 혼연하고 있으므로 정확한 건국 연도를 특정하는 것은 어렵다

* 이슬람 근본주의

이슬람사(史)에는 이슬람의 근본 교리를 부정하는 이단(異端)이 나타난 바 없다. 이슬람 자체가 근본주의이기 때문에 따로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말이 생겨날 수가 없다. 이슬람은 또 정교합일(政敎合一)의 공동체적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이슬람의 전통과 순수성을 지키려는 반(反)외세 투쟁으로 표출된다. 이슬람은 근본정신을 유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왔기 때문에 서구사회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대안문명으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 이슬람의 역사

6세기 후반에 이란의 사산왕조페르시아와 동로마제국의 전쟁으로 기존무역로가 막힌다.

상인들은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게되고 새로운 무역로 가까이에 있던 메카가 번성하게 된다.

메카는 거대한 무역중심지로 성장하게 되고 먼거리를 함께 여행하는 카라반(대상)무역의 중심지로 발달하게 된다. 이 무렵 메카에서 마호메트가 태어나고 부유한 과부 하디자의 대상에 들어가게 되고 하디자와 결혼하게 된다.경제적인 여




유를 가진 마호메트가 히라산의 동굴에서 명상을 시작하게 된다. 마호메트가 히라산에서 가브리엘을 만나 알라의 계시를 전한다. 마호메트의 가족과 해방노예와 젊은 사람들과 사회불만 층이 믿기 시작하면서 점점 늘어난다. 이들은 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인 무슬림으로 불린다. 마호메트가 등장하여 메카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메카의 지배층이 이슬람교를 박해한다. 마호메트는 초승달이 뜬 밤에 신자들을 이끌고 메디나로 가게되는데 이를 헤지라라고 한다. 이 년도가 622년이며, 이슬람달력의 첫 해로 정함, 또한 초승달은 이슬람국가들의 국기에서 많이 등장한다. 마호메트는 메디나로 가서 정치와 종교가 하나로 결합된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만듬, 630년에는 메카를 점령하고 아라비아 반도 전체를 통일한다. 마호메트가 죽고, 선거를 통해서 뽑히는 칼리프(후계자, 대행자)가 이슬람 제국을 다스린다. 칼리프들은 이슬람교를 포교하기 위해서 이슬람교도들을 지하드라는 성스러운전쟁에 참가시킨다. 이때의 이슬람군대는 사산왕조페르시아를 멸망, 동로마제국을 공격해 시리아,이집트를 점령한다. 정복지역에 자국민을 이주시켜 군인과 관료로 임명하고 다스리는 제도로 이슬람을 빠르게 확장한다. 알 리가 4대 칼리프로 선출되자 정당성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는데 이때 이슬람교가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누어지게 되고, 결국 알리는 암살되며, 옴미아드 가문이 왕조를 일으킨다. 옴미아드 가문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세우고,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스페인, 에스파냐)를 점령하고, 동로마제국을 공격한다. 옴미아드왕조는 아랍어를 공용어로 제정하고 화폐를 통일함 그러나 아랍인과 비아랍인을 차별하여 멸망하게 된다. 아바스가문의 아불 아바스는 코라산에서 반옴미아드세력을 결성하고 농민, 노예, 비아랍인, 심지어 아랍인까지 참가하여 약해진 옴미아드 왕조를 무너뜨린다. 아바스왕조는 바그다드에 수도를 건설하고 아랍인과 비아랍인의 차별은 없애고 빠르게 성장한다. 아바스 왕조가 건국되고, 옴미와드 왕조는 이베리아(스페인,에스파냐)반도로 옮겨가서 코르도바를 수도로 세우고 후옴미아드 왕조를 세우게 된다. 10세기말, 아바스 왕조가 힘을 잃게 되고 지방총독들이 독립하여 나라를 각자 세운다. 이란에서는 사만왕조, 이집트에서는 파티마왕조, 이라크에서는 부와이왕조가 아바스왕조의 바그다드를 차지하고 각자의 왕조를 세운다. 이 시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을




하던 셀주크튀르크는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게 되고, 바그다드에 침입하여 부와이 왕조를 무너뜨리며, 아바스왕조를 위협한다. 셀주크튀르크는 아바스의 칼리프로부터 술탄이라는 칭호와 정치적실권을 넘겨 받는다. 셀주크튀르크는 비잔틴제국을 위협하며, 예루살렘을 성지순례하는 기독교도를 막는다. 교황은 7차례에 걸쳐서 십자군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 이슬람 상식

⽦‘한손엔 코란,한손엔 칼’은 무슬림의 신념이다?=이슬람의 어원이 아랍어 살람(Sa lam·평화)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 평화를 존중하는 것이 이슬람의 교리다.이 문구는 서구사회에서 이슬람교를 폭력적 종교로 왜곡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 또한 테러 역시 교리 에 일치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코란의 가르침에는 부녀자등에 대한 폭력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테러는 이슬람 정신과 무관하다.

⽦무슬림(이슬람 신자)은 마호메트만 섬기며 예수를 배척한다?=이슬람교에서는 마호메 트 뿐만 아니라 예수·아브라함등 모든 선지자들을 존경한다. 단지 하나님이 보낸 최후의 사도 마호메트를가장 높게 섬기는 것.

⽦이슬람 사회에서는 일부다처제를 무제한 허용하며 남자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다?=이슬 람의 일부다

처제를 정확하게 표현하면 부인을 4명까지 둘 수 있는 일부4처제라 할 수 있다.그러나 율법에서는 일부 4처제를 허용하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데 부인이 불임증인 경우나 성생활이 불가능할 때,전쟁이나 사고로 여성의 숫자가 남자보다 절대적으로 많은 상황등으로 제한된다. 여기에는 전쟁으로 인한 가장의 사망이나 이혼을 당해 생계 유지가 곤란해지는 여인과 아이들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 담겨있다. 때문에 대다수 사람 들은 일부일처다.

⽦무슬림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돼지를 신성시하기 때문이다?=힌두교도가 쇠고기를 안먹는 점을 연상해 이런 오해를 하는 사람이 있다. 돼지고기를 금하는 것은 이와는 정 반대로 돼지가 더러운 동물이라고 코란에 명시돼 있기 때문이며 개고기와 동물의 피도 마찬 가지 이유로 먹지 않는다. 모든 이람 국




가에서는 손으로 밥을 먹는다?=오른손으로 식사하는 것에 대한 설명은 마호메트의 언행록인‘하디스’에 담겨 있는 내용이다.하지만 도구 사용을 금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많은 나라에서는 수저등을 쓰고 있다.오른손으로는 인사·식사등 정결한 행동을,왼손은 청소와 같은 하찮은 일을 하는 양손의 역할 분담이 교리에 의해 엄격하게 규정 된다.

⽦그 밖의 잘못된 용어들=사람들이 오용하는 대표적 단어로‘알라신’을 들 수 있다. 이슬람교에서 섬기는‘알라’는 하나님이라는뜻이므로 알라신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신’이라는 어색한 표현이된다. 그냥 알라라고 해야 한다.‘회교’나‘마호메트 교’역시무슬림들에게는 무례한 표현이 된다. 반드시 이슬람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예의에 맞는다

* 가나안 정복

모세의 영도아래 출애굽(B.C.1446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세대를 거쳐 광야에서 방황한 후인 B.C.1406년경부터, 가나안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지파별로 땅을 분배해 나가는 B.C.1390년경까지가 가나안 정복이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의 임무를 받고 활동하던 그 당시 가나안은 정치적으로 볼 때 아직 중앙 통치가 이뤄지지 않은 도시 국가의 형태로서, 많은 국가들이 각기 자기의 왕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각 성읍 간의 결속력이 매우 약하였다. 가나안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애굽의 영향력도 완전히 사라진 때로서 가나안은 강력한 세력이 형성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기에 가 적절한 시기 였다고 성경에서 쓰고 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점령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 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한다.

* 동서 교회의 분열

기독교의 동서 분열은 기독교 역사상 11세기에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상호 파문으로 분리된 사실을 말한다. 이에 대해 단일한 기독교 공동체에서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탈한 것으로 이해하는 동방 정교회의 시각과 교황과의 일





치로부터 동방 정교회가 이탈한 것으로 이해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시각차이가 오늘날까지도 대립하고 있다.

* 동(東)로마제국

동(東)로마제국은 비잔틴제국이라고도 한다. 고대 로마제국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결과 서방의 판도를 잃었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보스포루스해협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인 비잔티온(지금의 이스탄불)에

제2의 로마 수도를 건설하였다. 로마 역사에서 비잔티움 제국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가에 대한 학계의 합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많은 이들이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재위 AD 306~337) 황제가 최초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제국의 시작점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재위 379~395) 황제가 집권하고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포한 시점, 혹은 그가 사망한 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뉜 시점으로 보고있다.

제국의 수도 비잔티움은 330년 5월 11일 개도식(開都式)에서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누스의 거리)이라 불리게 되었고, 제국은 이곳을 중심으로 1000여 년에 걸쳐 존속했다. 제국의 멸망 시기에 대해서도 몇몇 이견들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Mehmed II : 재위 1444~1446, 1451~1481)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한 시점이라는 견해가 가장 우세하다.

비잔틴 제국, 혹은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붙여진 명칭으로,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고대 지명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고, 그리스어로 로마 제국을 의미하는 '바실레이아 톤 로마니온' 혹은 '임페리움 로마노룸(Imperium Romanorum)'이라고 불렸다. 비잔티움 제국이 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1557년 독일인 역사학자 울프(Hieronymus Wolf)가 자신의 역사서에서 '비잔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부터였으며, 후에 몽테스키외(Montesquieu) 등의 학자들의 저작물을 통해 일반화되었다.

정치적으로 로마의 이념과 제도를 이어받고, 종교적으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다.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을 기조로 했으며, 언어, 문화, 생활 면에서 그리




스의 전통을 많이 따랐다. 따라서 그리스를 중심으로 아나톨리아와 동지중해안의 여러 섬들을 포함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로 성장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Ⅰ, 재위 527~565) 황제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왕권이 안정기에

접어든 헤라클리우스 황제(Heraclius, 재위 610~641) 때 전성기를 누렸다.

비잔티움 제국은 그 지정학적 위치상 로마 제국의 고전적 전통 및 중세 가톨릭 유럽과 소아시아의 이교문화의 교차 지점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북쪽으로부터 잇따라 침입한 스텝의 유목민족, 슬라브족, 동방의 위협적 존재인 사산왕조 페르시아인 및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人), 투르크인에 대해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의 동쪽 관문을 지켰던 것은 사실이나, 반드시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과 끊임없이 접촉하며 사회적·문화적으로 다원화된, 수용력이 큰 제국으로 성장했으며, 실크로드와 지중해 상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며, 중세 유럽의 상업을 부활시키는데 기여했다.

한편 그리스도교의 종주국으로서 동지중해의 신학, 학문, 문화의 중짐지였으며 동(東)유럽 제국(諸國)의 역사적 초기에 그리스도교 포교를 통하여 그 문화적 기초를 준비하였다. 또한 재건이 막 시작된 동시대의 서(西)유럽에 정치적·문화적 교섭을 통하여 계속 영향을 끼쳤다. 이리하여 그리스 정교권(正敎圈)이 형성되어 비잔티움제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이반 3세의 '제3의 로마·모스크바'의 이념에 계승되었다. 또 이 제국에서 보존된 그리스어의 지식은 문예부흥기의 서유럽인에 의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12세기 이후 과도한 영토확장 전쟁과 여러 민족간의 갈등, 종교적 분열, 이민족의 침입 등으로 제국의 재정과 인력이 파탄에 이르렀으며, 행정 구조가 변화하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어 결국 붕괴되었다.

* 영국의 식민지 목록

- 아시아

인도. 스리랑카. 몰디브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이란 이라크 요르단 팔레스타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카타르 쿠웨이트 미얀마 말레




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키프로스 홍콩

- 유럽

몰타,아일랜드

- 아프리카

가나 시에라리온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짐바브웨 잠비아 이집트 수단 남수단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보츠와나 말라위 모리셔스 세이셸 스와질란드

레소토 카메룬 (프랑스와 공동 통치.) 감비아 소말리아 리비아 (이탈리아도 리비아를 통치 하였음)

* 코란에 있는 내용들

불신자들은 불로 영원히 고통당할 것이다. 그들의 피부가 다 탔을때 그들은 새로운 피부를 입혀지게 될 것이다.

(4:56 보라! 우리의 계시를 믿지않는 자들을, 우리는 그들을 불에 내어줄것이다. 그들의 피부가 타서 없어질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새로운 피부들로 갈아입힐 것이고 그들은 고통을 맛볼 것이다. 보라! 알라는 강하고 현명하시다.)

알라의 계시를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떠한 자비도 바라지 말라. 그들에게는 고통스런 멸망이 있다.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코에는 코로, 귀에는 귀로, 그리고 이에는 이로. 이슬람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악행 하는 사람들이다

불신자들은 지옥불을 가지게 될것이다.

불이 그들의 얼굴을 태울 때, 그들은 절망할 것이다.

모하메드의 계시를 거부하는 자들은 멸망당할 것이다.

지옥 불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 불에 의해 영원토록 고통 당할 것이다.

이슬람교을 반대하는 자들은 섬칫한 살육으로 살해될 것이다.

모하메드의 계시에 도전하는 자들은 고통스런 멸망을 갖게 될 것이다

지옥에 던져진 자들은 그들에게 탈출구가 없다는 것을 알게될 때 겁에 질릴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이 믿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알라의 계시들을 듣고 거절하는 자들은 죄스런 거짓말쟁이들이다. 그들에게 고




통스런 멸망을 안겨주라.

알라의 계시에 대해 농담하는 자들은 지옥에 갈것이다. 그들의 운명은 끔찍한 멸망이 될것이다.

너희들이 불신자들과 싸울때는 그들의 목을 세게 내려쳐라. 알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는 자들은 상을 받을 것이다.

성경과 알라의 선지자들을 부인하는 자들은 질질 끌려 끓는 물을 통과하게 되고 지옥불속에 던져질 것이다.

지옥에 던져진 자들은 그들에게 탈출구가 없다는 것을 알게될때 겁에질릴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이 믿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알라의 계시에 대해 농담하는 자들은 지옥에 갈것이다. 그들의 운명은 끔찍한 멸망이 될것이다.

너희들이 불신자들과 싸울때는 그들의 목을 세게 내려쳐라. 알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는 자들은 상을 받을 것이다.

성경과 알라의 선지자들을 부인하는 자들은 질질 끌려 끓는 물을 통과하게 되고 지옥불속에 던져질 것이다.

그들이 알라의 멸망을 볼때 그들은 믿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불신자들은 멸망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동산에서 편히 쉬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지옥불꽃에 굽힐 것이다.

죄인들은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당할 것이다. 알라는 그들의 형벌을 완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 알라를 위해 싸우기를 거절한다면, 그는 너희들을 고통스런 멸망으로 벌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알라를 위해 기꺼이 싸운다면, 그는 너희들에게 많은 약탈품을 줄 것이다.

모하메드와 함께하는 자들은 불신자들에게는 인정사정없을 것이고, 그 자신들에게는 자애로울 것이다.

불신자들은 신자들을 알라보다 더 무서워한다.




지옥불의 연료는 사람들과 돌들이다.

코란을 "단순한 우화들"로 여기는 자들은 그 코에 낙인이 찍힐 것이다.

거대한 지옥불에 쳐 던져진 자들은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할 것이다.

3) 기독교

가) 아리랑과 기독교는 거의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먼저 유대인이 동방 사람들이고 창세기도 모두 아리랑에서 나왔으며 예수도 동방에서 교육을 받았다. 자세히 살펴보려면 유대인의 뿌리, 유대교의 기원, 예수의 근본, 성경의 내용 등에서 아리랑이 준 영향을 체계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나) 아리랑이 유대인에게 물려준 유산

먼저 유대인은 아리안의 가지이다. 아리안을 스스로 알이라고 칭했으면서도 남성 우위 제사장 계급을 인도북부 스텝 지역, 인다스 간지스 강 유역, 지금의 중동 지역(메소포타미아. 수메르)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살아오는 동안 수만 년 간 스스로 제사 계급인을 자처하면서 수리(높은 계급)를 누린 민족이다. 유대인은 기원전 2.600년 경(동방에서 탁록의 전투가 있던 동시대) 이들은 옛 한국 12연방의 가지인 수밀이(* 수메르: 소머리라는 말에서 온 어휘로 이들이 지구 최초로 소를 가지고 농경을 시작하였음)에서 갈라져 나와 지금 시리아 알레포 남쪽에 에벨을 왕으로 하여 에볼라라고 하는 도시국가를 세웠다(창세기10:25) 이 에볼라 도시국가는 동서 교역로 상의 지중해에 연하는 지역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서 동서 교류가 가장 빈번했던 곳으로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그들의 상업적 기질이 생긴 것으




로 보인다. 유대인들은 이 에볼라 도시국가를 기반으로 동서 교역을 선점하면서 수천 년 간 교역언어를 동서양에 전파했는데 이 언어가 바로 예수가 죽을 때 부르짖었다고 하는 아람어 이다. 이 아람어는 후에 인도 아소카 왕(기원전 265년경 ~ 기원전 238년) 때 세운 비문에 새겨져 있을 정도로 당시 동서양에서 다 통하는 언어로 사용되어왔고 예수의 청년 시절 인도 유학도 이 언어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유대인들은 일찍이 동서교역을 통해 자신들의 모체가 동방

에서 왔고 창세도 그곳에서 시작되었으며, 에덴, 가인과 아벨, 노아

홍수, 등 고대의 모든 것이 동방에서 유래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에볼라의 유대인들은 동서 교역로의 영향으로 동방이나, 인도처럼 다신을 섬기고 있었고 에볼라에서 유행했던 다신을 총칭을 여호와라고 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유일신 이름으로 사용한 바로 그 이름이다. 예수는 처음부터 이 이름을 반대하고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하면서 여호와에서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리랑이 유대인에게 물려준 유산을 요약하면 아브라함 이전의 창세기, 여호와라는 이름, 유일 신 사상, 기도, 제사 및 제사장 기능, 동서 교역을 통한 돈의 사용, 장사하는 기술, 돈을 중시하는 기질, 등이고 반면, 수메르인들이 유대인에게 물려준 유산은 바벨탑, 말뚝 신(말뚝을 섬기는 것 후에 예루살렘에 있던 멜기세덱)등이었다.

다) 아리랑이 예수에게 물려준 유산

예수가 인간 신을 믿지 않고 자연의 창조주를 믿었다(아라랑)는 사실은 다음 세 가지로 증명된다.



첫째 주기도문에서 가장 먼저 강조한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는 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가장 먼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부르지 않고 여호와(에볼라 왕국의 다신의 이름)라고 부르는 것을 금지시키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라고 부르도록 강조했다.

하늘, 우리, 아버지 모두 자연이 만든 이름이다.

둘째, 예수가 인본주의 하나님이 아닌 자연의 창조주(아리랑)를 믿도록 강조한 사실은 공관복음의 모든 비유이다. 그는 한번도 로마나, 유대교, 즉 인간의 창조물을 가지로 비유를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로 돌리라(마22:21)외에 모든 그의 비유는 자연과 인간의 생리적인 것을 인용한 것들이었다. .

* 예수의 자연과 생리 비유

소금 (마 5:13)

새 포도주와 낡은가죽 부대 (마 9:17)

추수할 일꾼(마 9:37,38; 눅 10:2)

뱀과 비둘기(마 10:16)

씨뿌리는 자와 밭 (마 13:3-8; 막 4:3-8)

가라지(마 13:24-30)

겨자씨(마 13:31,32; 막 4:30-32; 눅 13:18,19)

누룩(마 13:33; 눅 13:20,21)

밭에 감추인 보화 (마 13:44)

진주 (마 13:45,46)

씨뿌리는 자와 밭 (마 13:3-8; 막 4:3-8)

가라지(마 13:24-30)

겨자씨 (마 13:31,32; 막 4:30-32; 눅 13:18,19)

누룩 (마 13:33; 눅 13:20,21)




밭에 감추인 보화(마 13:44)

진주 (마 13:45,46)

그물 (마 13:47,48)

집 주인 (마 13:52)

잃은 양 (마 18:12,13; 눅 15:4-6)

빚진 자 (마 18:23-24)

포도원 품꾼 (마 20:1-16)

두 아들 (마 21:28-32)

불의한 농부(마 21:33-41)

혼인 잔치 초청 (마 22:2-4)

열 처녀 (마 25:1-13)

양과 염소 (마 25:31-36)

식물의 성장 (막 4:26-29)

선한 목자와 양 (요 10:2-5)

포도나무와 가지(요 15:1-6) (마 18:12,13; 눅 15:4-6

싹난 무화과 나무 (마 24:22,23)

열 처녀 (마 25:1-13)

양과 염소 (마 25:31-36)

식물의 성장 (막 4:26-29)

열매 없는 무화과 (눅 13:6-9)

셋째 아리랑이 예수에게 물려준 가장 커다란 유산은 하나님께서 그의 청년시절에 동방에서 허락한 자연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었다. 당시 동방에서는 하나밈이 삼한(세개의 하나님)으로 분리되었다가,

진한의 아리랑이 불교의 밀교와 힌두교에 전해진 시기였다. 보병궁 복음서에 보면 예수는 14세 때에 인도에서 온 귀족을 따라 인도로



갔고 그곳에서 처음에는 브라만교를 믿었으나 후에 힌두교와 티벳 불교의 밀교를 섭렵했고 맹그스테 등 최고의 스승들에게서 오병이어, 물위로 걷기, 모습의 변화, 음식의 변화 치료, 등 갖가지 술법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 예수의 인도 행적..

예수의 불교식 이름은 '이사(ISSA)'였으며, 그는 13세때 유태법에 따라 가장권을 갖고 결혼을 해야할 입장에 놓이게 된다.당시 소년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준수한 예수를 사위로 삼고 싶어하는 어느 부호의 끈질긴 요구가 있자, 그는 비밀리에 상인을 따라 인도 지역으로 떠난다.

이사는 14세때 아리아인들 속에 정착, 힌두 거장들에게서 '베다 우파니사드'등을 공부하나 사성계급을 주장하는 브라만교에 실망을 느끼고 이를 비판하다가 박해를 받게되자 이곳을 탈출한다.

이사는 만인의 해탈 가능성과 평등사상을 부르짖는 불교에 매료돼 불교도틈에 들어가 부다가야 녹야원 베나레스 등지에서 6년간 불교의 교리를 배우며 수도생활을 한다.

이사의 불교공부는 캐시미르를 거처 라다크의 레어에서 팔리어어 산스크리어를 배우며 이어서 티베트에서는 그곳 밀교계의 고승인 맹그스테에게서 기적을 일으키는 비법과 심령치료 비방 등을 집중적으로 익혀 나갔다.

불교의 고승인 이사 대사의 이스라엘 귀국은 페르시아를 거처 불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29세때 이뤄진다. 이사는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불교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며, 계율, 살생, 투도, 간음 등을 지키며 새로운 민중의 희망으로 부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불교적 연대기에 신라 원효,혜일 대사 등과 같이 이사대사의 자세한 활동기록이 소개돼 있는데 반해, 기독교계 문헌인 누가복음에는 다만, "그때까지(30세)예수는 사막에 있었다.'라고 막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녹야원' '부다가야'등지에서 오랜 수도생활을 하고 티벳을 거처 29세




때 귀국을 하였다. 예수는 인도, 티벳에서 밀교계의 고승 「우도카라」「멘쿠스테」로부터 심령 치료의 비법을 전수 받았다.

이들 스승은 예수에게 도술을 이기적으로 남용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귀국후 예수는 유일신교인 유대교파들에게 모든 인간의 절대 신성을 부르짖으며 이적을 행하고, 군중을 모아 신의 사랑과 평등 사상을 전파하였다.

결국 예수는 유대교파의 질시와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는데, 이때 예수가 제가 요한 에게 모친을 부탁한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Eli Eli Lama Sabachthani : '하나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로 번역되어 왔음)이라는 말 한마디를 크게 소리친 뒤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예수의 최후 말씀은 티벳트 라마불교의 진언인 "엘리엘리 라마 삼약 삼보리"라는 다라니로 밝혀졌다. 즉 예수는 극도로 탈진해 생사를 가늠하는 마지막 순간에 모든 장애를 벗어나 한량의 복덕을 얻게 되는 권능이 있다고 전해지는 라마불교의 주문을 암송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예수의 제자들은 이 주문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죽은뒤 40~50년후에 예수의 말을 정리하기 시작할때 마지막 말의 의미가 잘 못 기록되고 번역되어 후세에 전해진 것이다

예수가 죽음을 바로 앞두고 라마불교의 진언을 암송했다는 것은 예수의 인도, 티벳 구도생활을 밝혀주는 결과이다

라) 아리랑이 성경에 미친 영향

아리랑이 성경에 미친 영향은 창세기와 신구약 전반에 이른다. 그리고 창세기의 경우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내용을 바로 이 아리랑이 설명해준다. 우선 창세기 1장1절의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태초는 뉴질랜드 오클라호마 국립대학교수인 쿠엔틴 엣킨슨의 말대로 인간이 기원 전 약 5만 년 전 어떤 획기적인 변화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된 때를 기술한 것으로




* 창시자 효과

네안데르탈인이 창조주를 인식하기 시작하고 어휘가 늘어나며 사냥이나 집단 생활에 획기적인 발전이 일어나 호모사피엔스가로 바뀌는 효과가 나타난 사건을 서양 학자들이 성경 창세기의 이름에서 영감을 얻어 창조자 효과(Creator's effect)라고 이름을 붙인 데에서 유래된 학술 용어이나 현재 저들끼리도 이 효

과가 나타난 지역이 바이칼이다(독일) 아니다(영국, 불란서) 하면서 싸우고 있음

필자의 판단에는 이 효과가 일어난 태초라는 시기는 홍수(기원전 1.4만 년~ 기원 전 8천년) 이전 약 5만 8천년 경 이라고 생각한다.

이 유전자 이동도는 서울대 의대 당뇨 전문 교수였던 이홍규박사가 1992년 미토콘드리아 분자시계에 의한 현 인류의 생성 및 이동에 대한 연구를 실시한 결과 에모리 대학의 월레스, 스탠포드 대학의

피터 언더힐 및 루카 카발리 스포르차의 자료들을 종합하고 뉴욕타임스의 스티브 듀에네즈 기자가 만든 인류의 이동도에 이박사의 추론을 더해 다시 만든 것이다,

이 이동 도에 의하면 현 인류인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의 생성은 아프리카에 있던 네안데르탈인의 한 여인(통칭: 루시)에게서 약 15만 년 전에 발원 된 것이고, 이들이 세계 각처로 이동하였다는 것이 현생 인류 이동에 대한 학자들의 최후의 과학적 종합적 결론이다. 즉, 최초에 아프리카 기원의 미토콘드리아 이브 염색체를 가진 네안데르탈인의 주류가 태양이 비치는 곳에 먹을 열매가 많은 점을 알고 아프리카 대륙에서 동진을 시도했으나 태평양에 막혀 못 가고 결국 아프리카 동해안을 따라 북진을 했고 적도를 지나 결국



홍해를 건너 아시아 대륙을 따라 동북 진을 계속하다가 남으로는 히말(흰말)라야 산맥에 북으로는 위도로 인한 추위에 막혀 "C" 및 "D" 지역인 천산, 알타이, 바이칼호 일대에서 멈추게 된 것을 나타낸다. 이 이동도의 완성으로 지금까지 서구인들이 주장해온 인류학, 인종학, 문화 인류학, 민족의 기원 등 제반 학문이 그 기반부터 흔들리게 되었으나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지금도 서양 사람들을 최고로 진화된 인간이라는 의미인 슬기 슬기인간(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 이동도가 한국 민족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최초의 호모사피엔스이며 현생 인류의 시원 민족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국 인의 외모, 체형, 성품, 지능, 정서, 언어 등 모든 특징에서 세계의 인류의 현대적 특성이 갈라져 나갔다는 것이다.

10. 아리랑과 관련된 현실 이해

가. 개요

이 부분은 우리 민족사 6만 년 아리랑 역사를 통해 살펴보는 현대이므로 고작 100여 년을 사는 현대인에게 별 의미가 없을 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은 알아야 과거의 우리자신을 알고 현재의 우리 자신을 알아야 미래를 알 수 있으므로 자손들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 민족에 대해 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변하지 않는 결코 변할 수 없는 민족성이다. 이 민족성은 수십 억 년 지구와 함께 호흡한 것이므로 문명시대 겨우 6천 여 년 간 활개를 쳐온 과학이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이해할 수도 없다. 흔히 우



리가 중국 문명 2천 여 년을 극복했다느니, 일제 36년을 이겨냈다느니 하는 주장은 이러한 장구한 세월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인간 문명이 아무리 애를 써도 네 키를 한자도 늘릴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변하지 않는 민족성, 이 민족성을 전제로 21세기이후 우리 민족이 인류에게 베풀어야 하는 일이 아리랑이 현대에 해야 할 일이다. 우선 현대적 의미에서 아리랑의 내용을 좀 더 상세히 다시 한번 상기해 보자.

나. 아리랑의 내용

아리랑은 "알"이라명사에 "이랑"(영어 with)이라는 조사(助辭)가 붙여져서 된 말이다.

이라는 말은 뜻은 우리가 아는 물고기 알, 또는 달걀의 알로 한문의 (卵)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우주가 하나의 알이라는 개념으로 인간도 이 알의 일부분이라는 의미이다.

* 그래서 서양학자들이 북방에서는 천생설화가 생겨나고 남방에서는 난생설화가 생겨났다는 학설을 주장하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이 알이라는 용어는 문명과 관계가 없다. 문명(文明)의 의미가 농경 사회가 커지고 문자가 발전해서 인간끼리의 정보교류가 많아진데서 온 살기 좋은 상태라고 말한다면 인류에게 문명시대는 홍수(기원전 만4천년~기원전 8천년) 이후 4천 년이 지난 다음 기원전 4천년 경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가장 먼저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알이라는 말은 그 보다 10배가 넘는 이전인 기원전 6만9천



년 전이거나 (원동중 저 환단 고기 삼성기 전 하권) 기원전 5만 년 전(쿠엔틴 엣킨슨 창시자 효과)에에 생겨난 말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아리랑 정신은 문명과 관계가 없다. 즉, 중국의 한문이나 영어나, 서양의 모든 학문(인문과학, 사회 과학, 문학, 예술, 심리학, 진화론)이나 이성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가 배운 하교 교육과도 관계가 없다. 짧은 경험으로 풀려고 해도 안 된다. 다만 삶의 고난이 올 때 아리랑을 함께 부르면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나고 위로가 되는 말이고 조상들이 물려준 음성 청음체계를 감동적으로 자극하는 현상이라고 생리적으로, 자연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아리랑은 우주를 포함한 자연과 내가 하나의 생명으로 시공간 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는데 따라서 그 중 나가 상하면 나머지도 상하며 하나가 성하면 나머지도 성한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우주와 자연에서 만물의 영장이며 그래서 우주가 있는 한 인간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며 죽어서도 어디엔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아리랑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자연을 사랑하여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것과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자연 사랑 정신은 유대인들의 창세기에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는 것부터, 돌로 집을 짓지 안고 무덤도 나무로 만드는 등 역사적으로 봐도 수 없이 많다. 한민족이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은 동방의 광대한 영토에서 지금 줄어진 국토가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의 사랑과 아리랑의 사랑의 차이는 성경에서는 "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지만 아리랑은 "자연과 인



간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숭배 대상으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아리랑은 자연의 작은 것도 아끼고 사람을 보편적으로 사랑하라는 점이 서로 다르다

다. 자연을 통해 준 아리랑

현대 한국에서 아리랑의 유산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회현상은 대체로 앞서 말한 자연 사랑과 인간 사랑의 맥락에서 구분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전제로 할 것은 인간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1만 년이 안되지만 언어가 시작된 것은 6만 년이 넘으므로 한국에서는 언어 유산이 절대적이다. 즉 사람이 자연과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유래된 전통이 절대적이다. 이 부분을 구분하면 천문지리 관찰, 기상관찰, 시간과 절기 관찰, 계절과 시간에 따른 자연과 인간의 변화 관찰 등 환경에 대한 관찰과 여기에 따른 인간 자신의 변화에 대한 느낌이 그것이다. 조상들은 주변의 변화를 율려(律呂: 주기적의로 인간과 함께 하는 자연의 변화)라고 불렀다. 이 율려에 의해 인간의 생사화복이 결정된다는 생각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아리랑의 전통의 대부분이다.

따라서 아리랑의 현대적 유산은 거의 대부분이 자연과 생리적인 분야이고 그 실예는 1) 언어 2) 생리적 고통 대처법 3) 시간 극복 4) 습속(기복. 액막이, 관. 혼, 상, 제)등에 모두 반영되어 있어 이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고 인공적인 분야 즉, 우리가 현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과학의 영역도 아리랑의 입장에서 재평가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아무리 옷을 바꿔 입거나 화장을 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중에 가장 큰 부분은 6만 여 년에 걸쳐 만들어진



언어이다.

지금부터 69.095년 전에 생긴 이라는 말을 포함하여 중국과 이조가 힘과 권력, 학문으로 2천 년 동안 없애려고 한 한국어 51만 개 어휘 중 아직 살아남아 있는 어휘 수가 29만 개개가 있다. 이 어휘가 대부분 한국인의 심성, 양심, 사고방식, 가치관, 정서, 취향을 좌우하며 특히 노래와 속담으로 많이 남아 있다. 수 만년간 자연에 적응하면서 생긴 자연에 대한 일체감이나. 평화 애호 정신이 어떻게 수 천 년 전에 생긴 인간의 힘과 번식 그리고 이기적인 논리가 이길 수 있겠는가? 방긋방긋, 살랑살랑, 어슴프레 등 자연을 표현한 언어를 한문이나 영어로 번역해 보라. 되나 안되나. 언어가 완전 동화되지 않으면 그 민족은 죽지 않는다. 우리가 아시아 12연방과 동방 삼한 땅을 빼앗기고 좁은 국토에서 살게되었으나 자연 사랑과 평화애호 정신은 없어지지 않았다. 한국민족의 특징은 다른 민족처럼 홍수 이후에 약 8천 여 년 동안에 생긴 것이 아니고 그 이전 약 6만 여 년 동안에 생긴 것으로 인본 문명이 아무리 억압을 해도 없앨 수 없었던 특징이다. 6만9천 년 전부터 만4천 년 전까지 최초의 바이칼 호모사피엔스에게 생긴 가장 중요하고 큰 특징은 우리가 심성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마음의 기준인데 자연에 순응하는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다. 현대의 표현으로는 이를 양심이라고 한다. 이 양심이야 말로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생명체로 연결되어 있어 인간이 자연(인간 세계 포함)에서 살아가려면 자연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자연에 대한 인간 행동의 기준으로 우리조상들은 이를 조화라고 불렀다. 이 양심은 6만 년 간 인류의 삶의 방식으로 전 세계에 전파되



었으며 조상들은 이 세계를 알의 세계 즉, 아리랑이라고 불렀고 이 알이 바로 현재의 창조자 하나님을 의미했다. 그래서 아리안족과 페

르시아가 간 곳에는 알이라는 단어가 붙은 지역 이름이 수없이 많으며 아리안(현재의 이란)이라는 종족의 이름을 비롯하여 알알해, 알레포, 아라비아, 아랍, 아제르바이잔, 알아랏, 알프스(알을 벗어난 지역) 등 수없이 많다. 이 지역은 소위 양심을 가진 인간의 땅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원조는 우리 한국이다. 그래서 우리가 제사권을 가진 제사장 국가이다.

* 우리 한국민족이 6만 년 간 홍수 이전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

한국인은 바이칼 창시자 효과 이후 홍수시기에 유일하게 홍수를 피하여 산맥을 통해 남하한 진한(나중에 신라)인들과 바이칼에서 요하를 거쳐 남하한 마한인들과 반도에서 결합한 민족이다. 진한인들은 바이칼 산지 일대에서 고비사막, 타림분지, 신강성, 청해성, 운남성을 거쳐 양자강 상류에서 하류 즉 상하이 일대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왔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고거 홍수이전 제사장 전통을 가장 만이 가지고 있으며 언어, 체질, 가치관 등 모든 면에서 산과 관련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최초의 호모사피엔스 즉 시원 민족의 특징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이 특징은 이렇게 인간의 자연에 대한 행동 기준인 양심을 비롯해서 현재까지 한국인의 사물에 대한 인식, 사고체계, 가치관, 정서, 취향, 도덕적 관념 등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특징이 바로 그 수많은 외침, 특히 중국의 침략에서 살아 남고 전통을 유지한 힘이다. 이 언어의 전통에서 유래된 한국민족성의 특징을 살펴보자.

라. 한국 민족의 민족성



문명이전 수 만년간 자연에 적응하면서 형성된 한국인의 민족성은 문명과 서로 상충되며 문명이 자손의 번식을 목적으로 이기적인 개인주의와 편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자연은 조화하고 희생하며 서로 돕는 반대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인의 민족성은 중국이나 서구 문명사회의 민족성과는 전혀 다르다. 이들을 양심, 자연 사랑, 가족주의, 평화정신, 인내 등 항목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양심

이 양심은 자연이 인간 진화 속도에 맞추어 20억 년 이상 발전시켜온 자연에 적응하는 행동 기준으로 바이칼에서 6만9천 년 경에 시작된 창시자 효과를 경험한 아리안을 포함한 모든 호모사피엔스에게 생태적으로 주어져 있으나 문명이 발전하면서 자연의 창시자를 무시하고 인간이 창시자가 될 수 있다는 교만으로 갉아 먹어왔다. 인간 사회는 이 양심을 요령, 실익, 유익이라는 인간에게 도움이 가치로 대체하면서 양심을 좀먹어 왔다. 예수는 이 양심에 대해서 별 언급이 없었으나 양심을 이용한 기록 간음 중에 잡혀온 여자의 예화로 요한복음 8장9절에 나와 있고 사도 바울은 모르면 양심에게 물어보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한 기록이 있다. (롬 2:14-15)

* 요 8: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 롬 2: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2) 자연사랑

한국인의 자연 사랑이라는 민족성은 인간 사랑이라는 표현과 서로 대조되는 말이다.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 사회 즉 문명사회를 전제로 한 표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해가 되면 자연도 훼손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이 자연 사랑이란 표현에는 인간도 자연의 중요한 일부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에는 인간 사랑이 최고 가치이지만 자연 사랑에는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생명이므로 해치면 안 된다는 더 중요한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들이 번식하고 편익을 위해서 만든 소위 문명이라는 개념은 이 자연 사랑과 서로 상치된다. 서양에서는 어둡고 추운 곳이므로 인간 사랑과 번식, 편익 위주로 과학과 음악, 예술이 발전해 왔지만 동양에서는 문명이 있어온 이후 이 두 가지 가치가 항상 서로 양립하면서 갈등해 왔다. 인다스 간지

스강 문명과 황하 문명 지역이 좋은 예이다, 인도에서는 브라만이라는 인본주의 계급 종교가 번성했음에도 자연 사랑은 불교와 힌두교 밀교가 자연 사랑을 계속했으며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를 비롯하여 하, 은, 주, 수, 당, 원, 명, 청에 이르기까지 도교가 그 맥을 이어왔으며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북방의 몽골지역에서는 인본주의가 아예 발을 붙이지도 못했다. 이 자연주의 자연사랑 정신의 원조인 한국 민족에게는 아리안 민족이나. 중국 번한 인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자연 사랑에서 파생된 자연스러운 특징들이 지금까지도 나타나고 있는데 모계우선, 가족주의, 자연과의 일체감, 평화주의, 자연 신(천지신명, 삼신 할매) 숭배, 인내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자연과의 일체감은 한국인(동양인 전체)에게 서양이나 문명지역 민족과 다르게 아주 중요한 여러 가지 전통을 남겨주었다. 첫째는 생식이고 둘째는 농사를 짓지 않고 셋째는 돌 깨는 것을 자연을 해치는 것이라고 하여 피하고 무덤이나 집을 모두 나무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 사랑 관념은 나아가 자연이 잘되어야 내가 잘되고 자연을 섬겨야 나도 섬김을 받는다는 소위 자연 숭배 사상으로 발전했는데 현재 한국에서 서구학문을 배운 사람들에 의해 소위 미신이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풍속들이 여기에 속하며 사주팔자, 관상, 풍수지리, 택일, 손금, 점, 궁합, 부적, 주문, 기문 둔갑, 변신, 축지 등이 여기에 속한다.

3) 가족주의

서양에 사회가 있다면 한국에는 가족이 있다. 서양의 가족은 부부와 아이들을 말하나 한국의 가족은 대가족을 말한다. 가족과 사회는 인간이 증가하여 집단화 될 때 생기는 군집의 기본단위인데 서양과 한국은 그 시작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서양은 어둡고 추워 식량이 부족하여 살기가 바빠 암컷을 만나 짝을 짓는 것이 급선무인 환경이었고 한국(바이칼과 그 주변지역)지역은 대가족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이 풍부한 환경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판단된다. 서방은 인간의 힘으로 인위적으로 식량을 확보해야만 했고(예; 목축) 동방은 밝아 채소, 곡식, 열매가 무성하여 수렵과 체



취로 급식이 충분하였다. 그래서 서양은 식량 확보 방법에서부터 인본 사상이 전통이 되었고 동방에서는 자연사상이 전통이 되었다. 이 인본 사상은 4대강 문명에서 시작하여 그리스 문명 을 통해 이후 서구에 전파되어 도시를 만들고 시민사회가 형성되자 소위 민주주의라고 하는 절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인간 본위의 가치관을 만들었다. 이 인간본위의 가치관은 현재 시민 민주주의라고 하는 우상이 되어 탐욕과 거짓이 범람하게 되고 이는 자연을 해치고 양심을 거역하는 등 2015년 현재 한국 정치의 현실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렇게 한국이 가족주의는 6만년 이상 계승되어온 삶의 방식으로 겨우 2-3천 년 전에 생긴 보잘것없는 인본주의 시민

사상이 바꿀 수 없다.

4) 평화 정신

한국인의 평화 정신은 전쟁을 피하는 정신으로 전쟁정신과 서로 대조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국인이 평화정신을 지향해 왔다면 세계 4대 문명지역을 비롯하여 서구 등 여타 거의 모든 문명국가들은 모두 전쟁을 통해 발전해온 민족들이다. 이들이 전쟁을 하게된 근본적인 원인은 인구에 비해 식량이 적기 때문이었다. 농사를 짓기시작한 이후부터는 식구는 불어나는세 농토가 없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의 성경도 예외가 아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창세기 1:24-31)이 성경의 목표다. 땅에 충만한 다음 땅을 衰아 먹고 황폐시켜 지구를 멸망시키라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민족은 "자연에 조화하라"이다. 있는 만큼 먹고 자연이 주는 것으로 살라는 것으로 우리민족에게는 전쟁이 필요 없다. 그래서 한국민족은 평화 애호 정신을 가지고 있



다.

5) 한

한국인들의 한(恨)은 한문의 상형이 의미하는 데로 양심이 오랜 기간 문명과 인본주의에 의해 억눌리고 배반을 당했을 때 생기는 심성이고 정서이다.

5) 은근과 끈기

한국인의 은근과 끈기는 은근의 경우 직접 말과 행동으로 반응하

지 않고 이쪽의 뜻만 전하려 하거나 이쪽의 의도를 강요하지 않고 알리기만 한다는 의미

를 가지고 있고 끈기는 인내하는 것을 말한다. 둘 다 인간의 홀몬 분비나 두뇌작용에 따라 조급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문명 민족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한국인의 이러한 특징은 자연과 인간의 생리적인 변화를 수요하는 태도에서 온 것이다. 봄이 가야 여름이 오고 사람은 탄생하고 늙고 병들고 qwnr는 생리적인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는다. 인간이 만든 종교를 아무리 믿어도 그 창시자조차 이러한 생리에서 한 사람도 벗어나지 못했다. 은근과 끈기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한국인에게 생리적으로 생겨진 것이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마. 문명 비판

1) 인간과 자연

성경에서는 현대 인간창조를 하나님이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이루었다고 말하고 있고 서양학자들은 수 만 년 전 프랑스의 크로마뇽 동굴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면서 그 경위는 밝힌바 없으나 필자는 약7



백 만 년 전 유원인에서 진화하여 오스틀라피테쿠스 호모하빌리스 호모엘렉투스 호모사피엔스 네안데르탈인을 거쳐 지금까지 진화되어왔다고 본다. 즉 50억 년 지구의 나이 중 20억 년 전에 나타난 파충류에서 진화한 존재 즉 자연에서 진화한 존재로 본다. 그리고 이

러한 생각이 우리 조상들의 인간 창조에 대한 생각 즉 사람은 우주와 자연이라는 큰 알에서 나왔다는 아리랑 적 생각이 가장 합리적인 생각이고 그래서 여기서 연유된 인간으로써의 특징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서양학자들은 인간의 특징인 공포와 욕망. 종교, 사랑, 교육시스템 그리고 이제 막 세상과 마주한 갓난아이의 환한 웃음과 자지러지는 울음 등 모두가 인류가 만들어 낸 문화적 성취 물에서부터 온 것이라고 하고 영국 생물학자 찰스 다윈이 꼽은 '공포, 슬픔, 놀람, 행복'분노, 등 5가지 감정에 혐오,'경멸, 수치, 당황, 질투' 등 6 가지 감정을 더 해 인간에게는 모두 10가지의 감정이 공통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또 개인의 욕망은 어디까지나 사회가 개인에게 주입하는 것인데 개인이 드러내는 지적 욕구, 문화적 취향, 정서적 요청 등은 사회가 처방한다"고 함으로서 문명이 나오기 전 자연에서 진화한 인간성을 무시하고 있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 인간다움에 영향을 미치는 인간과 타 영장류와 다른 점은 뇌가 크고 군집생활을 좀 더 일찍 시작했다는 점이다. 전술한 인간의 인간다움의 대부분은 문명시대에 만들어졌다 기보다 바이칼 창시자 효과 이후 5-6만 년 동안 자연과 타인간에 대한 반응으로 인간에게 생겨난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면 자연의 천재지변과 맹수의 위협 때문에 공포가 생겨났고 생전 처음 경험하는 자연과 가족이 겪는



큰 자극 때문에 놀람이 생겨났으며, 여타 동물에서 보듯이 가족을

잃은 고통으로 슬픔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고 의식주 문제해결과 가족이 주는 기쁨으로 행복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분노, 경멸, 당황, 수치, 경멸 등의 감정은 다윈의 주장대로 문명이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양인들과 현대과학은 창시자 효과로 인해 원조 호모사피엔스인 한국 민족에게서 나타나는 양심과 인정 그리고 한 등 훨씬 중요한 인간다움의 요소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서양에서 온 철학, 인문학, 과학 등 모든 현대적인 인간성을 분야별로 비판한다.

첫째 서양식의 가치관은 논리와 증거가 있어야 하나 논리는 자연이 만든 임遁간 샐리 범위 안에 있고 증거도 인간적 사고 체계 속에 있는 것이므로 자연에 비하면 제한적이다 , 반면에 이 서양식 논리와 증거가 모두 힘(크기와 권력)을 전제로 하는데 힘은 주로 사람과 자원의 숫자. 규모에 의존하는 것이고 권력도 인간 사회가 전재된 상태에서 힘을 의미히므로 자연에 비하면 제한적이다. 둘째 사고 체계에 있어서는 서양식 가치관에는 시민 민주주의나 시장 경제(자본주의) 모두에 기준이 되어야 할 양심이 없다. 이 양심은 수 백 만 년 동안 인간이 자연에 적응하면서 생긴 말과 행동의 기준으로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바로 미터가 되어왔으며 여기에서 비록 지역 간 다소 차이가 있으나 공통적으로 인간의 정서서 비판 취향, 삶의 방식, 삶의 목표가 설정되어왔다. 서양사람들의 인간다움인 과

학과 논리는 지구의 표준지역인 온대지방보다 위도가 20-40도 높아 어둡고 해가 들지 않아 먹을 것이 부족한 유럽 사람들의 특징(백인



들이 발전시킨 음악도 어둠으로 인한 청각의 발달에 기인된 것)을 나타내는 것뿐이다.

2) 시민 민주주의 비판

현재 한국인들이 우상처럼 받들고 있는 시민민주주의는 시민 집단이 전제가 되고 인구의 번영, 즉 시민 집단의 규모 증가를 기정사실로 하고 있어 번영할수록 소수도 증가한다 이는 자연의 존재를 무시한 한계가 있는 가설 아래에서 이간 만을 위해 설정되고 발전된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문명이 없는 상태에서 자연에 순응하는 최적화된 인간이 지구 환경에 살게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민주주의 자체가 필요 없다. 그래서 한국민족의 조상들은 조화의 세상을 꿈꾸었다. 투표를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민 민주주의는 양심이 전제되지 않으면 선의의 독재보다 못하다.

3) 자본주의 비판

자본주의는 자본과 이익, 그리고 인간집단이 필수 요소이다. 목표는 이익을 남기고 체제가 클수록 돈을 많이 버니까 좋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돈으로 유지된다. 원래 이 돈은 한국인 조상들이 넓은 지역에 퍼져 사는 인간들에 산물의 혜택을 고루고루 주고자 교환수단으로 만든 것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죄는 교환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벗어나 이익을 남기거나 축재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원래 고조선 때에 조상들이 맨 먼저 돈을 만들었는데 전국에서 반드시 같은 가격으로 팔도록 했다. 만약 파는 사람이 손해를 보게되면 나라에서 이 손해를 보전해주었다. 이 원칙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교환 수단으로서 사용되는 것 이외의 돈을 사용하는 것, 즉, 돈놀이



(금융, 사채)는 모두 죄다. 국제금융자본을 운영하고 있는 유대인들이나 강대국도 모두 창조주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죄를 짓고 있다. 이들은 도시를 만들고 인류의 숫자를 폭발시켜 지구가 망해 가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4) 공산(사회)주의 비판

북한의 공산주의는 그 근본이 사회주의이고 이 사회주의는 서양의 개인주의에서 유래된 것으로 우리의 7만년 가족주의와는 맞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주의가 생긴 것은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창시자 효과 이후로 따져도 1/70 도 안 되는 기간에 생긴 속성 수단인데 그것도 언어시대의 1/10도 안 되는 문명 시대의 산물이라니... 북한의 사회주의가 체제보다 본원적인 두목체제가 더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방의 민족주의가 유대인이 만든 이데올로기보다 우선함은 2차 대전 이후 줄 곳 증명되어왔다. 그래서 북한은 곧 망하고 남한의 민족주의에 흡수된다. 그리고 북한 핵을 절대로 동족에게 쓸 수 없다.











11. 하나님! 우리 한민족의 하나님

이 장에서는 지금까지의 인류의 삶을 알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우리가 믿어야할 하나님과 알의 관점에서 우리가 이해해야할 전통에 대해 정리한다

지금까지라 함은 서양의 연대로 말하면 예수 이후 2015년, 한국의 연대로 말하면 69.095년이다 주로 기독교가 보편화된 한국에서의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믿어야 할지를 판단하면서 이 기독교문명이 전해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인권 등 가치를 포함해서 재조명해보는 것이다.

가. 인류의 삶 비판

1) 우선 인류의 AD또는 BC라고 하는 기원 자체를 비판한다. 예수 탄생시기인 AD 원년은 서양의 게르만족에게나 창조주가 인식되기 시작한 년도이지 한국인에게는 아니다.

한국인에게 창조주가 인식된 때는 한국의 건국 시기인 69.095년 전이다.

2) 그 다음 현대 인류가 소위 문명 시대라고 하는 시대 자체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비판한다. 수메르 문명이 고작 7천년 전인데 언어의 문명은 거의 7만년으로써 그 10배에 해당한다.

그 기간 중 이루어진 업적도 문명의 업적은 인간의 의식주와 편익을 달성하고 자연의 위협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데 그쳤지만 7만년 언어의 역할은 체계적으로 가족을 만들고 자손을 낳으며 인간대 인간, 인간대 자연과의 관계를 설정하면서 소위 인간다움을 만든 역할을 하였다.



문명시대의 모든 유산은 언어시대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3) 셋째는 아리랑을 취급하는 한국인의 태도를 비판한다.

아리랑은 자연보호이다. 인간이 소위 축복을 받아 자식을 늘리고 돈을 많이 벌어 인구가 수백 억이 되어 지구가 황폐해져 온실가스나, 온난화 엘리뇨 현상, 지진, 화산폭발, 해일로 파괴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소위 인간 이기심 인정과 인간 보호와는 반대되는 말이다. "한번 잘 살아보기나 하자"라고 변명을 할지 모르지만 인간의 세상살이는 반드시 자연의 법칙, 생리적 법칙을 따른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 "그저 잘먹고, 잘살고, 펀히, 즐겁게, 건강하게 살다가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최선이다. 아리랑이 문명(수리)보다 낫다. 알과 함께 고개를 넘어가자.

4) 넷째는 종교를 비판한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은 수 만년에 걸쳐 인간에게 생성된 생리적인 현상인데 현대인들은 이를 문명이후에 나타난 인간이 만든 존재보다 못하거나 부정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어느 종교나 어느 문명인류를 막론하고 급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고 있는 존재들이 한국인들이다. 불교는 세상을 속세라고 죄악시하면서 자신들은 본성을 억제하고 분리되어 산다. 그러면서도 인간 석가모니를 하나님인양 섬긴다.

기독교는 고대의 우리 하나님과 가장 가깝다. 60여 년 전에 기독교가 한반도에들어온 것은 인류에게 최고의 축복이다. 창조주를 최초로 인식한 시원 민족의 제사장 집단과 어둠에서 허덕이던 민족으로써 예수를 통해 구원받은 서양민족이 서로 만났기 때문이다.



5) 성경을 비판한다

성경의 구약은 유대인 중 레위 지파가 쓴 유대교 경전이고 신약은 유대계 기독교 신자들이 예수 이후에 쓴 책이다. 모두 이스라엘 민족이 저자의 주축이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민족은 성경대로 살았는데도 그 결과가 좋지 않다. 그 내용은 1) 민족의 흩어짐, 2) 수전노, 3) 프리메이슨 양산이라는 죄악을 남기고 있고 서양인에게는 학살의 합법화 인류에게는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만의 번영이라는 씻지 못할 죄악을 만들었다. 셩경의 오류는 1) 이스라엘인들이 여호와는 아람 왕국 시절에 중동에 있던 온갖 잡신의 총칭이었고 장사 신이어서 2) 그 추구하는 이상이 돈을 만이 벌고 자손이 번성하는 것이었다. 3) 창조설화에서 아담이 먼저 만들어졌다는 것은 남녀 평등에 어긋나고, 4) 함이 야벳의 종이 된다(창9:25-26)는 등이다. 반면에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 "그저 잘먹고, 잘살고, 펀히, 즐겁게, 건강하게 살다가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최선이다. 아리랑이 문명(수리)보다 낫다. 알과 함께 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6) 넷째는 기타 종교를 비판한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은 수 만년에 걸쳐 인간에게 생성된 생리적인 현상인데 현대인들은 이를 문명이후에 나타난 인간이 만든 존재보다 못하거나 부정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어느 종교나 어느 문명인류를 막론하고 급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고 있는 존재들이 한국인들이다. 불교는 세상을 속세라고 죄악시하면서 자신들은 분리되어 산다. 세상살이는 반드시 자연의 법칙, 생리적 법칙을 따



른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 "그저 잘먹고, 잘살고, 펀히, 즐겁게, 건강하게 살다가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최선이다. 아리랑이 문명(수리)보다 낫다. 알과 함께 고개를 넘어가자.

4) 넷째는 종교를 비판한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은 수 만년에 걸쳐 인간에게 생성된 생리적인 현상인데 현대인들은 이를 문명이후에 나타난 인간이 만든 존재보다 못하거나 부정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어느 종교나 어느 문명인류를 막론하고 급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고 있는 존재들이 한국인들이다. 불교는 세상을 속세라고 죄악시하면서 자신들은 고대의 알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비극이 계속되고 있다. 야곱은 일찍이 레위가 만든 종교가 이스라엘을 흩어지게 하고 세상을 자본주의화 프리메이슨화 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 창세기 49장 5절-7절

5 .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구약의 가장 큰 오류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인간 본성 속에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자신들이 민족적 이익을 위해 한 것은 모두 옳다는 것이다 그래서 팔레스틴



(당시 블레셋)인의 땅인 가나안에 무조건 침입해서 그곳 토착민들을 모두 죽이고 그 땅의 주인 노릇을 하게되었는데 유대교의 이 전통은 나중에 개신교도에게도 이 되었는데 중세의 왕권 신수설을 비롯하여 흑인을 노예로 삼고 그 많은 식민지를 만든 단초를 제공했다. 미국의 엥글로섹슨 족들은 청교도랍시고 신대륙에 갔으나 그곳 인디언 8천7백만명을 학살하고 구약의 말씀대로 흑인들을 노예로 삼았다가 지금까지 곤욕을 치르고 있으나 한국목사들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다고 주장을 한다. 꾸란은 여기에 비하면 양반이다.

신약은 예수를 빼고 전부 레위가 자신들과 유대민족의 이익을 위해 조작한 것이다. 마리아의 부모도 돈 많은 레위 인이고 공관복음의 저자도 모두 레위 인이다.

가장 크게 조작한 부분은 동정녀와 부활이다. 예수는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 했으나 신약은 유대인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을 전파했다. 가장 크게 조작한 부분은 동정녀 마리아와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의

아버지는 에디오피아 출신 로마 용병으로써 마리아의 아버지이며 안나스 이전에 대제사장을 한 요아킴(레위인) 대제사장 집 의 성전 문지기로 파견 근무를 하던 군인이었다. 그때 15세 된 대제사장과 그의 부인 안나(레위인)의 딸인 마리아와 정분이 나서 예수가 태어났고 그래서 예수는 에디오피아인과 레위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그래서 돈으로 요셉에게 시집을 보내었다. 예수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다르며 구스인 모습을 닮았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사람이 왜 구스 인 시몬인지 상상을 해 보



라. 이것이 예수 부활의 비밀이고 돈 많고 타락한 유대교(레위)와 로마가 성모와 교황을 나누어 가지게된 음모의 진실이다. 지금도 성모는 승천했으며 교황은 이태리인 만 한다.

7) 서양 문명을 비판한다

그래서 기독교 문명 중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은 돈과 숫자이다. 돈은 돈만 있는 유대인이 만든 자본주의이기 때문이고 숫자는 가족개념이 없는 유럽의 식인종들의 합이 방식으로 가장 타당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이 두 이데올로기가 동방을 망치고 있다. 최근 한국도 사람 나고 돈 난 것이 아니고 돈 나고 사람이 난 현실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를 한다는 사람 치고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믿으면 된다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서양인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나. 우리가 믿어야할 하나님

1) 개요

우리 한국 민족에게 우리의 창조주(조물주)하나님은 문자가 주는 정보로 믿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문자는 6-7천년 전에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는 도구로 그 이전의 여러 정보를 통해 창조주를 파악하려고 해왔으나 네발 달린 동물은 4.3 억 년 전에 지구상에 나타났고 인류는 3-4 백만 년 전에 나타났으며 네안데르탈인은 10만 년 전에 나타나 인간 스스로가 지구상에서 진화한 생명체의 한 종류인 동물이라는 한계가 있어 지구의 나이 30억 년 우주의 나이 50



억 년을 고려해보면 창조주를 따지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마치 책상이 주인이나 만든 사람에게 내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이 이해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7천년 역사를 가진 문자에서 찾는 것=보다 7만년 역사를 가진 언어와 과학적인 근거(유적)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다행이 한국민족이 처음으로 말을 많이 만들고 창조주를 인식한 최초의 민족이기 때문에 연구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2) 창조주가 성경 창세기에 최초로 나타난 이유

우리 민족의 하나님을 현대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면 지금부터 6만9

천년 전에 우리 민족에게 맨 먼저 인식된 창조주 하나님(실제는 한알 = 큰 또는 멘 처음의 하나뿐인 알님 즉 한알님=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하고 왜, 어떻게 2천년 전에 성경의 창세기를 통해 서양에 알려졌는지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다.

그 다음에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성경의 구약은 유대교의 제사장 집단인 레위인들이 쓴 것이고 신약도 바울의 책 외에는 거의 래위인들이 쓴 것인데 예수의 하나님은 유대교의 하나님을 이어받은 것이므로 동방 한국인의 창조주 하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과 레위의 유대교를 통해 예수에게 전해 졌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고 또 또 유대교와 기독교 하나님의 차이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한국민족의 하나님은 삼신일체, 천지인이 하나인 자연의 하나님으로 나와 우주, 자연이 모두 하나의 생명체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인데 이 인식은 사람이 자연에서 나왔다는 생리적 인식으로 예수의 내가 오늘 그를 낳았다.(히브리서 1:15)는 생각과는 일치하지만




유대교의 제사집단이 쓴 창세기에서 "흙으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다"(창세기 1장, 2장)는 피조물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즉 유대인들은 만들어진 사람들이고 한국민족은 낳아진 사람들인 것이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하나님과 한국민족의 하나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중동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전해졌을까? 아브라함은 아람인이었다. 아람인은 아람왕국 사람이고 예전의 이름은 에볼라였고 지금 시리아 해안의 알레포 남쪽에 있는 에벨을 건국왕으로 하는 도시국가였는데 에밸은 "에벨의 아들은 벨렉이었는데 그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라" (창세기 10장25절, 에벨은 노아의 6대손)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홍수 이후, 바벨탑 사건 이후 수메르에서 갈라져 나간 부족임을 시사하고 있다. 에볼라는 동서 교역로에 위치하고 있던 도시 국가로 주민 대다수가 장사를 했고 언어는 당시 동서양 공용 무역 언어인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살던 이 에볼라에는 여러 신들이 있었는데 여호와라는 명칭은 그들 모두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아브라함은 다신의 이름을 창조주로 여기어 개인 신으로 삼은 것이었다.

아브라함에게 창조주라는 개념이 전해진 경위는 알의 언어가 전파된 곳을 제사 관할지역으로 한 한인의 나라 12 연방 중에 수밀이가 있어 페르시아를 통해 유프라데스로 다시 유프라데스에서 에볼라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럽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3만 5천년 전 쇼배 동굴, 알타미라 동굴, 크로마뇽 동굴 벽화에 모두 식인 그림이 그려져 있다. 또 이지역 모두 한국의 단일 언어시절에 붙여진 지명으로 보이는 알프스



산맥이 있는데 알을 벗어난 지역 시 되면서 기원전 2만 년 전 빗살 무늬 토기의 분포지역에도 유럽이 빠져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이 지역은 한반도나 바이칼 지역보다 위도가 10-20도가 높고 밀란코비치의 지구세차운동법칙에 따라 북극이 2만6천 년 마다 22-25도 유럽방향으로도 옮겨져 더 어두웠다고 추정할 수 있으므로 생존 환경이 동방에 비하여 훨씬 열악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원전 2-3천 년 경 이곳에 최초로 나타난 그리스 문명이 남자들의 힘으로 바다를 극복해야 살 수 있는 인본주의 문명이었고 뒤이은 로마 문명도 이에 뒤지지 않는 레기온과 군사력에 의존하는 계급과 착취의 문명이었으니 당시 유럽을 포함한 중동의 상황은 창조주 하나님이 간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 기독교의 하나님 우리 민족의 하나님 비교

1).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은 창세기의 하나님과 유대민족의 하나님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이 서로 다르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하나님과 같은 창조주, 또는 조물주 하나님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삭, 야곱의 하나님과 같이 자신의 축복을 바라는 개인의 하나님이다. 이 중 창조주 하나님 개념은 우리 한국에서 6만 여 년 전에 생겨 수메르를 거쳐 아람인들에게 전달된 것이나 창세기에서의 표현은 에덴, 인간창조에서 남녀 관계, 카인과 아벨 및 살인, 원죄. 인간의 집단화와 사악함, 노아의 홍수 등에서 아래와 같이 우리 문헌인 환단 고기나, 부도지 보다 부정확하거나 논리적, 과학적이지 못하다.




*창세기의 오류

동방에 에덴을 창설하시고"(창 2:8): 동방에 바이칼 호수 가에 에덴을 지으시고

깊이 잠들게 하시고...갈비뼈를 뽑아 ..하와를 만드시니("창2:21-23): 여자와 남자를 만드시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 하지 않으셨더라(창4:3-4): 가인의 제사는 자연을 훼손한 결과임으로 열납 하지 않으셨더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2:17): 실과는 살아있는 것이므로 먹지말고 떨어진 과일만 먹어라

인간이 악함을 보시고(창 6:5-6): 속세가 악함을 보시고

창세기에서 유대인들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에볼라 도시국가에서 아람인들이 부르는 모든 잡신들을 총괄해서 부르는 이름이었다.

유대민족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레위인을 중심으로 한 유대종교로 변질되었다. 레위인의 이해에 맞으면 곧 여호와의 뜻이고 맞지 안으면 여호와께 불순종하는 것이었다. 사울왕이 레위 중심 종교국가를 반대하자 레위인인 사무엘은 친 레위 파인 다윗을 추켜세워 유대 종교국가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레위인들의 목표는 부인보다 돈을 중시하는 아브라함의 피를 이어받아 종교를 이용하여 헌금과 세금을 받아 돈을 모으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성전내탕고의 솔로몬 금방패를 사전에 빼돌려놓고 모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이 가져갔다고 뒤집어 씌웠다. 그들이 바벨론 포수 때 훔쳐낸 돈을 종잣 돈으로 삼아 2천년간 모은 돈은 현재 4.700조 달러에 이른다. 미국을 20개 살 수 있는 돈이고 세계1년 무역고 총액 40조 달러의 100배에 달한다. 대부분 세계의 부동산이나 스위스 은행에 있고 프



리메이슨의 자금줄이 되고 있다. 유대민족과 유대교의 하나님은 인본주의의 핵심요소로 돈과 권력이다.

예수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유대교의 하나님과는 완전히 다르고 오히려 창세기의 창조주 하나님 또는 한국민족의 하나님과 닮아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이름부터 여호와하고 하지말고 하나님 아버지라고 거룩하게 부르라고 가르쳤고, 그 자신이 든 모든 예화는 돈과 인본주의와는 관계없는 자연과 생리적인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오히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라고 반대했다. 예수는 창조주하나님을 전파한 것이다.

2). 예수

예수는 그때까지 흑암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6만 년 전 바이칼에서 한국인(호모사피엔스)에게 처음으로 인식된 자연의 하나님, 알의 하나님(한알님 아버지) 창조주하나님을 처음으로 소개한 한 알이 낳은 사람이 맞다. 한 알 아버지라고 이라고 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지칭한 것은 그가 홍수 이후 비를 내려 인간을 멸하기도 하고 비를 내려 농사로 인간을 살리기도 하므로 한알의 이름을 하늘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한 기원전 8천년 이후 네팔, 티벳, 인도에 전파된 하늘에 계신 한 알 아버지를 그렇게 부른 것 같다.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과 같다. 기독교 초기 서양의 God를 우리 선배(개신교 목사)들이 하느님이라고 하지 않고 한알을 의미하는 하나님이라고 번역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 예수의 기독교가 2천년이 지나 제사장의 나라인 우리나라에 돌아온 것은 인류를 위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기독교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인구대비 세계최고의 복음의 수출국가가 된 것을 두고 독일의 신학자들이 한국의 샤머니즘 때문이라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그 샤머니즘의 본질이 창조주 하나님이고 우리의 민족노래인 아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로마정권은 이 예수의 복음을 그들의 더러운 두 가지 탐욕을 섞어 더럽혔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첫째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한 가족보다 돈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이고 둘째는 인종적, 민족적 이기주의로 흑인을 노예화 한 것과 왕권 신수설이 그것이다. 서구가 일으킨 전쟁은 다윗처럼 모두 하나님의 뜻이었다. 셋째는 예수 자체를 조작한 레위 인과 로마정권(콘스탄틴)이다. 그들은 마리아를 미혼모에서 동정녀로 바꾸고 돈으로 예수 십자가 죽음을 구스인 시몬에게 대신케 했으며 부활을 조작했다. 이러한 조작과 구약이 제외된 신약의 모든 부분은 진리이다. 14세 때부터 29세 때까지의 행적은 보병궁 복음서가 맞다. 그는 인도의 어느 부자를 따라가 그곳에서 아람어를 아는 불교와 힌두교 밀교의 최고스승인 맹그스테 등 인물들로부터 그때까지 유럽에 없던 창조주에 대해서 배웠고 또 사람 살리기, 변신, 축지, 둔갑, 부양, 차용, 치료,등 여러 도술을 배웠는데 힌두 밀교의 최고 권위자인 맹그스테가 예수에게 준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배운 도술을 남을 위해서만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예수의 신성은 본향에서 가르쳐진 것이었다.

3) 믿음

다음은 구체적으로 기독교(개신교)의 교리를 아리랑의 관점에서 평가해 보자



우선 믿음이다. 이 믿음이야말로 성경의 오류를 후대에 전염시킨 원흉으로 아브함이 그 시초이다. 이 믿음은 인간의 이기심을 뛰어 넘지 못하는 탐욕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생겨난 이 탐욕은 젖과 꿀이 흐른다면서 가나안이라는 남의 땅을 빼앗고 그 거민들을 죽인 역사는 성경을 믿는 모든 민족에게 그대로 유전이 되었고 서구인들의 피의 역사를 만들었다.

4) 성령

그 다음에는 성령이다. 성령은 예수의 영이다. 그가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영이다. 그러나 예수를 통해 전해진 이 영은 창조주를 수 만년동안 모르고 있었던 유럽인들에게는 유효한 것이지만 우리 한국 민족에게는 맞지 않다. 성령에 따르지 않는 유럽인들이나 유대인들및 예수 잘 믿는 목사나 장로(유병언, 이규태, 성완종)의 실패를 반복하기 보다는 양심을 따르는 것이 더 성령적이고 창조주 하나님의 영에 가깝다. 한국인들은 성령보다 양심을 지키는 것이 더 시급하고 절실하다.

5) 사랑

흔히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예수 자신도 마태복음 22장 36절-40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함으로써 인간끼리의 사랑을 중시했다. 성경속 어디에서도 자연 사랑이라는 말은 없다. 반면에 우리에게는 천지인이 하나의 생명이고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함께 살아있기를 바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자연과 향토 사랑을 강조한다. 이 부분도 기독교 교리보다 우리

의 아리랑이 옳다.




* 마태복음 22장 36-40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5) 믿음

서양사람들과 한국의 기독교계에서는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은 것을 의로 여기고 있지만 그 믿음 때문에 가나안의 원래 거민들 인 팔레스틴 인들이 지금도 가자지구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아브라함 개인의 바다의 모래와 같은 후손을 바라는 믿음과 땅에 대한 욕심이 나중에 기독교도들과 서양의 게르만 인들에게 전해져서 그 많은 식민전쟁과 1,2차 대전을 유발시켰고 지구의 각 민족들 간 이해와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6). 죄

창세기에서는 인류의 원죄를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는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하면서 사람이면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원죄로 규정하고 있으나

* 창세기2:15-17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




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박제상의 부도지에서는 자연을 해치는 것이 죄이므로 "실과보다 지유(떨어진 과일)을 먹도록 했다" 라고 함으로써 자연 훼손이 죄임을 분명히 했고

부도지 제4장

이 때에, 본음(本音)을 관섭(管攝)하는 자가 비록 여덟 사람이었으나, 향상을 수증(修證)하는 자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만물이 잠깐 사이에 태여 났다가, 잠깐 사이에 없어지며, 조절이 되지 못하였다. 마고(麻姑)가 곧, 네 천인과 네 천녀에게 명하여, 겨드랑이를 열어 출산(出産)을 하게 하니, 이에 [11]네 천인이 네 천녀와 결혼하여, 각각 [12]삼남(三男) 삼녀(三女)를 낳았다. 이가 지계(地界)에 처음 나타난 인간의 조상(人祖) 였다. 그 남녀가 서로 결혼을 하여, 몇 대(代)를 지내는 사이에, 족속(族屬)이 불어나, 각각 3000명의 사람이 되었다. 이로부터 [13]12사람의 시조는 각각 성문(城門)을 지키고, 그 나머지 자손은 향상(響象)을 나눠서 관리하고, 수증(修證)하니, 비로서 역수(曆數)가 조절되었다. 성중(城中)의 모든 사람은, 품성(稟性)이 순정(純精)하여, 능히 조화(造化)를 알고, 지유(地乳)를 마시므로, 혈기(血氣)가 맑았다. 귀에는 오금(烏金)이 있어, 천음(天音)을 모두 듣고, 길을 갈 때는, 능히 뛰고, 걷고 할 수 있으므로, 내왕(來往)이 자재(自在)하였다. 임무를 마치자, 금(金)은 변하여 먼지가 되었으나, 그 성체(性體)를 보전하여, 혼식(魂識)이 일어남을 따라, 소리를 내지 않고도 능히 말을 하고, 백체(魄體)가 때에 따라 움직여, 형상을 감추고도 능히 행동하여, 땅 기운(地氣) 중에 퍼져 살면서, 그 수명(壽命)이 한이 없었다.

是時에 管攝本音者螡雖有八人이나 未有修證響象者故로 萬物이 閃生閃滅하야 不




得調節이라. 麻姑螡乃命四天人四天女하야 ?脇生産하니 於是에 四天人이 交娶四天女하야 各生三男三女하니 是爲地界初生之人祖也라. 其男女螡又復交娶하야 數代之間에 族屬이 各增三天人이라. 自此로 十二人祖는 各守城門하고 其餘子孫은 分管響象而修證하니 曆數始得調節이라. 城中諸人이 稟性純精하야 能知造化하고 飮?地乳하야 血氣淸明이라. 耳有烏金하야 具聞天音하고 行能跳步하야 來往自在라. 任務己終則遷化金塵而保己性體하야 隨發魂識而潛能言하고 時動魂體而潛能行하야 在住於地氣之中하야 其壽無量이러라

그 후 조상들은 수만 년에 걸쳐 자연에 적응하는 조화의 과정을 거친 후 자연이 인간에게 준 행동 기준 즉, 양심을 죄의 판별기준으로 삼았는데 성경 신약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 요한복음 8:4-9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즉 한국민족의 죄는 법과 제도를 어기는 것이 아니고 양심을 어기는 것이다. 한국에서 비양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배척을 받는 것



도 이 때문이다.

7) 주기도문

예수가 직접 가르친 주기도문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우리의 하나님과 차이는 예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지만 우리는 하늘과 땅과 인간 속에 계신 한 알님, 즉 하나님 아버지이다. "이름을 거룩이 여심을 받으시오며"는 유대인들에게 이 하나님"여호와"라고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의 하늘나라는 홍수와 죽음, 고통, 싸움이 없는 이상의 나라로 보인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은 모든 인간세계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우리의 아리랑이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데 반해 예수의 기독교는 인간만을 위한 종교로 제한된다. 그 다음 절의 죄의 용서도 인간에게 적용되는 말로 신라 원광법사의 살생유택(殺生有擇)은 포함되지 않는다. 주기도문 "악에서 구해달라"는 말은 서양사람들은 악한 사람에게서 구해달라는 것이나. 우리민족은 악한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주기도문은 서양사람들에게 그 수준에 맞는 기도문이지 한국인에게 온전히 적용할 수 있는 기도문이 아니다.

8) 사도신경

레위인들과 서구 기독교인들에 의해 조작된 기독교의 진면목을 가장 명확히 해주면서 초기 기독교 조성 멤버들의 의도롤 가장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 이 사도신경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나"는 맞으나 그 이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사는 조작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고 유대



교 레위 제사장에게서 고난을 받은 것이다. 그 이후는 모두 레위와 로마 콘스탄틴 권력의 조작이다. 그래서 레위는 미혼모를 동정녀 성모로 바꾸어 동족인 예수와 함께 만세에 추앙을 받게 했으며 콘스탄틴 권력의 이태리 민족은 교황자리를 영원히 누리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

9) 주라는 호칭

기독교에서 주(主)라고 하는 호칭은 홍수이후 황하문명에서 나온 말이다. 영어로 로드(Lord)의 고대 어원은 loaf-guardian 으로 "가족을 위해 빵을 구해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중국과 다르다. 중국인들은 홍수 이전 6만년동안 조상들(한국인)의 글인 제사장 표시 왕(王: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자 위에 점을 찍어 자신들이 만든 계급제도 중 우두머리 표시 주(主)로 만들었고 중국의 영향을 받은 한반도에서도 이 글자에 주(主)라는 뜻을 붙여 사용해 왔다 중국인들은 나중에 이 글자 위에 얼굴 표시를 하나 더 붙여 황제의 황(皇)자를 만들었다. 따라서 한국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主)라는 말을 써서는 안되고 기독교인들도 힘으로 억압하고 착취한 중국 계급의 상진 글자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10). 천국과 지옥

호모사피엔스에게 지옥의 존재가 인식된 것은 지구환경에서 불과 열, 그리고 화산, 온천, 용암과 더불어 그 존재가 인식되어온 것으로 보이며 인류의 먹을 것이 모두 땅에서 나고 죽으면 땅에 묻힌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지옥이라고 명명한 것 같다. 따라서 지옥은 그 기원이 7만년에 달하며 유교, 힌두교, 불교, 유대교 등 모든 종교에서



그 용어와 개념이 같거나 비슷하다. 반면에 천국은 홍수기(기원 전 만4천년-기원전 8천년) 이후 홍수를 가져온 존재가 하늘이고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농사도 하늘에서 주는 비에 좌우되며 땅보

다는 하늘이 홍수의 위험도 없고 여러 자연의 위협과 고통이 없다는 의미에서 지금부터 약 1만 년 전부터 생긴 개념으로 보인다. 모든 종교에서 천국과 지옥이 있으며 기독교도 그 범주에 속한다.

11). 재림과 휴거, 심판

기도교의 재림은 지구의 멸망과 관련이 있는데 이 지구의 멸망은 창시자 효과이후 6만년 이상 인류에게 전해 내려온 자연훼손이 바로 멸망이라는 관념의 전통에서 나왔고 지금 과학과 이기심이라는 자연 훼손이 온난화, 오존층 파괴, 대기오염, 홍수, 해일, 화산폭발, 지진 등으로 실재로 증명되고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과 우리 민족의 창조주 하나님과의 지구 멸망에 대한 관념의 차이는 우리의 경우 지구는 훼손만 안 하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고 기독교는 예수와 신도들만 하늘로 올라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다. 알의 관점에서 해결해야할 현안

앞으로 우리 민족이 알이랑 함께 가려면 7만년간 이어온 조상의 빛난 얼, 즉 1)자연 사랑, 2) 천지인 한 생명 정신, 3) 그리고 모든 가치의 기준인 양심을 되살리고 경계하고 폐지해야 할 것은 1)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인본주의와 이기심2) 중국과 서구의 인본주의 악행, 3)편익을 위한 모든 문명의 자연파괴, 4) 힘과 권력이 최고라는 정신, 5) 돈이 사람보다 주요하다는 물질 만능주의, 6) 갑과 을이 존재하는 인간의 계급사회 등이다. 즉, 우리 것은 무조건 미신이고 미개한



전통이며 버려야 한다는 생각도 금물이지만 강대국의 것에 무조건 따르는 것도 금물이다. 예를 들면 우선 민족의 국시 중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국시는 지구 상 어느 민족에게도 없다.

우리의 주요현안 과제는 1)통일 2) 강병(안보) 3)부국(경제) 4) 사회 통합 문제이다. 아리랑의 관점에서 우리가 나갈 방향은 문명의 폐단은 제거하면서 장점은 받아드리고 조상의 좋은 얼인 양심을 살리는 방향으로 국가 번영을 이룩하고 이를 5만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전 세계에 수출하고 전파해야 한다.

우선 통일문제는 이 민족은 7만년 이어온 원조민족이므로 인본주의자들(유대인, 엥글로 섹슨, 미국인)들에게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 북한 동포를 위해서는 미국과 결별하더라도 무엇이든지 지원하고 도와주어야 하고 필요하면 중국과 더욱 가까워 질 필요가 있다. 중국은 삼한 중 번한으로 조상이 같다. 우리를 침략하지 않는다. 일본은 대륙에서 피난간 원한 많은 민족으로 근대에 서양의 개가 되었으므로 항상 견제하고 경계해야 한다.

셋째 경제 문제는 한국 내에서 기업 운영과 상품 판매에 있어서 비양심적인 부분을 법으로 제재해야 한다. 양심을 어기는 장사를 금지시킨다. 경주의 최부자가 표본이다. 고조선의 경제 정책을 이어 받는다.

넷째 사회 통합을 위하여 힌두교, 불교, 유교, 기독교, 회교 등 모든 인류의 종교는 모두 한민족의 창조주 하나님인 아리랑에서 나갔으

므로 한국에서는 이해되고 공존해야 한다. 중국의 갑 질이나 서양의 자본주의 의회 민주제도 보다 양심을 우선한다. 제사, 무속 등 모든 전래 전통은 그 근원을 살려 더욱 옳은 방향으로 발전시킨다.



IV 아리랑 판권

차우정 지음

1판 인쇄 2017. 08.23 II판 인쇄 2018.10월(예정)

출판사 신고 번호 인천광역시 연수구 2017-000001

출판사 등록일자 2017.0105

판권 차우정(유고시 차혜은 다음 박민우)

ISBN 978 89 966990 0 2

978 89 966990 1 9(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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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주: 차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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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국군장병에게는 내무반 단위로 무료로 보내어 지는 선교용 월간지 포도원(1988-2010 까지SMS 문서 이후 인터넷)과 함께 보내는 교양서적입니다 여러분도 그들에게 보내시도록 포도원 선교회를 후원해 주십시오